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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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때 시를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어의 영롱함이랄까 깊은 옹송그림이 나의 의식을 붙잡고 놔주질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못 쓰긴 하지만 직접 써 보기도 했다. 써 보면서 이게 과연 시일까?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낯간지럽고, 소름이 돋을 것도 같았다. 시를 아무나 쓰나? 시 쓰는 영혼은 따로 있는 것만 같았다.

 

후회가 남는다. 이왕 그렇게 알기 시작한 시라면 깊이 빠져 볼 걸 어쩌자고 한쪽 발만 잠깐 담그다 말았을까? 핑계 같은 예기지만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고, 사랑할 용기가 없어 시작도 못하고 뒤돌아서버린 형상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시를 잊은 걸까, 시가 나를 잊을 걸까? 전자가 됐든 후자가 됐든 잊힌 존재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나는 시를 잊었다.

 

그렇게 된 것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우리나라가 언제 시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 특별히 이 나라 교육이 시를 좋아하도록 권장한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권장은 고사하고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시를 음미하고, 좋아해야할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했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했다. 세상에 모든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을 좋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를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제도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니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면 정신분열에 걸리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시는 솔직히 담이 높다. 여간해서 자신의 실체를 한 번에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무슨 스무 고개라도 하듯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보여주는 것이다. 몇 번씩 곱씹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스피드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시는 생리적으로 잘 안 맞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시 세계 전반에 흐르는 엄숙주의는 어떠한가? 홀로 고고하다. 80년 대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낙서 같은 대중시가 유행했었다. 그에 포문을 열었던 게 원태연 시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를 두고 얼마나 문단계와 대중이 말이 맞았던지. 나 같이 어정쩡하게 시를 좋아하다 만 영혼은 정말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 그럴 바엔 아예 시에 냉담해지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지금은 그 시 보다 더 문턱을 낮춘 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단계가 시를 더 고립시켰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린 왜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러기 전에 시인은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자. 이 책의 저자 장석주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오만한 영장류의 시대는 얼마나 지속될까? 생물학적 피폐화의 시대, 멸종의 시대는 금세기 안에 끝난다. 공생과 공존의 감각을 키우고,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채 일방적 독주를 하는 한 인류 문명은 종말을 맞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단단한 믿음에 구멍을 내고, 인류와 동물들, 문명과 자연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과 균형을 찾아줄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고 월트 휘트먼의 말을 인용해 말한다(46p). 우리가 의사가 왜 필요한지, 교사는 왜 있어야 하는지, 상인과 정치가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작가 특별히 시인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모르는 사람은 시인을 그저 이상주의자고, 신선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린 시인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리와 아름다움의 주춧돌, 인간의 시간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광대함이자 인간 마음의 최대치고,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졌으며, 방랑자, 게으름뱅이, 판관이다. 비율과 형평을 맞추는 자들이고,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찰라에서 영원을 보고, 언어, 징후, 신호, 상징에 민감한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리듬의 직조이며, 노래의 적자며, 좋은 시인은 항상 생성과 소멸에 민감하고,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일상에 흔히 존재하는 사람 같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이 일상적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명징하고 묵시적인 존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이 시를 쓴다. 여기서 먼저 짚어봐야 하는 것은 시는 원래 그렇게 만만히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낯설고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으로 쓰기 때문이다. 위에서 난 시를 멀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이 이유가 더 근본적이지 않을까? 시 보다 소설이 좋은 건, 소설은 논리와 합리적으로 말이 되게 풀어나가면 된다. 은유 보다 직유를 사용해 복잡하지가 않다. 가끔 내 마음도 내가 모를 때가 많은데 온갖 은유로 무장된 시에서 언제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음미한단 말인가? 그런 것은 내 취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를 쓴다. 그들은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로 끝난다. 고양이를 밤의 야경꾼이라 쓰고, 비 온 뒤 길에 고인 물웅덩이를 길의 눈동자라고 한다. 확실히 멋진 은유다.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은유화라고 했고, 진정한 의미를 낳는 것이 은유라고 했다. 창조의 번뜩임이고, 언어의 가능태가 곧 은유다.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는 없으며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만 있다고 했다. 그건 확실히 직유로 이루어진 소설 보다 낭만적이고 은밀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통음 난무하는 자들의 외침, 산모의 허공을 찢는 비명, 사물들의 속삭임, 편물 기계들이 내는 소음들, 새벽이나 황혼 같은 기후들이 내는 소리, 악마와 연인의 목소리, 얼음과 바람이 내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이를 세계에 중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제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으로 이끈다. 과연 멋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시인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살로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나쁜 시는 무엇인가? 사실 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 대는 시, 큰 진실, 큰 목소리, 넘치게 옳은 소리가 작은 소리, 여린 것들의 속삭임, 가냘픈 것들이 내는 소리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쁜 시 또는 악시(惡詩). 또한 직유는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오직 나쁜 시인들만 직유를 남발한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고 하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쓴단다. 좋은 시집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집이다! 좋은 시집들은 대개 좋은 이미지의 백과사전이다.

