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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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 참 재미있다.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토속적인 분위기. 에로틱한 관능이 뒤섞여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오감을 자극한다.

 

음식을 매개로한 문학작품이 몇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함께 '바베트의 만찬'이나 '초콜릿' 같은 작품은 훌륭한 음식문학이다. 그런데 그것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식욕과 성욕을 같은 층위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음식에 최음제와 같은 작용을 하는 뭔가가 숨어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본 것은, 해피엔딩은 해피엔딩인데 동시에 사랑은 사필귀정인가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우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해피엔딩이니만치, 작가는 애초에 티타가 페드로와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며 행복한 결말은 독자를 만족시킨다. 하지만 비극적 결말이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작가는 오래도록 독자들이 자기의 작품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비극으로 몰아가는 것을 선호해 왔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통례인데, 10대의 나이에 타타와 페드로가 만나고 서로 사랑을 느끼지만, 막내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은 확실히 너무 가혹하다. 혹자는 이런 소설의 설정에 웃음을 금치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집안에 전통이란 명목하에 흐르는 금기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티타의 집안에 그런 전통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우습게 볼 것은 못 된다. 그래도 티타와의 사랑를 포기하지 못한 페드로는 차선으로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한다. 어찌보면 의리와 신의를 배반하지 않는 페드로의 용기있는 결단일수도 있고 또 어찌보면 황당하다.

 

명백히 사랑은 둘 중의 하나다. 주변의 여러 많은 장애 때문에 이루지 못하거나, 그것을 뛰어 넘거나. 그러니 차선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들면 성경의 야곱 같은 경우가 대표적일거라고 보는데, 라헬을 사랑하기 위해 언니 레아를 먼저 취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런 풍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지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거기엔 금지된 사랑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꽤나 호된 몸살을 앓는다.  성경에도 보면 두 자매가 서로 남편 야곱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에도 보면 티타는 언니 로사우라의 끊임없는 의심과 질시를 받으며 산다. 그것이 성경의 그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람의 먹는 것이 성욕을 자극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페로몬이라고 하는 냄새가 성욕을 자극하며, 상대의 관능적인 섹시함이 성욕을 자극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라헬과 레아가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무슨 식물을 가지고 협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식물은 최음제에 해당하는 식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식욕이 채워지면 성욕을 채우려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음식의 화학적 반응을 저자는 문학적으로 꽤나 위트있고 능청스럽게 잘도 표현해 내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일대 일의 관계 보다 삼각관계일 때가 재미있고 극적이다. 타타와 로사우라, 페드로가 전반부를 이끌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티타와 페드로, 의사 존의 관계가 부각이 된다. 거의 존과 결혼이 이루어질 뻔했던 티타. 이 둘을 지켜보는 페드로의 질투와 방황이 대비가 된다. 티타의 관점에서 볼 때 존의 사랑은 다분히 이성적이고 신사적이다. 그런데 비해 페드로와의 사랑은 감성적이고 본능적이다. 그리고 결국 그 본능에 충실해서 티타는 존이 아닌 페드로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그것이 에로틱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성적이기 보다 본능적인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페드로의 우유부단함에 혀를 차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존이 더 미온적여 보인다. 상대를 배려하며 끝까지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런 태도가 더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당신 아니면 안된다는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면 티타는 예정대로 존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사적이고 인격적이면 거기엔 여백도 포함하고 있는 얘기다. 그것은 상대의 선택에 어느 만치는 여유를 주는 것이 된다.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하는 식의. 그렇다면 나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한테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선 거스를 수 없는 강한 육체의 욕구를 제어할 수 없어 결국 페드로와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말이다.

