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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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genocide)

어느 특정한 종족이나 종교적 집단을 완전히 없앨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신체적·정신적 박해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는 나치스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들 수 있다.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 제3차 총회에서「집단 살해 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이 채택되었다(네이버 지식사전 발췌)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동물이 “인간(人間)” 뿐이라는 것은 오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생물학적인 본능이 아니라 특정 민족이나 인종을 멸종에까지 이르게 하는 이른바 “인종 학살”을 저지르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이런 인종 학살 또는 인종 청소 사례는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위에서도 언급한 600 여 만 명의 유태인의 목숨을 앗아간 나치스의 유태인 학살과 사회 개조라는 명분으로 200 여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Khmer Rouge) 정권의 대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이유가 멀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좌우(左右)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 “다름(차이)”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과 정치, 종교,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틀리다”로 받아들여서 그들을 차별과 학대, 심지어 학살의 대상으로까지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긴 하지만 영화 <엑스맨>처럼 초능력을 가진 돌연변이이거나 또는 현 인류(Homo sapiens sapiens)의 지적 능력을 월등히 초월한 신인류(新人類)라면, 또한 그들이 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면 어떨까? 이들에 대한 반응은 그들도 인류이니 같이 공존(共存)해야 되는 입장과 우리에게 위험한 존재이니 특별 관리하거나 또는 멸종(genocide)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전작인 <13계단>에서 추리소설 본연의 긴장감과 재미와 함께 법과 사형제도라는 묵직한 생각꺼리를 던져 준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高野和明)”는 이번 신작 <제노사이드(원제 Genocide(ジェノサイド) / 황금가지 / 2012년 6월)에서 우리들에게 이처럼 현 인류를 초월한 신인류는 과연 우리들과 “다른”, 즉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共存)인지 아니면 “틀린”, 즉 멸종시켜야 할 존재인지 라는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한다.

 

미국 대통령 “번즈”는 지난 24시간 동안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이 모은 중요 정보의 요약본인 아침 일일 브리핑(PDB)에서 “인류 멸망의 가능성, 아프리카에 신종 생물 출현”이라는 NSA(National Security Agency, 미 국가안보국) 보고서를 읽는다. 그 보고서에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이 출현했는데, 이 생물이 번식하게 될 경우,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전 인류 멸망이라는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보고서와 함께 신인류의 등장과 위험성을 경고한 “하이즈먼 리포트”를 읽은 번즈는 민간 연구소인 “슈나이더 연구소”의 대처 계획 입안을 승인하고 민간 용병을 고용해 내전중인 콩고로 파견해 피그미 족과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인류학자, 그리고 새로운 생물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일본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연구실로 복귀하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 의문의 이메일 한 통을 받고 메일에서 안내하는 아버지의 비밀 실험실을 찾아간다. 실험실에서 아버지가 남긴 노트북에서 제약 개발 프로그램을 발견하게 된다. 1개월 안에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라는 아버지의 유지이지만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는 겐토에게 의문의 여인이 노트북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심지어 경찰들까지 들이닥쳐 하루아침에 수배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가까스로 숙소에서 도망친 고가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한국인 친구 “정훈”과 함께 프로그램을 이용해 치료제를 개발하게 된다. 한편 피그미 족 말살 작전에 참여한 용병인 “조너선 예거”는 암살 대상인 인류학자에게서 이 작전의 음모를 전해 듣고는 작전을 포기하고, 인류학자와 앞서 일일 브리핑에서 “신종 생물”로 표현했던 어린 아이를 일본으로 탈출시키기로 한다. 바로 불치병으로 시한이 한 달 여도 채 남지 않은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제공받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처럼 콩고에서의 피그미족 말살 작전과 일본에서의 겐토의 치료제 개발 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접점을 이루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아프리카 오지(奧地)에서 탄생한 신인류 “누스”를 제거하려는 미국 정부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사람들의 대결을 그린 소설인데 장르로는 SF와 스릴러가 복합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누스를 구해내려는 소수의 사람들 - 용병 몇 명과 인류학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학원생과 그의 동료,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밝혀지는 놀라운 조력자 - 이 인공위성과 첨단무기, 첩보 조직들과 용병, 반군 세력 등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하여 신인류를 말살하려는 미국정부와의 대결 과정이 꽤나 긴장감 있고 스릴 있게 그려내고 있어 700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지루함을 느낄 겨를 없이 단숨에 읽히게 만든다. 