 

또한 그것은 시에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노르웨이 국민시인 올리브 하우게의 시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에서 밝힌 의미이기도 하다.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 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그는 매일 시 한 편을 쓰고 싶다고 소박한 갈망을 표현했다. 시는 엄청난 영감이나 고매한 착상이 아니라 떠오른 생각, 일어난 일, 무언가 주의를 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것은 시는 그렇게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를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자. 시는 늘 우리 가까이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하기만 하고 진실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삭막한가. 어떤 이는 말했다.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깝다. 시는 바로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것.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중국 치마 차파오 같은 거라고.

그렇구나. 시는 그렇게 앙큼하고 엉큼한 것이로구나. 이것을 모르고 감히 덤비려 했다니.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어찌 보면 사변적이긴 하다. 함민복 시인이 언젠가 자신의 시에서 내 시를 팔면 얼마의 돈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게 더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만 정의된다면 누가 시인을 할까? 그렇게 사회적인 의미로만 시인이 해석되어진다면 또 말하건대 세상은 피곤하고 삭막하다. 누군가는 세상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시인은 이 세상의 피곤과 삭막함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맞다.

 

저자는 시와 철학은 친척관계라고 했다. 시를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한다. 저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알만한 소설가들은 처음엔 시를 쓰다 소설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가 소설을 쓰기 위한 전단계로 오해하면 안 될 것이다. 시는 그 나름의 존재의 무게와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평생 이 시의 감옥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장석주는 책을 알뜰하게 읽고 살뜰하게 글을 쓴다(이 책은 세 번째로 읽는 책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문장노동자라고 했는데 그의 그런 구도자적 자세는 정말 본받고 싶다. 그런데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조금은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만큼 빼어나고 진지하게 시를 인문학적으로 잘 정의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를 읽다 문득 시와 시인이 뭔지 알고 싶어지거든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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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5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8-25 18:18   좋아요 0 | URL
그렇죠?^^

2017-08-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읽어야 할 손자병법 - 읽으면 힘을 얻고 깨달음을 주는 지혜의 고전 삶을 일깨우는 고전산책 시리즈 4
손무 지음, 미리내공방 엮음 / 정민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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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병법서가 필요할 만큼 크게 싸울 일이 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기는 하다.

뭐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겠는가?

가만있는데 치고 들어오는 인간들이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쌍욕을 장풍 같이 날려 준다고 해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쌍욕을 찰지게 잘하면 싸움을 잘한다고 사람이 아직도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기술을 조금이라도 알면 이건 가장 낮은 수준의

싸움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백중세면 빤스 바람으로 드러눕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건 무슨 생지랄이란 말인가? 이런 승자독식과 패권주의가 난무하고,

무림고수의 세상에서. 수준 낮아 못 싸워주겠다.

알아서 남 주는 세상이 아니다. 싸움은 더더욱.

그건 나를 지키는 최고이면서 최후의 방어수단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하긴, 빤스 바람으로라도 승리를 쟁취하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것도 이기는 방법은 방법일 것이다.

책에 보니 미친 척 하되 진짜 미치지는 말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가볍게 읽는 일종의 손자병법 안내서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싸우면 이기고, 저렇게 싸우면 진다는 걸

예를 들어가며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싸울 일이 별로 없고 늘 평화로운 나날을 살고 있는 사람에겐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병법서이기 전에 처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승자독식과 패권주의의 세상이라는 걸 안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새삼 깨달은 점이 있다면 역시 전쟁은 역시 사람이 한다는 것이다.

사드니 핵무기니 세상에 말도 못하는 살상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게 다 소용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무기가 없고 오로지 칼과 창만 있어서 병법이 필요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또 어찌 보면 그것만 있었기 때문에 더 지혜로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드가 있고, 핵무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넋놓고 사는 세상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전쟁도 깜냥이 돼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병권을 쥔 높으신 분들

이런 병법서도 안 읽고 설마 그 자리를 꿰차고 계신 건 아니겠지?

