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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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는 작가 프랜시스 하딩의 이 작품은, ‘해리 포터 열풍을 잇는 단 한 권의 미스터리 판타지 걸작이라는 대단한 호평에 깊은 관심을 갖던 차에 만나게 되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안개가 많은 나라, 특유의 음산한 날씨 때문에 환타지문학이 발달했다고도 한다. ‘거짓말을 소재로 한 이솝우화 늑대와 양치기소년이 생각난다. 장난삼아 했던 거짓말로 인해 신뢰를 잃고 양들을 모두 늑대에게 빼앗기는 이야기. 그래서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의 거짓말로 인해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무척 궁금해 하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 읽은 후에, 요즘 들어 더없이 푸른 하늘 아래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햇빛과 공기와 수분으로 자양분을 얻어 쑥쑥 자라나는 저 나무들이 빛을 받으면 검게 타면서 불꽃이 일어 타버리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감이 없는 바로 이것이 환타지문학 자체가 아닌가 싶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된 등장인물의 이력부터가 특이하다. 자연과학자이면서 목사, 부목사, 의사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상식으로는 원래 과학과 종교적인 현상은 과학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면이 있어 종종 충돌하지 않았던가.


 ‘야반도주’, ‘과학계의 배신등의 단어가 등장하면서 어떤 피치 못할 갑작스런 사건이 생겼구나, 짐작하게 된다. 그렇게 페이스는 가족과 함께 베인 섬으로 예측하지 못한 이주를 하게 된다. 항상 두렵고 존경을 품고 있던 아버지 에라스무스, 어린 시절엔 숭배했지만, 조금씩 환상이 깨지고 있던 엄마 머틀, 여섯 살 배기 남동생 하워드, 마일스 외삼촌과 함께. 이제 열네 살인 페이스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녀다하지만, 세상에서 요구하는 착한 페이스’, ‘든든한 페이스’, 믿음직스럽고, 따분한 페이스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자연과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남자로부터 독기 어린 말을 아버지가 듣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가 저런 모욕을 당하다니. 갑작스런 이주를 하게 되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문으로 가득 찬 페이스는 골치가 지끈거린다. 호시탐탐 찾고 있던 증거를 아버지의 편지에서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아버지가 과학계에 발표한 뉴 펄튼 화석은 두 개의 화석을 교묘하게 붙인 것으로 풀 자국이 남아 있고, 의도적 개조, 최악의 경우에는 완벽한 가짜...당신의 명성을 의심하게 된다는... 갑자기 섬으로 떠나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단 한 번 바다 동굴을 찾아간 후, 나무에 걸쳐있는 아버지의 주검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르고는 교회묘지에 묻히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면서 이야기는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당시 교단은 자살은 죄로 인정했으며 아버지의 사인을 자살로 단정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페이스의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아버지의 일기장, 개인 서류를 탐독하면서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대한 놀라운 기록도 알게 된다. 덩굴식물처럼 생긴 나무로 감귤류 같은 열매가 맺힌다고 했으며, 어두운 곳이나 빛을 가린 곳에서 잘 자라며 거짓말을 먹일 때만 꽃이 피거나 열매가 맺힌다는...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속삭이고 나서 그 거짓말을 퍼뜨리면 된다고 했다. 그 거짓말의 중요성이 클수록, 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을수록, 큰 열매가 맺힌다고 했다. 그 열매를 먹는 사람은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 그 사람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을 알게 된다고 했다.’(P224)


 페이스가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도구로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추위와 위험에 굴하지 않고 혼자서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동굴까지 오가면서 나무를 키운다. 그 보답으로 열매를 얻어, 그 열매를 먹고 꿈과 환영 속에서 진실은 하나하나 짜 맞추어진다. 어쩌면 아버지는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 미리 거짓으로 연구하고 발표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갖게 된다. 동굴로, 발굴현장으로 동분서주 좌충우돌하다가 살인자의 진범을 찾기에 이른다. 하지만, 거짓말은 또 하나의 거짓말을 낳고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를 부르게 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지구의 일부이기도 한 우리 사회는 거짓말을 먹고 자라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작품의 내용도 명예, 출세, 돈이 걸려있는 삶이었다.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살기 위해서 벌여야 하는 사투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예쁜 드레스에 눈이 가고, 보석과 남자의 관심을 뿌리치지 못한 가진 것이 미모밖에 없는 엄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 사고였다는 판결을 받으려 하는 엄마를 페이스는 증오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엄마는 살아야하기 때문에, 자녀들과 돈 걱정 없이 살아야 했기 때문이라는 엄마의 육성을 듣고는 증오심이 주춤한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P434)