 

확실히 해피엔딩은 사필귀정일 때만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루기까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달콤 쌉싸름하기만 한가? 그러면이야 좋게.  떫다 못해 쓰고 고통스럽지. 우리는 이렇게 재미있게 보지만. 그런 사랑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일까? 이 책은 유쾌하고도 쌉싸름하게 잘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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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10-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헬과 레아가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그 식물이 뭐에요?
갈쳐주세요!!!!
제가 정말 좋아라하는 책인데... 스텔라님도 읽으셔서 기뻐요 ^^ 추천드세요.

stella.K 2006-10-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플레져님! 귀찮아서 대충 쓰고 넘길려고 했더니 님에게서 딱 걸렸네요. ㅎㅎ. <합환채>라고 하네요. 자귀나무라고도 하는가 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잘 안 나와 있네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안 그렇겠습니까? 야곱은 레아와 라헬 말고도 몇 뇨자를 더 거느렸답니다. ㅋ. 추천 고마워요.^^

가시장미 2006-10-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나도 좋아하는 책인데. ^-^ 리뷰 너무 멋지게 쓰신거 아니예요~~ 갈수록 리뷰쓰는 실력이 발전을 거듭하시는 것 같네요. 요즘 전 리뷰 하나도 안 쓰는데.. 자극좀 받아야겠어요. 으흐흐흐 저도 추천~!! ^-^

stella.K 2006-10-2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너 같은 사람이 있어 내가 불을 키고 더 열심히 쓸려고 하잖니. ㅎㅎㅎ 요즘은 하는 일이 있어 책도 많이 못 읽고 리뷰 안 쓴지도 꽤 됐다. 리뷰는 처음엔 안 썼는데 그도 익숙해져 보니 이젠 안 쓰면 싱겁더라. 내가 무슨 책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짧게라도 꼭 쓰렴.^^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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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김훈의 책을 세번째로 읽었다.  첫번째는 그 유명한 <칼의 노래>. 두번째는 <밥벌이의 지겨움> 그리고 <강산무진>.  나는 그의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리뷰를 재대로 써 볼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왜 나는 그의 책들을 좋아는 것일까?

내가 그의 책을 가지고 리뷰를 써 볼 생각을 못했던 건 글쎄, 게을러서 이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명징하면서도 응축된 그의 글발에 가위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인지도 모른다. 이 책 역시도 그런 느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 만큼은 읽은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기어코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무조건 내 눈으로 읽어내린 책은 리뷰를 꼭 쓰도록 하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막상 쓰려고 하니 막막하다. 나는 역시 예의 그의 글발에 채이고 가위 눌리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좋다고 말하는 건, 메저키즘은 아닐까?

그런데 그의 글이 이전의 작품 보다 많이 허무주의에 젖어든듯 하여, 작가도 이젠 늙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칼의 노래'만 하더라도 실존의 시퍼런 칼날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칼의 노래'도 허무주의는 있었다. 단지 이 '강산무진' 에서는 유난히도 도드라진다고나 할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모든 헛되다고 토로했던 건 성경 전도서의 저자가 말 했었다. 김훈은 바로 이 전도서 저자의 허무의 깊이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기사 그의 나이를 어림해 볼 때 모르지는 않겠지. 나는 이 책을 누구에게로부터 거져 얻었다. 내가 '강산무진'을 하도 탐을 내니 준 것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탐을 내니 무안해졌다.  그래서 예의상  몇번 거절했었는데, 그는 "아녜요. 전 김훈의 이 전 작품이 좋긴한데 이건 별로 더라구요. 그냥 읽으세요."하며 더 이상 욕심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는 받은지 몇 달 만에 읽었으니, 나는 이제야 그가 그때 왜 이 책에 욕심을 내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모름지기 책이라면 재미나, 짜릿함, 뭔가의 자극적인 느낌 또는 감동 등이 있어야 할텐데, 이 책에 수록된  각가의 중단편들은 하나 같이 건조하고 인생의 쓴물과 단물을 다 경험한 마초들의 쓸쓸함만이 베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젊음피를 유지할 법한 나이의 그 사람이 읽기엔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했을까? 나 역시도 한창 팔팔한 나이에 이 책을 붙잡았더라면 한장 넘기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이 나이에 그의 책을 붙들었다는 것은.