현실에서라면 양(羊)과 사자의 대결 - - 물론 종종 영미 첩보 스릴러 소설에서 이런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 처럼 무척 싱겁게 끝났을 이런 상황을 작가는 SF적인 “비현실적”인 설정과 현재 시스템에 대한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를 절묘하게 혼합하여 실현 가능할 법한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먼저 불가능한 싸움을 가능케 하는 능력으로 신인류 “누스”에게 현생 인류를 뛰어 넘는 초월적인 지식과 능력을 부여하는데, 생김새만으로도 현 인류와 다른 “신종 생물”로 느껴지는, 불과 3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인 “신인류”의 능력은 가히 “먼치킨” - 판타지 소설과 만화, 게임 등에서 터무니없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일컫는 말 - 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울 지경이다. 비록 아직 발음기관이 발달하지 못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언어는 순식간에 습득하고, 절대 침입 불가로 알려진 미국 정보기관 전산망과 암호체계, 인공위성을 자유자재로 해킹하고,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제약 개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어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도록 유도 - 물론 목적은 용병 “조너선 예거”가 자신을 구해내도록 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하기도 하고, 무인정찰기 “프레데터”를 조정해 미국 부통령을 암살하기도 하며, 미국 전기 시스템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능력으로 신인류와 그들 보호하려는 소수의 인물들은 미국의 집요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물리치고 아프리카에서 일본까지의 대장정(大長征)을 성공리에 완수해낸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분히 공상과학(SF)적인 설정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인류가 처하게 될 종말적인 상황 - 핵전쟁, 천재지변, 그리고 이 책에서의 신인류의 탄생 등 - 을 과학적으로 예견해 놓은 “하이즈먼 보고서”나 주인공인 겐토가 신인류가 만들어 놓은 “기프트(Gift)"라는 제약 개발 프로그램을 이용해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전문 용어와 이론, 신약 테스트 과정 등은 분명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 임이 분명할 텐데도 실제로 그런 보고서나 제약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고 상세하고 그려내고 있다. 또한 미국 정보기관의 작전 운영 체계, 미군을 대신하여 분쟁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민간 용병들의 실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고도의 감시 시스템 등에 대한 묘사도 꽤나 현실적이고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처럼 사실적인 설정과 묘사는 허무맹랑한 SF로만 빠질 수 있는 이 소설에 현실성과 개연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SF와 사실성의 적절한 조화, 숨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의 연속, 결말에서의 놀라운 반전 등 스릴러 소설 특유의 장르적 재미와 함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주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인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인종 학살, 즉 제노사이드 사례들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여기에 일본인이라면 지극히 불편해할, 일종의 금기라 할 수 있는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이나 남경 대학살 사건도 가감 없이 들려준다. 그러면서 우리와 “다른” 존재인 신인류는 과연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죽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숱한 인종 학살과는 무엇이 다른 지, 어쩌면 인류의 진화는 인류 스스로가 가로막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온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숱하게 벌어졌던 인종 학살들에도 그럴싸한 명분 하나쯤은 다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치스의 유태인 학살에도 그 이유가 분분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유대인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과 함께 세계 지배를 획책하는 악의 세력이라는 과대망상적인 음모론이 그 발단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당시 나치스의 주장에 경도되었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종교적인 “복음(福音)”이나 “계시(啓示)”, 즉 자신을 신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나치스의 대학살은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의 신인류에 대한 미국의 말살 계획은 과연 그릇된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능력들과 현생 인류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신인류는 어쩌면 미국의 국가 안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멸망까지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존재라는 미국 정보부의 판단은 “옳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즉 이런 존재라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므로 미국과 인류의 영속적인 생존을 위해 “제거(제노사이드)” 되어야 한다는 명분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명분은 그 대상 - 신인류 - 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납득 가능한 그런 명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책에서 누스를 보호하려는 사람들과 그를 말살하려는 미국이라는 선악의 대결 구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지만 하이즈먼 보고서에서 경고하는 신인류의 위험성과 함께 대장정이 마무리되고 잠적하는 누스 일행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일말의 우려를 드러내는 장면을 보면 작가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어느 정도 유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만의 오해일 수 도 있지만 말이다^^

 