 빅토리아 시대만의 생존법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무시를 당하기 십상이다. 착하다는 말은 참으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것을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 하면서 내가 좀 더 수고를 해야 한다. 숨어있던 자연과학자 아가타 람벤트의 반전도 놀라운 충격이었다. 여성이어서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발굴 작업을 하고 발표결과는 남편의 명성이 되었다. 반면, 그녀는 남편에게 내조로 헌신함으로써 완벽한 부부인 것처럼 위선으로 살고 있었다. 예의범절이라는 틀에 여성들을 가두어놓고 평가하는 잣대로 보면, 페이스는 분명 이단아였다. 조신하고 착하게 좋은 신랑감을 기다리며 살아야하는 당시 풍습으로 보자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과 도전의 행동은 분명히 용감하고 멋졌다. 미스터리와 환상 그리고 과학, 페미니즘이 어우러져 생각할 거리를 선사해 준다. 뭉클한 감동으로 살짝 눈물로 흐려지기도 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당시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태도의 남편,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이 제한된 여성들, 종교법으로 묶인 제도와 풍습에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삶이란 정확한 잣대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너무 억압을 하면 언젠가는 봇물처럼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시대는 흘러 많이 나아졌지만, 성차별이나 권위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정의만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거짓말도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은 진행된다. 거짓말도 삶의 일부인 것처럼.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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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우 - 한비자와 진시황
양선희 지음 / 나남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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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으로 진시황은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을 구축한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황제, 한비자(韓非子)는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의 사상을 완성시킨 학자였다. 그 외에 더 깊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접한 적이 없어서 오히려 다른 선입견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상상력이 보태져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혼란한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무렵에서 천하통일을 하기 전 1년 정도의 기록이라고 되어 있다. 한비자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傳記)소설이 아닌 책략(策略)소설이다. 그러므로 《전국책》과 같은 책략서나 《손자병법》,《울료자》등의 병법서,《노자》와《순자》등의 생각을 많이 빌려 왔다고 한다.

 

 한비의 고분(孤憤) ·오두(五蠹)의 논설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한 영정의 간절한 마음이 닿아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기댈 곳이 없어서 늘 고독했던 영정의 마음속에 한비의 존재는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절벽’

 인생이 무엇이냐는 영정의 물음에, 한비의 대답이다. 영정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낯선 말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곱씹을수록 눈물이 흐른다. 여불위의 단단한 팔에 안겨 있다가 조희에게 떠넘겨진 불안한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다.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평생의 상처로 다가왔을까. ‘내 인생도 늘 절벽이었다. 한비처럼... .’ 또한 이후 한비의 운명을 예견하듯 마음이 싸늘하게 내려앉는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어 욕망을 멀리하여 마음을 수양하고자 노자(老子)에 심취하였던 한비. 날로 어지러워지는 세상에 대한 근심이 커지면서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타고난 말더듬이 장애와 그의 세상을 읽어내는 그의 혜안도 장애라면 장애였다. 형 세자의 안위를 위해 초나라 볼모로 보냈는데, 오히려 그의 영특함이 세상에 알려졌고 급기야는 영정의 스승이 되어버렸다. 당시 최고의 음양가(陰陽家) 옥화의 예언대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고국 한나라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직을 돌보지 않고 경솔하게 자만심만 내세우는 왕, 국내의 우수한 인물은 임용하지 않고 사람이 없다고 타박만 하는 왕이 어떻게 강국 진나라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정(外政)이 아니라 내정(內政)에 있다는 말은 자연스런 진리다. 국가원수와 조정 관리의 불신, 국민이 정부를 믿지 않고, 국민들끼리의 단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분열되고 와해되기 마련이다. 타국에서는 그것을 반기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 문제가 자연스럽게 겹친다.


 영정이 천년왕국의 야망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에,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이사와 조나라를 먼저 쳐야 한다는 한비와의 대결구도가 분분하다. 한비의 상소에 감탄하는 영정, 조나라 정벌이 유력시되자 이사는 격분한다. 순자(荀子)의 제자로 동문수학했던 벗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는 원수일 뿐이다.