비록 예전의 그런 느낌은 없는 듯 하지만 그의 작품에선 여전히 삶의 연륜의 베어있고, 무엇보다 그의 문장력은 여전해 보인다. 꽤 건조해 보이는데도 작업상 그 일에 대하여, 또는 그 상황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여 정말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작가가 작중인물을 통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고는 하지만, 작가는 '언니의 폐경'을 통해 또는 '화장'을 통해 어떻게 그리도 여성의 폐경을, 또한 뇌종양에 걸린 아내를 그처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또한 직업에 관하여서도 더 이상의 묘사가 필요없을 듯  잘 표현이 되고 있었다. '화장'에서의 화장품 마케팅. '항로표지'에서의 등대지기의 일이나, '머나먼 속세'에서의 권투선수 등

하지만 역시 그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문장에 그의 주특기인 실존의 그림자를 잘도 교직시킨다. 특히 이 책의 표제작인 '강산무진'을 보면 죽음을 앞둔 주인공이 자기가 없을 죽음 이후를 위해 자신이 살아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들을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감정의 선을 드러냄이 없이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으로만 담담하게 표현함으로 그것만으로도 실존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또한 '고향의 그림자'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통해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의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며 실존을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허무 자체만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실존없이 허무를 얘기할 수 있을까?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왜 작가는 작품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지 않고 허무를 말하려 했을까 하는 것이다. 희망을 얘기했더라면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가? 세상은 사는 것이 퍽퍽하고 힘들어도 희망을 말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얻고 싶어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 비록 거짓이고 허구라도 말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질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 보인다. 이상을 말하지 않고, 세상은 이래. 그러니까 잔말 말고 그냥 살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희망적인 것에, 이상적인 것이 빚을 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독자의 어떠한 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자기 글씀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심산만 엿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인가? 진취적이며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작가와 세상은 이런 것이니 잔말 말고 살라고 말하는 작가.  독자 또는 평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안달이 난 작가와 남이사 뭐라거나 말거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쓰는 작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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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6-09-19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살아야 한다. 김훈선생이 칼의노래를 쓰실때 그점을 염두해 두고 쓰셨다 하시더군요. 외려 저는 그 헛된희망을 가지지 않고.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작가의 인물들이 공감되더랍니다..
김승옥의 허무와 김훈의 허무의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김훈의 허무는.
중년을 넘기고 이제 세상을 알대로 알아버린 자의 받아들임. 섬김. 묵묵함이 담겨있어요. 리뷰 잘읽고 갑니다. 좋은밤 되시길..!


stella.K 2006-09-1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근데 김승옥의 허무는 뭐죠?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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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거기서 보면, 배우 문성근 씨가 모 문학잡지사 편집장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가 박해일에게 그런 말을 한다. 자신도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될 수 없다고. 그건 자기 안에 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내 안에 은근한 부아가 치밀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문성근의 입을 빌어 썰을 풀어대는군 하며 심사가 비틀렸다. 하지만 다른 누구라면 모르겠는데, 문성근이 그렇게 말하니 리얼리티가 살아있어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너무 실감나게 연기를 해서 정말 그가 작가가 되지 못한 게 치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반박해 본다. '한이 없다고 작가가 못되나? 그 나름의 수준에 맞는 작가가 되면 되는 거지. 일류면 일류답게, 이류면 이류답게, 삼류면 삼류답게 작가하면 되는 거잖아!'

난, 한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자기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열패감을 표현한다는 것은좀 바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한'이란 게 뭔가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한(恨)이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정서로써 영어 어떤 단어에서도 이것을 대신 할만한 적절한 표현방법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설픈대로 이 '한'을 대치할만한 단어는 뭐가 있을까? '열등감' 플러스 '우울함' 플러스 '~~에로의 승화' 뭐 이렇게 표현하면 얼추 되는 건 아닐까?

요컨대 나는 이 책에서 작가가 포착하려 하고자 하는 '한'의 정서를 따라가고 싶었다. 지금도 생생히 영상처럼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시대 마지막 기생이 될지도 모를 미스 민이 화초머리를 올리는 그날 밤 추었다던 춤에서 한을 보았다.(본문 104~105). 가난이 싫고, 국악에서 인간문화재 전수자가될 자신이 없어서 부용각으로 들어선 나끝순. 그녀는 거기서 미스 민이란 새 이름을 얻고, 자신의 귀밑머리를 풀어 줄 손님 앞에서 춤을 춤으로 자신의 한을 그렇게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와 닿았다. 그녀의 춤사위는 과연 어땠을까?