역시나 글이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지고 말았지만 결론은 이 책, “참 재미있다”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정도라면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데뷔작인 <13계단>에서 보여줬던 성취를 충분히 뛰어 넘는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어볼 분들에게 이 지루하고 길기만 한 이 글 때문에 지레 포기하지 마시고 스릴과 재미, 그리고 묵직한 주제 의식 등 모든 면에서 올 여름 가장 “핫(hot)"한 재미를 선사할 장르 소설이 될 이 책,  꼭 읽어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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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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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고 정교한 플롯과 트릭,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을 특징으로 하는 추리소설(推理小說)에는 법칙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대표적인 법칙이 미국 추리소설 작가 “S.S.반다인(S.S. Van Dine)”의 “추리소설 법칙 20”과 영국 대주교 겸 추리 작가인 “로널드 녹스(Ronald Arbuthnott Knox)”의 “추리소설작법 10계”가 있다고 하는데,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일종의 “두뇌 게임”이라는 추리소설의 본령상 게임을 제시하는 작가가 독자에게 범인을 추리할 수 있는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고 독자는 그 단서들을 토대로 범인을 추리해낸다는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법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법칙을 세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항목들이 많은데, 표현과 문구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법칙 중의 하나가 살인 방법과 이에 대한 수사 방법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추리소설에서 비과학적인 초능력(超能力)이나 마법(魔法), 과학과 관계없는 미지의 독약(毒藥) - 이 미지의 독약에 대한 규칙은 “영국 탐정소설 작가 클럽”의 신입회원 서약으로 유명하다 - 등은 금기(禁忌)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몇 몇 추리 소설에서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살인 방법과 수사 기법은 마법과는 관계없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추리소설 법칙을 위반하지는 않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마법이라고 해서 꼭 배제될 것이 아니라 여기에 추리소설의 원칙, 즉 분명하고 명확한 원인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라는 “공정성”의 원칙을 부여한다면 추리소설의 소재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시도를 멋지게 성공해낸 작품을 이번에 만났다. 바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판타지 미스터리 소설 <부러진 용골(원제 折れた龍骨 / 북홀릭 / 2012년 5월)>이 그 작품이다.

 

브리튼 섬 동쪽, 런던에서 출항해 북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사흘 밤낮을 가면 도착하는 크고 작은 섬 두 개로 이뤄진 “솔론”제도의 영주 “로렌트 에일윈”은 “저주받은 데인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용병들을 모집하던 차에 “병원형제단”의 기사 “팔크 피츠존”과 그의 종사 “니콜라 바고”의 방문을 받는다. 기사 팔크는 암살기사 “에드릭”이 영주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영주는 그 다음날 자신의 작전실에서 그만 싸늘히 식은 시체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전날 영주가 작전실에서 밤을 새울 것이라는 말을 들은 용병들과 방문객, 그리고 집사로 압축되고, 영주의 딸이자 이 책의 화자(話者)이기도 한 “아미나 에일윈”은 팔크 일행과 함께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전날의 알리바이를 탐문 수사하게 된다. 영주의 장례식과 아미나 일행의 탐문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영주가 두려워했던 데인인 군대가 솔론 섬을 습격하고, 용병들과 팔크 일행, 그리고 솔론 제도 주민들은 유혈이 낭자하는 처절한 싸움 끝에 가까스로 그들의 습격을 막아낸다. 전쟁이 끝나고 영주의 성(城)에서 승전 기념파티가 열리는데, 기사 팔크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수사해온 결과와 범인의 정체를 밝힌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잉글랜드의 사자왕(獅子王) 리처드 1세(Ricard Ⅰ;1157~1199)가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12세기 말(1190년) 영국령(領)의 가상의 섬인 솔론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우리의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저주와 현혹 마법, 인형술(人形術) - 책에서는 그리스 청동거인 “탈로스(Talos)”을 조종한다 -, 불사(不死) 등 마법들이 실재(實在)하는 판타지 세계이다. 이 책에서 추리 대상이 되는 사건은 영주인 “로렌트 에일윈” 살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범인은 마법에 의해 조종되는 “미니온”이라는 존재이다. 