장신 바짝 차리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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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8-19 15:13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진짜 이기는 거라는 건데
지는 게 이기는 것이기 때문인가 봅니다.ㅋㅋ

cyrus 2017-08-1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이 책은 손자병법을 뻔한 처세술 형식으로 편집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7-08-19 15:30   좋아요 0 | URL
이걸 읽을 바엔 진짜 손자병법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내가 고전 울렁증이 있잖니.특히 동양철학은.
싸움을 잘해 볼까 해서 읽어 본 건데 좀 아쉽긴 해.
그래도 요즘 사람 읽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페크pek0501 2017-08-19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히 제게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읽어 두면 나쁠 것 없을 책 같습니다.

stella.K 2017-08-20 11: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손자병법이란 말에 혹해서 읽었습니다.ㅋ
 
광신자 치유 - 우리 안의 나쁜 유전자, 광신주의를 이기는 상상력의 힘
아모스 오즈 지음, 노만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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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몇 가지 있기는 하다.

무엇보다 아모스 오즈란 작가를 난 이 책에서 처음 접한다.

책이 얇아서 아모스 오즈를 아는데 용이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또한 나는 현재 교회 세계  선교 기도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여러 지역 중 중동 지역을 위한 기도 모임에 나가고 있다.

물론 주로 그곳에 파견된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참석하다 보면 중동 지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할 수가 있다.

같은 선상에서 이 책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모스 모즈가 말하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어찌보면 간단하다.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며 평등하게 잘 살자는 것.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제 한 세기가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나라 한반도도 문제고, 유럽 난민도 문제다.

 

역사상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 없다.

그것이 기독교가 됐던, 무슬림이 됐던 아니면 제3의 신이 됐던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광신과 신앙 그리고 신념은 서로 구분되어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광신을 비판하고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상처를 받으면 안 된다.

원래 신앙은 원초적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거기에 인간의 신념과 권력이 수반이 되면 그 신앙은 변질되고

광신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변질된 신앙심을 이용한 살육과 영토 전쟁.

이것이 광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앙은 인간의 권력을 위한 필요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중동 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만큼 그렇게 과격하지 않다.

오히려 현지인들과 상호호혜의 원칙에 따라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복음은 언제 전할 것인가 서두는 것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 따라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그리고 과격하게 복음을 전할 환경이 되지도 못한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니 사소한 갈등은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것을 확대해석하거나 곡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아모스 오즈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일까?

당연 세상의 권력자들에게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들.

무고한 양민을 조정하는 악의 세력을 향해.

우린 확실히 이성을 되잖을 필요가 있다.

 

사실 오즈는 광신을 치유하는 건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글쎄, 내가 너무 문학을 얕보는 걸까?

그게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다.

문학이 언제 그러리만큼 대중적이고 파급력이 강했던가?

 

그러나 오즈가 가진 힘은 믿고 싶다.

사람은 무엇이 됐던 어떤 힘을 가졌든 인류의 안녕과 번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꿈이 그저 돈이나 벌고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얼마나 허무하고 동시에 위험한 것이 될까?

그럼 점에서 오즈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권력을 세계 평화를 위해 외쳤다. 

 

그는 불을 끄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하나는 방화자를 쫓아 응징하는 것이고,

아니면 여기 불났다고 신고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세 번째는 불에 직접 뛰어들어 끄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게 설혹 티스푼의 물이어도 말이다.

티스푼 가지고 무슨 불을 끄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티스푼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너도 나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불은 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꼭 오즈 같이 유명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바람이 그러하면 언젠가

이룰 날이 온다는 말도 되겠지.

그렇다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저 북한의 짧은 머리 광신자의 우두머리도 어느 땐가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인간의 희망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조금만 더 힘을내고 갈망하자. 

그가 어떻게 이성을 되찾고 굴복하게될지 지켜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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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05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광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진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진실에 기초하되 상상력을 채워 넣은 문학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진실의 비중이 적고, 상상력이 넘치는 문학은 수면 위로 뜨지도 못하고 가라앉습니다.

stella.K 2017-08-05 12:49   좋아요 0 | URL
명언이군.
혼자 멋있으면 어쩌자는 건지...ㅠㅋㅋㅋ
 
보길도 기행 - 비밀의 정원 보길도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들
김나흔 지음, 구자호 사진 / 현실문화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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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길도. 언젠가 들어 본 이름이긴 하다. 하지만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 섬이 600 곳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대표 여행지도 아직 채 다녀보지도 못한 내가 이렇게 입술로나마 떠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보길도는 충분히 이름값을 다하지 않을까? 그런데 보길도. 언제 누구한테서 들은 이름일까? 그리고 난 그곳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세도가 이이첨 등의 불의를 폭로하다가 오히려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을 맞은 임금께 서둘러 문안인사를 올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두 번째 귀양살이를 했다. 또 이는 잘못 알려진 바, 사실은 임금을 구하러 가솔들을 데리고 강화도를 출발했지만 도중에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원래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야했지만 풍랑에 잠시 머문 곳이 이곳이다.