그렇게 한을 가진 인물이 미스 민 하나였겠는가? 부용각의 주인인 타박네는 어떻고? 오마담은? 하다못해 오마담의 기둥서방은? 오마담을 먼 발치에서 연모하는 부용각 집사는 또 어떠랴? 그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자신답지 못해서,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가난 때문에, 타고난 팔자 때문에 부용각에 스며들었고, 부용각을 떠나지 못한다.

이 '한'은 소외된 사람에게서나 표현되어지지 주류인에게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은 짓밟혀진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것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으로서 잡초같은 것이고, 동시에 성숙하고 희망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이 잡초 같다고 하여 '신화' 꿈꾸지는 않는다. 그냥 올곧을 뿐이라고 해야할까? 홀로 핀 해어화처럼?

이 '한'이 비교적 젊다고 하는 미스 민에게서도 보여지고 있다면, 오늘 날에도 이어져 오는 정서일까? 왠지 그것에 쉽게 긍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 서민에게서 보여짐직한데, 그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렇다고 인내가 있어 잡초처럼 버티기를 해 보겠는가? 그저 조금만 수틀리면 불 싸지르고 동반자살을 하지 않는가. 아니면 그들의 울분 때문에 불특정다수를 표적으로하여 복수 아닌 복수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한'이라고 하는 정서만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 높은 자존심을 갖게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가 음주가무에 뛰어났던 건 바로 이 '한'이란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픔이 없는 사람 보다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다는 것도 또 그렇게 봐 줄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한'을 알기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상처있는 사람끼리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이 말했던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과연 문성근이 말했던 '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한'이라는 정서가 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작가의 문체는 아름답고 농염하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처연하다. 절대로 요즘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경쾌하고 스피디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마치 한지에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고 단아하며 그 안에 정염을 내포하고 있다. 아,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단말인가? 가히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 꼭 '한'을 말하지 않아도 작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작가가 되고 싶다면 '한'을 마주하고, '한'에 도전하고, '한'을 풀어헤쳐봐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난 쉽게 읽혀지지 않은 이 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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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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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끔 그런 책이 있지 않는가,  이를테면 읽어야할 책들의 목록이 잔뜩 쌓였음에도 어느 날 문득 매스컴이나 일지 못하는 곳에서 툭 비어져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만드는 책 말이다. 그래서 꼭 하필 그때 그 책을 읽어내지 않으면 다음 책을 못 읽게 만드는 그런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책. 나에겐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요즘의 신예 작가들의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에 대한 나의 느낌 은 두가지로 나뉜다. 좋거나 나쁘거나. 그 중간은 없었던 것 같다. 좋은 것은, 뭔가 무시 못하는 신예다운 번뜩이는 기지 때문에 좋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나쁘다면 '그래. 결국 그럴 줄 알았어.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나 이렇게 썼니?'하고 마냥 비아냥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의 신인 작가들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고 글을 쓰겠는가. 이것엔 독자들이 너무 똑똑해진 것도 한몫할 것이다. 그런 책은 독자들이 절대로 사 보지 않는다.(물론 취향이긴 하겠지만)

그런데 감히 말하건데, 난 이 해이수라는 작가가  너무 마음에 든다. 언젠가 그의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20대 중반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고전 철학서와 경전을 읽고 있다고 한다.  호주로 가는 유학 짐 속에 고전 경서를 챙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서사를 쓰고 싶어서가 그 이유란다. 이만하면 이 작가 믿을만 하지 않을까. 바로 이점 때문에 나는 서둘러 이 책을 펼쳐들은 것이다.

이 책의 첫번째 수록작 <몽구 형의 한 계절>은 몽구라고 하는 아는 형이 자신도 막상 해 보지도 못했을 섹스를 마치 해 본 것 마냥, 또는 화자의 아버지가 몽구 형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빤한 거짓말을 눙치는 솜씨만큼이나 술술 잘 읽혀진다. 