마법에 의한 살인이라니 앞서 말한 추리소설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셈이지만 작가는 여기서 사전 전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미니온이란 마법사가 대상자의 피를 채취해 마법을 걸면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인데, 단순히 꼭두각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살인 지령을 완수해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증거를 감추는 등의 행위를 하고, 살인이 일어난 이후에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완벽하게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이다. 즉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영주가 작전실에 있을 것이라는 말을 직접 들었거나 알았던 용의자들 중에 범인이 있는데, 정작 범인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가정 속에서 탐정은 용의자들의 알리바이와 행위를 수사하면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사람부터 용의선상에서 지워나가는, 추리소설에서 가장 흔한 방법인 “소거법(消去法)”을 통해서 범인을 압축해나가는 방식이 가장 자연스러운 수사방법일 것이다. 이 책에서 탐정인 “팔크 피츠존”은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행적을 조사하고는 데인인들과의 전쟁이 끝나고 승전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에서 각 용의자별로 범인이 아닌 이유를 상세하게 밝힌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전혀 의외의 범인을 지목한다. 이외에도 완벽한 밀실에서의 탈출이나 밤만 되면 고립되어 버리는 섬의 비밀 등 추리 소설적 요소가 다분한데, 여기에도 작가는 공정성의 시비를 비껴가기 위해 사전에 전제를 달아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전혀 이질적인 장르인 추리와 판타지를 제대로 융합해 낸 소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저주받은 불사지체인 데인인의 존재나 각종 마법들의 현현(顯現) 등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잘 가미했고, 추리적인 면에서도 전통적인 소거법과 밀실 트릭 등 추리소설 본연의 묘미를 잘 살린, 어느 정도는 장르 융합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다면 추리소설의 “공정성” 면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분명 비과학적인 요소인 마법이 살인 방법으로 등장되지만 허무맹랑하지 않고 개연성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사전에 전제를 설정해 공정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니 이 시도도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불공정한 것은 바로 “범인의 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결말은 밝힐 수 없지만 범인의 정체야 말로 공정성의 원칙을 완전히 위배하는 불공정한 결말일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런 “불공정한” 결말 때문에 평가절하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불공정한 결말 때문에 마지막 반전의 충격은 더 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 판타지라니 두 장르 모두 좋아하는 나에게는 즐거움이 배(倍)가 되는 그런 소설이었지만, 추리소설의 공정성과 법칙을 엄격하게 따지는 팬들에게는 논란이 될 수 도 있는 그런 소설이라고 하겠다. 일본 추리소설의 장르적 다양함과 실험정신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이질적인 두 장르의 융합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해내다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 일본 각종 추리소설 상들을 휩쓸 정도로 유명한, 즉 성공한 작품이라고 하니, 이 책의 제목이자 암호(暗號)이기도 한 “부러진 용골”이 전 유럽에 울려 퍼지는 후속편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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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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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국 추리소설도 오랜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일까? 일본, 영미, 북유럽 등 외국 추리소설들이 장악 - 2012년 기준 국가별 추리소설 매출 점유율에서 일본(20.8%), 영미(25.4%), 독일·프랑스·북유럽(50.6%)로 외국 추리소설들이 전체 96.8%를 차지한다고 한다(중앙일보. 2012.06.19.“나라별로 즐기는 추리소설” 참조) - 한 추리 소설계에 “우리” 추리 소설들이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지만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한다. 특히 신인 작가들이 그러한데 “서미애(<반가운 살인자>)”, “손선영(<죽어야 사는 남자>)”, “유현상(<살인자의 편지>)”, “허수정(<망령들의 귀환)>”, “김유정(<7년의 밤>)” 등의 작품들과 신구(新舊)세대 추리작가들의 단편 모음집 <목련이 피었다> - 이 외에도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있을 텐데 읽어본 작품들만 골라봤다 - 등은 외국 추리소설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성과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작가들과 함께 독특한 캐릭터와 정교한 트릭과 반전을 구사하는 작품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 바로 현직 판사라는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가 바로 그이다.