 대대로 조나라 한단 최고의 갑부인 여불위는 ‘주군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이익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초에게 투자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애첩인 조희와 짝을 지어주는 통 큰 마음속에는 검은 야망이 끓고 있었다. 정경유착의 고리는 고금(古今)의 전통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무소불위의 권력과 셀 수 없는 재산을 남기고 자결을 하다니. 그 정도의 재산이라면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겠다. 영정의 아비였던 것일까, 추측하게 된다. 아들의 나라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려는 아비의 마음이었던 것일까.


 책략소설답게 계략 대 계략으로 치열한 머리싸움이 진행된다. 조나라로 진군한 전쟁은 승전보를 울리며 함양성은 승리에 도취되어 어디든 잔치가 벌어진다. 강한 왕과 규율이 잡힌 조정, 가장 이상적인 조정의 모습을 적국에서 바라봐야 하는 한비의 마음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흠모했던 상앙의 변법으로 한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피를 토하듯 왕에게 직언을 하며 간언을 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망국의 길로 매진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심경은 얼마나 무너지고 있었을까. 도(道)와 세상을 논하며 문재(文才)를 닦았는데, 그것을 적국의 왕의 권력을 위해 써야 하다니. 이제는 구걸이라도 해서 백성의 목숨만은 지키려고 하는 한비의 처지가 안타깝다.


 고국을 포기했나 싶으면서도 한비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어떻게든 구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아직 벼슬 없이 명색이 ‘사부’라는 위치에 있지만, 의심의 긴장감을 느끼며 아슬아슬하게 지내고 있는 느낌이다. 영정과 한비는 서로 깊이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벗이 되었지만, 서로의 갈 길은 다르다. 벗이지만, 적(敵)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이러니. 사려 깊은 한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가만히 있어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걸 선택할 수는 없다.’(p266).


 전설적인 조나라의 이목 장군의 전술로 인해 진나라의 2차 원정은 완패. 한편 요가는 이사를 찾아가 함께 살 길을 모색한다. 한비를 향한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영정에게 계책을 설토한다. 얼마나 절실한 웅변인지 등을 돌렸던 영정은 다시 요가의 관직을 회복해 놓는다. 한비의 목숨은 이들이 쥐고 있다. 그토록 한비를 총애하던 영정도 이로움의 저울질 앞에서는 헌신짝같이 버린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그래왔다. 벗이라는 이름으로 충실하게 부려먹고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적국의 책사(策士)노릇을 하다가 억울한 죽음에 당면한 한비의 말은 마음이 무겁다.


‘내가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어. 진나라가 부강해지는 100년 동안 군주가 넋 놓고 앉아 애쓰지 않은 나라를 어찌 하늘이 벌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모두 나의 죄다. 혁신해야만 살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고 죽간만 희롱한 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죄... 내가 죽어 마땅한 죄는 땅과 하늘을 덮고도 남으리라.’


 역사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말은 오래된 진리다. 신하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위해서 일하지, 국가와 군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군주의 총애를 팔아서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는 일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끝이 없는 욕망은 언젠가는 그 욕망으로 인해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인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역사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욕망과 심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단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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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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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엉겁결에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서 계획적으로 결혼에 성공한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반면, 그런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몇 년 전 어떤 책을 읽었는데, 이런 결혼이 있었다. 그 책의 저자인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남자의 상을 버킷리스트처럼 작성을 했다. 그 사람의 성격은 물론이고, 취미, 삶의 철학, 가치관, 술과 담배는 하지 않을 것 등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였다가, 그 기준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교제를 하다가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었다. 와! 이런 결혼관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 흔한 조건을 따지는, 이를테면 무조건 재산은 많아야 하고 학력을 따지는 등의 결혼은 아니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러한 노력도 필요하겠구나 하고 새삼 느꼈었다. 이런 경우라면 얼결에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어쩔 수 없이 결혼이라는 틀에 묶이는 경우보다는 삶의 질이 훨씬 낫지 않을까.


 결혼이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도 세간에 떠도는 진리 같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진리이기만 할까. 이 작품은 여대생 매들린이 19세기 문학으로 ‘결혼 플롯’을 연구하며 연애를 배우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몹시 심취해 있다. 글쎄 상상과 현실은 다른데, 공부하는 공식처럼 연애와 결혼을 대입할 수 있을까.


 기호학 강의에서 만난 레드너, 미첼, 주인공인 매들린의 대학생활과 삼각구도의 연애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틀은 좀 약하다. 211번 기호학 강의실의 분위기는 제법 열기가 느껴진다. 페터 한트케의 『희망 없는 슬픔』(한국어판은 『소망 없는 불행』이라고 함.) 등 여러 명작과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며 토론이 진행된다. 마치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초반의 분위기는 뭐랄까, 학생들이 수업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마음같이 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잘 안 읽힌다.