 

아무튼 입신양명의 길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윤선도가 평생 좋아했던 곳이 보길도이기도 했다. 특히 세연정이라는 곳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새삼 이 역사적인 귀양지도 세월이 한참 흐르면 기념비적인 곳이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어느 한곳도 허투루 여길 곳은 없겠다 싶다.

 

책은 그런 역사적인 추적을 비롯해 그곳의 천혜의 비경과 특산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해 놓고 있다. 사진과 함께 보면 이 글에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고 써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긴 하지만, 평생 날지 못하는 공작새처럼 우아하게 사는 나에게 이건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싶다. 아니 떠나지 못하니까 이렇게 책이라도 보며 위로를 삼아야 하는 것이 맞는 걸까?

 

책 뒤에 보면 여행서답게 먹을 곳과 잠잘 곳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그래도 언젠간 꼭 떠나 보세요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언제고 이 책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 그땐 책 들고 꼭 한 번 떠나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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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8-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서 보길도로 향하는 여행을 해 보고 싶군요.
책과 함께하는 여행, 머릿속에서 상상해 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가을 여행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를 생각하며...

stella.K 2017-08-02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차피 여름에 떠나지 못할 여행이라면
가을에 떠나는 여행이 좋죠.
햇볕은 여전히 따갑겠지만 습기는 없을 거잖아요.
읽으면서 귀양도 꼭 불행한 것만도 아니겠구나 싶어요.
천혜의 자연이 위로에 줄 텐데 말이죠.
암튼 조만간 언니의 보길도 여행 사진 볼 수 있겠군요.ㅎ
 
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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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문학소년 또는 문학소녀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문학소년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문학소녀의 대응어로 훗날 이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문학에 뜻을 두었다면 문학청년 줄여서 문청이란 말로 불러준다. 그리고 이는 작가지망생의 또 다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학소녀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다. 일반인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땐 시나 소설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들이 그 꿈을 가지고 성인이 되어 작가가 된다면 여류작가가 될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학소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류작가란 말도 일제 강점기 몇 되지도 않았을 여성 작가를 비하해서 썼던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가를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눠 남자는 그냥 작가라고 부르면서 여자는 굳이 여류란 말을 붙여 차별을 두고, 여자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조장한다는 반발론을 제기해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새삼 언어의 음모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여류작가란 말은 폐기했지만 문학소녀란 말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우리의 의식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문학소녀란 말은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아직도 여성작가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저자는 문학소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혜린에서 찾고자 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자신이 문학소녀였다면 전혜린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줬다는 말로, 그만큼 전혜린은 당대뿐 아니라 모든 여성 문학인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책은 주로 일기나 단상을 자유롭게 쓰며 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누구인가?

전혜린은 한마디로 고관대작의 영애 소리를 들을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전봉덕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해방 당시 경시(총경) 직위까지 올랐고, 나중에 반민특위로 헌병사령부의 친일파의 도피처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폐일언하고(전혜린이란 예외적 존재란 곳을 읽어 보라) 딸에 대한 아버지 사랑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4세 때부터 한글과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고, 딸에겐 심부름이나 주방 일 같은 건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아버지가 친일파로 책 읽는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정도라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양을 동경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식욕이 대단한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겉으론 모던 걸처럼 자유분방 했다. 문학소녀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안다면 문학소녀=전혜린이란 등식도 설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전혜린은 그토록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했음에도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다. 전혜린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은 오로지 에세이였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의 사후 그녀가 알던 지인을 통해 엮어낸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는 살아생전 책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혜린은 오로지 번역가로만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평자들로부터 그녀를 저평가하기 좋은 것으로 작용한다.