<돌베게 위의 나날>은 제목이 암시하듯, 성경의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잔 것을 따서 성서의 야곱의 신화만큼이나,  땅 설고 물 선 곳에서 고생 끝에 낙을 이루며 잘 살게 되는 신화를 꿈꾼다. 하지만 우리의 이민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다. 이 낮선 호주에서 내가 살기 위해 서로가 불법체류자임을 고발하므로 남을 짓밟는 이민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무리없이 현실감있게 그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라나라도 살만하니 외국 나가서 편히 살거라는 환상을 갖기 쉽겠지만 이민자들 대다수가 아직도 이런 고생과 수모를 당하고 살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설의 사내나 그의 선배처럼 고생 끝에 병을 얻고 불법체류자가 되서 귀국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도 있겠지. 무엇이 진정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를 되묻게 만든다. 

<우리 전통 무용단>은 내가 '몽구 형의 한 계절'과 함께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시골에서 호주 관광여행을 온 노인들의 입담과 그들을 가이드 하는 '내'가 겪은 고생을 에피소드와 함께 잘 녹여낸 작품으로, 제목은 바로 호주관광을 온 노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화자가 즉흥적으로 지은 이름인데  왜 그런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는 독자가 직접 읽어보면 읽고 나서 과연 그렇구나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될 것 같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란 그렇게 해외를 나가서 일부러 볼래야 볼 수 없는 어느 순간 포착이 되어서 보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앞서 '돌베게의 나날'과 사뭇 대칭되어 보이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여행을 할 때 이제까지의 나를 벗어두고 쓸데없는 걱정없이 온전히 그 상황에 나를 맡겨 보는 태도를 취해 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생각지도 않은 사람 사는 냄새를 느껴 볼 수 있을 것 같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은 새삼 우리나라에 동성동본 금혼법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 이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소설이다. 동성동본의 금혼법이 많이 완화가 되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호주 여행에서 귀국하기를 꺼려하는 '나'와, 그 여행 중 만난 연상의 일본 여자에게서 동성동본 보다 더한 동생을 사랑하는 아픔을 목도하는 데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의 분위기는 전작과 달리 한없이 우울하고 끈적끈적하다. 그리고 정말 화자가 호주 여행을 하고 있구나 싶게 꼼꼼한 묘사가 돋보인다.

<관수와 우유>는 사춘기 그 시절에 한번쯤 있음직한 패싸움을 리얼한 상황 묘사와 함께 커뮤니케션의 불능상태를 위트있는 문체와 함께 유머러스하게 잘 녹여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수록작 <환원기>는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비장미가 흐르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이야기의 초두에 '스승'와 '교사'의 의미를 가른다. 이를테면,  교사로서의 선생은 모든 고양이를 선량한 고양이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사부로서의 스승은 고양이들 중에서 호랑이가 될 만한 놈만을 골라 키운다.(300p)고 정의 하면서 스승의 부재를 말하기 보다는 그런 참 스승을 알아 볼 수 없는 졸렬하고 한심했던 지난 날의 제자가 스승을 생각하며 참회록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8편의 작가의 중단편 소설은 신예답지 않은 명징한 문체와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색깔을 띄고 있다. 소설을 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빠지는 감정의 함몰된 오류도 작가는 용케 빠지지 않고 잘도 헤쳐 나온다. 단지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작가가 호주 유학파인만큼 소설의 공간이 거의 대부분 호주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조만간 극복 되어지지 않을까 한다. 그러고보니 호주는 지금 겨울이겠군.

하지만 소설을 쓰는데 있어 작가의 체험이나 목도한 사실을 형상화하는 것 못지않게 공부한 것을 작품 속에 투영하려는 지적인 노력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본 받을만한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 덕분에 덥고 습한 여름 날을 그나마 수월하게 견디고 있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언제 다시 마주할지 모르지만 또 만나게 되면 기쁘게 다시 마주 대하게 될 것 같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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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방송의 인기개그 프로그램에서 백수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백수생활백서' 코너가 있었다. 거기서 나온 고혜성이란 개그맨이 얼마나 그럴 듯한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웃겼는지 한동안 그것이 세간에 회자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실업자들을 풍자한 것으로  꽤 인기를 구가했다.