 이제는 더 이상『오만과 편견』『제인 에어』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고 순수한 사랑으로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는 좀 낯선 이야기가 되었다. 그만큼 남녀의 사회적인 이분법적인 역할도 무너진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변화, 급변화된 시대상의 반영으로 이른바 결혼, 취업, 연애 등을 포기하는 삼포, 오포세대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의 80년대 캠퍼스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의 현실 풍속도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결혼은 필수라는 시절이 있었다. 과년한 딸이 있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중매쟁이들을 내세워 결혼이라는 인륜지사에 사활을 걸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이다. 지금의 현실은 과연 결혼을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깊어지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는 생각에 표심이 늘고 있는 실정이다.


 미첼은 매들린을 좋아하지만, 매들린은 레너드를 좋아한다. 미첼은 몰래 매들린과의 결혼을 꿈꿀 정도로 좋아했지만, 그의 연애에 대한 적극성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결국 교수의 권유로 종교학에 관심을 보인다. 래리와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인도에는 혼자 들어간다. 콜카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많은 노력을 하지만(매들린을 잊어보려는 노력까지도 포함하여) 결국은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서 본 많은 부조리,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숭고한 삶 속에 제대로 동화되지는 못한다. 레너드와 결혼하지 말라는 편지 답장을 쓴다. 마음속에 아직 매들린이 남아있다는 증거다.


 매들린은 원래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또 부모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는 교제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불안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레너드에게 점점 빠져든다. 알코올 중독자였고, 이혼한 부모를 둔 가난한 이공대생 레너드에게. 소문난 바람둥인데도, 여자들은 그와 잠자리를 못해서 안달이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판단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반대를 하면 할수록 둘은 더욱 결속하게 된다. 평생의 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미 연정으로 가득한 마음은 그가 리튬을 복용하는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매들린의 언니의 말대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게 되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병을 자각하고, 약 복용의 양을 조절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거기서 떨치고 나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약을 복용함으로 나타나는 무서운 폐해도 알 수 있었다. 의사들에게 환자는 어쩌면 임상실험용이었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면서 매들린을 불안에 떨게 한다. 청혼을 하고 결혼을 했다가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혼하자는 뜻을 내비쳐도, 그렇게 된 상황에 후회도 하지만, 매들린은 그러지 못한다. 아마도 그런 상황이라면 거의 그러지 않을까. 이미 사랑하고 있는데, 차마 그러지 못함은 인간의 기본 심리에 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결국 미첼이 종교학에 관심을 두고 자원봉사를 경험했던 것도 매들린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정신적인 병증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묘수’로 매들린에게 청혼을 레너드, 앞날을 계획하며 실천하기보다는 사랑에 탐닉하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매들린은 모두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연애와 결혼은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인류의 불완전한 영원한 숙제가 아닐까. 책임을 감수하든 못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삶의 과정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협조정신과 배려 없이는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 해로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가족과 많은 지인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지만, 도중에 헤어지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마지못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 예전에 다소 파격적인 제목의『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소설이 있었다. 아마도 결혼생활의 이런저런 부조리를 대변해주는 스토리는 아니었을까. 인생은 연습이 없다. 결혼도 물론 연습할 수 없다.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것이 맞거나, 혼자 살아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반드시 불협화음이 생긴다. 환경이나 성장 배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의견의 합치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연예인 중 누가 이혼을 하면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졌다는 말이 자주 나왔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에이, 그건 아니겠지, 하며 색안경을 끼고 딴죽을 걸곤 했다. 하지만, 그 ‘성격’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마음이 착한 것 외에도,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능력, 좋은 삶으로 마무리 하려는 능력 등. 물론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이나 교육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사생활이나 학교생활만 교육과 계획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결혼생활은 더욱 더 소중한 삶이므로, 둘이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더. 그게 아니라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스스로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삶을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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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작삼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이소영 옮김 / 봄고양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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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까지도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생후 7개월째에 생모의 정신병 발작으로 외가에 입양되었으며, 35세에 치사량의 수면제로 생을 마감하였다. 전에 그의 단편선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덤불 속>외에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 많아서 반가웠다. 그의 친우이자 <문예춘추사> 설립자인 기쿠치 칸은 그를 기념하여 1935년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하였고, 오늘날까지 일본 최고 권위의 순수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1.덤불 속