 

오늘 날의 에세이는 어느 정도 인문학적 교양과 격식을 갖춘 것도 많지만, 당시의 에세이 즉 수필이라는 것은 마음가는대로가볍게 쓴 이지 고잉(easy-going)’ 즉 만필이었다. 그러니까 수필은 시나 소설 보다 못한 하위 문학으로 취급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혜린은 문학소녀이면서 만필이나 쓰는 어느 팔자 좋은 모던걸 또는 유한마담처럼 평가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읽고 쓰는 여자들의 흑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또 어디까지 낮췄냐면, 문학소녀의 일탈 행위를 지적하며 정신적 환상증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문학소녀의 자살로까지 확대해석하며 문화발전에 따른 향락욕과 태타욕(怠惰欲)과 사치욕에 기인한 좋지 못한 사상의 결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154p). 이렇게 보는 관점은 여성은 남자보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혜린을 비롯한 당대 엘리트 여성을 가리켜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는 형용구를 쓰기도 했다. 언뜻 들으면 여성을 존경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여자를 경멸하여 이른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손은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특권 지배층의 손이라며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 또한 불란서 시집을 읽으며 허황된 꿈에 잠긴 소녀야 말로 일하지 않는 자라며 비난하고, 문학소녀는 공공의 적이자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아는 고종석이나 김화영 같은 지식인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요즘 같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위신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파급력이 강한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남자들이 글을 쓰고 문학을 하는 건 고양된 정신적 행위이거나 생존이 달린 문제로 진지하게 봐주면서, 왜 똑같은 행위를 여성이 하면 그건 일탈이거나 아니면 잉여 행위로 보는지 모르겠다. 물론 전혜린이 문학 위해 죽은 건 아니지만(그녀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학을 하다 죽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전혜린을 저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여성들이 볼 때 전혜린은 확실히 앞서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독일 유학생이자 독일 문학자요 번역가다. 그녀가 살아생전 독일 문학을 열심히 번역하지 않았다면 헤르만 헷세나 루이제 린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알았던 때보다 훨씬 늦게 접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의 평자들이 그런 싸구려 저평가를 늘어놓고 있을 때, 그녀가 독일에서 얼마나 생활에 쪼들리며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 건 확실히 그녀를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다.

 

전혜린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성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나라의 정치가와 문학권력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문학 발전의 길은 멀어 보인다.

 

일례로 193, 40년대 우리나라 여성의 문맹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비해 일본 여성들은 그때 문맹을 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5, 6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것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이 여성에게 전파되는 속도가 일본 보다 늦는다는 말이기도 하니, 우리나라 문학은 전반적으로 일본 보다 훨씬 뒤져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일본도 문학소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여성 문학인에 대한 저평가를 쏟아낼 때 일본의 여성 문학은 저만큼 앞서갔다는 얘기다

         

사실 이 책은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마치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 같다. 또한 여성 문학의 앞으로의 전망은 뚜렷이 제시하지 않고 있어 그 점은 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리나라 문학소녀들도 이런 읽고 쓰는 여자의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이 문학소녀란 말도 여류작가란 말과 함께 사라져야할 말은 아닐까 싶다. 여성문학도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그냥 문학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필요하지만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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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읽기》(푸른역사, 2017)에 전혜린 작가의 이야기가 나와요. 작년에 최남선, 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추진한다고 말이 많았어요. 다행히 상 제정은 무산되었어요. 그런 친일 작가 이름을 딴 상 만들지 말고, ‘전혜린 에세이 문학상‘이라든가 ‘전혜린 번역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stella.K 2017-07-24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그런 책이 있었네.
그런데 전혜린이 그런 평가를 받지 않더라도
그녀의 아버지가 친일파였잖아.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전혜린을 저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거야.
에세이는 번역물은 좋은데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낮게 보는 시각이 많지.

페크pek0501 2017-07-2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전혜린의 번역이어서 작가와 번역가를 동일시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서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stella.K 2017-07-27 17:44   좋아요 0 | URL
저는 전혜린 번역본으로는 못 읽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를 동경하지 않는 문학소녀는 없었다고 봐요.
우리 여자들이 그러고 있을 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게
씁쓸하긴 하죠?
책이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transient-guest 2017-07-3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혜린이 낮은 평가를 받는 다는 건 몰랐네요. 항상 뭐랄까,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이미지로 남아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TV드라마 명동백작에서 이재은씨가 연기한 잠깐 나온 모습이 기억나네요.

stella.K 2017-07-31 17:5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번에 새롭게 알았어요.
적어도 전혜린만큼은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명동백작에 전혜린이 다뤄졌던가요?
저도 그 드라마 너무 괜찮아서 빼놓지 않고 봤다고
생각하는데 전혜린 나온 건 기억에 없네요.
잠깐 나왔다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남성 문학인 일색이란 말이겠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