 

실업자의 설움이 얼마만한 것인데 '백수생활백서'가 하늘을 찔렀던 것일까? 희극배우의 성공요인 중에 제일로 꼽는 건, 본인은 무대에서 슬픈데 보는이들은 오히려 카타르시스와 희열 느낀다면 그 배우는 대단히 성공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표적 인물을 꼽자면 단연 채플린이 아닐까? 그 다음으론 로베르토 베니니 정도?

 

이 책, <백수생활백서>를 읽으면서 갑자기 '백수'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졌다. 그냥 단순히 실업자면 다 백수일까?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업률 몇%라는 수치에, 무조건 일을 안하고 있으면 실업자의 대열에 넣는 것에 대해 억울해할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들은 여러 이유에서 일을 안하고, 경제활동을 안할 뿐이다.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고있다고, 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이런 사람을 얕잡아 보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건 또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과 가치가 다를 뿐이지 그것이 문제가 되거나 병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는 아직도 획일적인 것이 많고, 분류기법이 세밀하지가 않아서 그들을 단순히 실업자의 대열에 집어넣기를 서슴치 않고,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단죄하기도 잘한다.

 

그렇다면 백수를 정의하기 전에, 무엇이 백수가 아니냐를 논해 보면 어떨까? 당연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면 백수가 아니다. 일하다 잘려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역시도 백수로 보는 건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억울에 한다는 것은 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라는 것으로, 그는 언젠가 복직을 하던가, 아니면 새 일을 찾게 되던가 할 것이다. 또한 부류가 있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평생 무슨 일을 할까, 뭐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들. 그들이 백수라고? 웃기지 마라. 그건 '베짱이'거나 '양아치'라고 하지 그런 부류의 사람한테 '백수'란 거룩한 이름을 부여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럼 어떤 사람을 '백수'라고 하는가? 우선, 백수는 자발적이다. 돈을 벌라고 등 떠밀어도 절대로 그 말에 굴복해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재주를 가졌던 지간에 그 재주로 자신의 안일을 도모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빌붙어 살아도 그것을 부끄러워 해서도 안 되고,  최소한의 용돈벌이는 하되 긴 안목에서의 노후대책이나 재테크를 위한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수'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 하루를 살뿐,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살거라고 하는가 그림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 딱 한가지만을 미치도록 아니 미쳐서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백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이 미래에 돈벌이가 될런지 안될건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화는 어떤가? 이런 '백수'를 보호해 주고, 그들도 살 수 있게끔 하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없다. 그들은 나중에 돌봐 줄 사람이 없게되면 기껏해야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최저생계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서 인정만 된다면 억울하게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아도 좋고, 실업률 몇%란 수치를 다소 떨어뜨려 줄 수 있고, 그 때문에 국가의 위신도 올라갈 뿐만 아니라  대외신임도도 올라갈텐데 국가에선 이런 '백수'에겐 관심도 없다.        

  

왜 우리나라는 '백수'라고 하면 문둥병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아까 말했던 부모 잘 만난 골빈 베짱이, 양아치와 결혼할 망정 '백수'와의 결혼은 꿈도 안 꾼다. 이건 그가 아무리 잘 생겨도 거부한다. 왜 그 잘난 인물 가지고 인물값도 못하냐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인물이 좋다는 건 백수가 되는데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다.

 

백수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봐 주질 않는거냐고. 내가 꼭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경제적 가치가 환산이 되야만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그 가치가 참된 가치일 것인가?   

 

책에서 주인공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묻는다. 왜 할머니는 소설을 쓰지 않냐고, 그러자 외할머니는 말한다. 소설보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인생을 사는 것이 더 재밌거든. 사는 재미에 빠져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자꾸 미뤄졌지.(316p)라고.이것이 백수의 삶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충만한 상태를 즐기는 것. 솔직히 난 인생을 사는 것이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란 아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란 말이지 백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도 책을 좋아하고, 저자도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인공과 저자가 좀 다르긴 하다. 언젠가 저자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니, 그녀는 사회생활 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대학원을 갔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백수가 될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오늘의 작가상'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작가라는 직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이 아닌가.