도둑 다조마루는 거울이나 날붙이를 오래된 무덤에서 파내어 덤불 속에 묻어 두었는데, 그것을 팔아넘길 거라며 말을 탄 부부를 유인한다. 욕심에 혹하여 남자가 도둑을 따라 들어갔다가 화를 당하는 이야기. 목격자들을 상대로 진술을 듣고, 죽은 원혼을 비롯한 용의자 즉 도둑과 아내의 자백과 참회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각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욕심으로 인해 위기에 빠지고, 그 과정에서는 오해가 빚어진 상황에 맞닥뜨린다. 수수께끼같은 이 상황, ‘덤불 속’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3. 희작삼매

목욕탕 풍경으로 시작한다. 지금이야 많이 희석됐지만, 전통적인 목욕탕의 풍경이란. 이웃들이 만나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평등한 몸이 된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하다. 시키테이 산바의 <곳케이본>에 ‘하늘과 땅의 신, 석가의 가르침, 사랑, 무상, 이 모두가 뒤섞인 대중목욕탕’이라고.

여기서 주인공 바킨은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악평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조금 더 수준 높은 상대’가 아니라, 사팔뜨기로부터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호평에 들뜨지 말고, 악평 또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신을 향한 관대함이 작가노릇을 하기에 수월하겠다.


희작(戱作)은 일본어로 게사쿠, 에도 시대 후기의 통속 오락 소설을 지칭한다. 작가들의 고뇌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자주 나온다.


“어떻게든 전진하지 않으면 금세 밀려 넘어집니다. 그러니 일단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기 위한 고민이 중요하겠습니다.”(P74)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든 일반 직장인이든 치고 올라오는 후배와 선배의 등살에 끼어 마음고생 하기는 매 한가지다. 다른 분야보다 힘든 것은 관리의 도서검열을 예로 든다. 관청 직원이 뇌물을 받는 대목이 있으면 고쳐 쓰라는 명령을 받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옛날에 비하면 좀 낫겠지만, 옛 시대의 문인들은 참으로 고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후 50년, 100년이 지나면 관리들은 사라지고 어르신의 <핫켄덴>만 남을 것입니다.”(P76) 그렇다. 바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진리. 인생의 무상함, 희노애락을 글로 담아내야 하는 작가들의 삶과 작품의 창작 과정에서의 고충, 그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엿볼 수 있는 이야기. 문득 찾아오는 기쁨어린 웃음도.


“힘닿는 데까지 계속 써라. 지금 내가 쓰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P85)


4. 개화의 살인

주인공인 의사 기타바타케 기이치로는 첫사랑의 아키코를 잊지 못해 그녀의 남편을 독살하고도, 다시 그녀의 남편이 된 그의 친구 혼다 자작을 향한 분노와 살인의 의지를 깨닫고 자신이 자살하게 되는 이야기.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회한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절규가 절절하다.


6. 게사와 모리토

와타루에게 시집간 게사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모리토, 그 둘의 독백으로 인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게사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노래까지 배우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한 와타루에게 귀여움을 느끼면서, 또 게사를 향한 마음은 순수한 사랑의 열정이 아닌 정복하려는 욕망이었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와타루를 죽이자고 합의를 하는데... 게사와 모리토의 내면의 심리를 통해서 남녀의 그릇된 사랑의 이해와 밑바닥에 깔린 비도덕적인 이기심을 잘 보여준다.


<보은기>는 일본의 대도(大盜) 아마카와 진나이가 교토의 유명한 부자인 호조야 야사우에몬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훗날 부도 위기에 빠진 야사우에몬의 은혜를 갚는다. 물론 돈을 훔쳐서. 야사우에몬의 노름꾼 아들 야사부로는 아마카와 진나이 대신 죽음으로써 가문의 은혜를 갚는 이야기.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대도 진나이가 화자가 되어 담담하고 유쾌하게 들려준다.