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붉은 집 살인 사건>은 2년 전 쯤에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주인공인 “고진” 변호사는 범죄를 사법(司法)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응징하는 일종의 "다크 히어로(Dark Hero)" - 현직 판사가 사법 제도에 의존하지 않는 변호사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니 의외성의 재미를 준다 - 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어 아직까지 우리 추리소설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로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반해, 사건 추리가 너무 서술적 설명 위주이고 부자연스럽고 납득하기 힘든 트릭들은 조금 아쉬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는 그의 후속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2년 여 만에 그의 신작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김진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인 단편집 <순서의 문제(시공사/2012년 5월)>이 그 책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에는 표제작(表題作)인 “순서의 문제” 포함하여 7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탐정인 “김진구”라는 캐릭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친구 변호사의 신분으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 사적 응징을 하는 전작의 “고진” 못지않게 불법적인 일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그런 캐릭터로 설정하고 있다. 고교 시절 부모님을 사고로 여의고 천애 고아 신세가 된 진구는 법대 중퇴 학력으로 변변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시원을 전전하여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릴없는 백수 신세이다. 그런데 이 친구, 기자, 형사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신분 사칭을 스스럼없이 하고, 젊은 시절 배워놓은 열쇠 따기 기술을 이용해 빈 집이나 자동차 문을 척척 따기도 한다. 심지어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트릭을 낱낱이 밝혀내어 범인을 협박하여 고액의 돈을 뜯어내고(“순서의 문제”), 여자 친구의 목격담 만으로 앉은 자리에서 살인사건의 전말을 추리해내는 천재적인 솜씨를 펼쳐 보이지만 결국 보상금을 타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며(“대모산은 너무 멀다”), 자살을 해서 생명보험금을 타지 못하는 여자 친구의 친척을 위해 사인(死因)을 살인(殺人)으로 바꾸는 사기극을 꾸미기도 한다(“티켓 다방의 죽음”). 물론 이렇게 자신의 잇속만을 위해 추리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살인사건을 위장하기 위한 알리바이 증언자로 끌어 들인 부부의 트릭을 법정에서 멋지게 깨뜨리고(“뮤즈의 계시”), 납치된 소녀의 엉뚱한 증언이 소녀의 “공감각(共感覺; 자극을 받은 감각이 다른 감각에 적용되어 반응하는, 색에 기반한 감각의 공유 현상)”이라는 특이한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며,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축 건물 환풍기에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한편 범죄사건은 아니지만 여자 친구와 페루로 여행가기로 해놓고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쳐 버리자 진구는 발상을 전환(易發想)하여 오히려 여자 친구보다 먼저 페루 공항에 도착해 여자 친구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막간; 마추피추의 꿈>). 다만 전작인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의 고진 변호사와 비교해보면 성장과정이나 현재 위치, 나이 등의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불법적인 일도 서슴치 않은, 역시나 “다크 히어로” 적인 면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큰 차별성을 느낄 수 없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추리소설로써의 트릭과 구성은 어떨까? 한편 한 편 작가가 공들여 꾸민 트릭과 플롯은 기발하고 정교하지만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안락의자 탐정의 전형을 보여준 <대모산은 너무 멀다> 편에서 지하철에 동승한 남자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여자 친구의 목격담만을 듣고서 살인사건의 전말, 즉 그 남자가 애인을 죽이고 사체의 일부를 대모산에 파묻으러 가는 것이라는 사건의 전말과 남자의 거주지까지 추리해내는 장면은 나름 기발하긴 하지만 정확한 근거나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라기 보다는 억측(臆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는 “저 사람은 실연당했을 꺼야” 또는 “저 사람 어제 외박했을 꺼야” 등등 멋대로 상상해보는 그런 이야기 수준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런 멋대로의 상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를 가지고 나름 추측해보는 것이라 실제로 들어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책처럼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또한 그런 살인사건을 몇 마디 목격담 만으로 추리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서의 문제>에서 살인 장소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서 강물에 사체를 띄워 바다까지 먼 거리를 보낸다는 설정 또한 실제로는 불가능한 트릭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정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실에서는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허구의 추리소설 속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 사실 이름 있는 일본 추리소설들 중에는 이 책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트릭이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비일비재하다 - , 너무 엄격한 논리성이나 사실성의 잣대만 들이대지 않는다면 기발하고 재미있는 트릭이기 때문이다. 일곱 편의 단편들 중에서는 진구라는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자살을 살인 사건으로 둔갑시킨다는 설정 또한 기발한 <티켓 다방의 죽음>편과 반가운 이름인 “고진” 변호사가 카메오로 등장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뮤즈의 계시> 편이 캐릭터와 트릭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단편들로 꼽고 싶다.