 

물론 그녀는 소설 어디엔가, 작가는 직업이라기 보단 정체성에 불과하다고 피력해 놓았다. 나도 거기엔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래도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온전히 글만 써서 밥벌어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게 보면 작가는 직업은 직업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친철하게 <상업문화예찬>이란 책의 예를 들어가면서 역사상 유명한 예술가들이 순수하게 예술활동만 가지고는 자신의 삶을 재대로 영위할 수 없음을 역설해 놓음으로 자신은 여전히 백수임을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274p)

 

'상업문화예찬'이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상당히 많은 책들을 인용해 놓았는데, 그중 단연 이 '상업문화예찬' 은 나의 가장 많은 흥미를 끌었다(난 이책을 언젠가는 손에 넣고 말 것이다). 왜냐구? 나 역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온전한 백수이길 바라지만, 자꾸 일에 대한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나의 이런 유혹에 대해 이 책이 일말의 답을 주지 않을까 한다.

 

솔직히 작년에 잠깐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해 본적이 있는데, 하면서 나는 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책을 읽는 것과 일. 이 둘 다를 잘할 수 없다면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고 하나만 잘하는 것이 나에겐 차라리 더 유리할 것 같아, 난 그 일을 버리고 내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시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백수는 아니었다. 나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뭔가의 일을 꿈꾸고 있지 주인공처럼 책만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좋던 싫던 지금으로선 백수가 아닌 실업자로 분류되야 마땅할 것이다. 일을 기다리는 실업자. 언젠가 나의 날개를 피면 이 딱지도 떨어질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

 

내 후배 한 애는 내가 돈을 벌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다 못해 닦달까지 한다. 난 녀석이 좀 무례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 그애의 닦달에 제동을 걸어 본적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오히려 서글퍼진다. 왜 사람을 돈벌이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만 구분지을려고만 하느냐고 녀석에게 따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녀석의 그런 시각이 마음에 들지않고,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은 천박해 보인다. 그러면 녀석은 그러겠지. 언니는 현실감각이 없고 아직도 구름위를 걷고 있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천박한 것인데. 어디 한번 자기 같이 싱글맘으로 살아보라고, 대뜸 치고 들어 올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내가 참는 수 밖에. 이것이 백수가 된 죄라고 밖에 달리 뭐라고 설명하랴?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백수가 대우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어쩌랴.

 

그래도 이 책이 백수의 위상을 올려놓은 것 같아 나름대론 애정이 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앞으로 읽을 사람들에게 오해 안 했으면 한다. 물론 그럴리 없겠지만, 백수는 책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이 책이 안 그래도 독서인구 감소 방지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좋은 일이긴 하나, 백수가 책만 읽어야 진정한 백수라고 어디 나와 있겠는가? (솔직히 난 초반에 읽으면서 제목에 불만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때문에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백수가 아니겠는가? 단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책읽기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영악하게 사람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는 것뿐이지. 어쨌거나 이 책은 나에게 즐거운 독서체험을 하게해 준 것마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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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0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적극 동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

Mephistopheles 2006-07-2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리뷰 좀 자주 올리면 안되겠니~~!! (요)

stella.K 2006-07-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오랫만에 리뷰에 댓글을 받아 보네요. 그동안 쓰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 서재 폐쇄하려고 했어요. 엉엉~

소쿠리 2006-07-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원에 다니다가 휴학을 하게 된 20대 후반 남성입니다. 학원강사 자리를 구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놀고 먹는 백수 신분이 되었지요... 백수를 단지 일 안하는 사람으로 쉽게 구분하는 사회의 편견을 잘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보고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는 살 수 없지 않느냐는 근엄한(?) 충고를 하기도 하지만, 저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 살고 싶지 않아서 쉽고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인문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미래가 많이 불안하기도 하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님의 리뷰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stella.K 2006-07-2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위로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6-08-01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8-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self-esteem! 얼마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고마워요. 읽어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