<한줌의 흙>은 8년간 투병하던 남편이 죽었는데, 시어머니 오스미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가하지 않은 채 남자 몫까지 일만 죽어라고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다. 오직 어린 아들에서 전답을 물려받기만을 바라며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부를 일구어 놓았지만, 행복한 삶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오타미.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위에 언급한 작품을 포함하여 11편의 아쿠타가와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도둑, 작가, 평범한 시어머니, 젊은이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사람들이다. 문체에서는 약간의 능청스러운 유머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열정적으로 살다간 그의 작품세계와 삶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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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존재의 조건을 찢는 자들
신창용 지음 / 스틱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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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급박한 상황의 이야기인가, 예상했었다. 탈출까지는 아니어도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일탈을 꿈꾼다. 지금의 상황에서 탈바꿈하거나 시원하게 벗어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자신의 상황이 무거운 상태라면 더더욱.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려는 M이 비상사태 발생으로 제대가 연기되었다고 소리치는 중사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는 아마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경의 반영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파스란>국에서 <로만공화국>으로 건너왔을 뿐인데, 통행증도 없이 불법으로 국경을 침범했으니, 즉결심판을 받아야 한단다. 이 상황을 어디서 본 듯하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된다.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체포된 요제프 K. 그로부터 1년 동안 밑도 끝도 없는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당신은 체포되었소.”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뭐죠?” K가 물었다. “우리는 그런 걸 말해줄 입장이 아니오. 방으로 돌아가 기다리시오. 이제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으니, 때가 되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하긴, 뭣 때문에 왔든 그런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일단 여기에 하룻밤 구금된 후 내일 경찰에 압송되어 판사한테 즉결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나 알고 있으란 말이오!”(P10)


 위의 두 문장의 내용의 핵심이 닮지 않았는가? 기묘하게 닮았다. 확실한 증거나 타당한 이유도 없이 당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운이 사납게 되었다!’ 그렇다면 분명 담당하는 관리국이 있을 터인데, 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산림감시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 말이다. M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해 하지만, 산림감시소 직원 앤은 오래된 관행으로 자신들이 통행증 확인이나 불법입국자를 검거한다고 했다. 특별입법조사위원 위촉의 문제로 왔다는 말을 듣고 앤은 놀란다. 고급관리, 돈에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호들갑을 떤다. 소문을 듣고 일자리를 찾는 것도, 비상식이며 엉성하다. 더구나 자국에서 분리 독립해서 나간 초라한 로만공화국으로 들어왔다니.


 긴 대화를 나누지만, 도통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각자 목소리는 높이지만, 서로 공감할 수 없는 허공에 떠도는 말이다. 이상한 분위기에 휘말려 3급 관리가 되어버린 M을 사랑한다느니, 몸종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넬리의 말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너도나도 안정적인 공무원을 선호하는 현실. 출세와 숫자의 만족을 위한 삶으로 치닫는 현실이 보인다.


 파스란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살았던 M은 왜 타국 로만공화국으로 넘어왔을까? 유학에, 로스쿨을 나오고 법학박사 학위까지 가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으로서, 새 탈출지 로만이라는 외국에서 신분상승을 꾀하여 전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위한 상상의 나래를 펴느라 분주하다.


 앤, 넬리, 파비안 이 여성들은 관리라면 껌벅 죽는다. 빌붙어서 팔자를 고치려는 여자들 같다. 하나같이 관리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몹시 낮추며,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태연스레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어떻게든 ‘급’을 높여서 돈을 쟁취하려는 삶의 피로감이 보인다. 열심히 노력해서 한 계단씩 나아가려는 삶의 애착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그 어두운 삶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그들 나름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여자들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또 뭔가. 저속하기 짝이 없다. 장난감 다루듯 하며, 그것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스스로를 귀히 여기지 않는 태도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은 너무 각박하다. ‘갑’이 되고 싶은 수많은 ‘을’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꾸고 싶지만,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기에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무릇 국가나 관리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야 마땅하나, 제각각 권력의 아귀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민생은 뒷전이 되고. 그들도 살아야 하니까 온갖 비리와 부조리는 반복된다.

 

 새로운 삶을 원했던 M의 야망이었던, 출세도 행복의 길도 열리지 않은 채 지리멸렬한 시간이 흐른다. 좀 더 나은 세계로의 탈출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삶의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여성들은 남자에게, 급이 높은 관리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신분을 높이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려는 노력을 했다면 어땠을까. 구덩이에서 벗어나려는 집착이 강할수록 그 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근본적인, 좀 더 문제 상황의 근본적인 것을 끌어내어 해결해야 한다.


 무수한 오자와 어법에 맞지 않는 엉성한 문장, 그리고 너무 긴 대화체는 읽어내기 힘들었다. 사회 곳곳의 의혹투성이를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을 문장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까. 게다가 화자의 불확실한 상황의 불안감이나 심경을 반영하려는 설정이라 해도 좀 심하다. 죽음으로써만 ‘탈출’을 이루게 된 일은 심히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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