 

 

트릭과 반전 면에서는 다소 아쉽지만 - 감상을 적다 보니 비판적인 내용이 적지 않은데 이 작품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소설에 대한 애정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 캐릭터의 매력이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그런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외국 소설과 비교해 캐릭터가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 소설 상황에서 작가의 두 주인공인 “고진”과 “진구”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 추리소설 중에서 우리 소설이 3.2%에 불과할 정도로 그 비중은 미미하지만 이렇게 한 편 두 편 눈에 띄는 우리 작품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면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앞으로도 이 책과 같은 반가운 우리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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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의 제자 - 두 개의 두뇌, 한 개의 심장 메리 러셀 시리즈
로리 R. 킹 지음, 박미영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로라 R.킹”의 <메리 러셀> 시리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자주 가는 추리소설 카페 게시글을 통해서였다. 게시글은 코난 도일 사후 수많은 후배 작가들이 쓴 페시티슈(Pastiche; 다른 작가들이 원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만든 새로운 작품) 목록들을 다룬 글이었는데, 그 목록 중에 바로 <메리 러셀> 시리즈가 소개되어 있었다. 은퇴하고 시골에서 양봉(養蜂)을 하며 유유자적하던 “셜록 홈즈”가 자기 못지않게 똑똑한 소녀인 제자 “메리 러셀”과 함께 수수께끼 사건들을 해결하고 일대 모험을 벌인다는 이 시리즈는 1994년에 첫 출간한 이래 지금까지 11권이 이어질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셜록 홈즈와 여제자라는 흥미롭고 이색적인 조합인데다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니 꽤나 관심이 갔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아 못내 아쉬움이 들었었다. 이후 “셜록 홈즈”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셜록 홈즈” 관련 책들의 출간 붐이 일었는데도 이 시리즈는 그 리스트들에 계속 빠져 있어서 실망감과 함께 결국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글로는 만나기가 영 요원할 것만 같았던 이 <메리 러셀>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정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시리즈가 시작된 지 18년 만에 시리즈의 첫 권인 바로 <셜록의 제자(원제 The Beekeeper's Apprentice / 노블마인 / 2012년 6월) 말이다. 오랫동안 출간을 기다려 왔던 책이기에 책을 받자 말자 표지를 열어 들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전운(戰雲)이 전 유럽을 강타하던 1915년 4월 초, 영국 일글랜드 남동부에 있는 외진 지방인 서식스(Sussex)에 살고 있던 열 다섯 소녀 “메리 러셀”은 책에 코를 파묻고 언덕을 거닐다가 하마터면 한 남자를 밟을 뻔 한다. 납작한 천 모자를 쓴 이 50대 남자는 여위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세었으며 오래된 트위드 코트를 입고 있었다. 누구냐고 따지는 물음에 꿀벌을 보는 중이라고 덤덤히 말하는 이 남자, 바로 은퇴하고 이 마을에 내려와 벌을 키우는 - 원제에서 “Beekeeper"가 바로 양봉업자란 뜻이다 - 전설의 명탐정 “셜록 홈즈”였던 것이다. 홈즈가 관찰하고 있는 벌들의 정체와 벌들과 인간과의 비슷한 점에 대한 러셀의 똑 부러지는 설명에 놀란 홈즈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차(茶)를 대접하고, 그녀에게 홈즈가 런던에서 머물렀던 “베이커가 21번지” 하숙집 주인으로 유명했던 “허드슨” 부인을 소개한다. 이렇게 홈즈와 러셀의 인연은 시작된다. 홈즈는 러셀을 제자로 거두어 들여 그녀에게 변장술과 추리기법, 화학실험 방법 등 자신의 노하우들을 하나둘씩 전수하고 둘이서 함께 마을에서 벌어진 독극물 사건과 도둑 사건을 해결한다. 이렇게 탐정 수업과 사건 해결을 통해 어느새 훌쩍 커버린 메리는 옥스퍼드 대학 신학과에 진학하게 되고, 방학마다 고향에 내려와 홈즈와의 우정을 계속 이어가며 홈즈와 함께 미국 상원의원 딸 납치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면서 이제는 홈즈의 전기 작가인 왓슨을 대신할 홈즈의 어엿한 파트너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홈즈와 메리를 위협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누군가가 설치한 폭탄으로 홈즈는 등에 부상을 입고, 메리가 머무는 기숙사에 폭탄이 설치되지만 홈즈 덕에 메리는 위험천만한 순간을 넘기게 되며, 왓슨 박사는 홈즈의 경고로 자신의 집에서 빠져 나오지만 집은 폭탄이 터져 전소(全燒)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홈즈의 추리 기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의문의 세력들은 홈즈와 메리,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미행하면서 테러를 가해오고, 홈즈와 메리는 그들을 따돌리고 중동 예루살렘 지방으로 몸을 피해서는 예루살렘 주변의 성지(聖地)를 차례로 순례하면서 정체불명의 적들을 대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모든 계획을 마무리한 홈즈와 메리는 적이 기다리고 있는 런던으로 돌아온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에게 익숙한 “코넌 도일” 원전(原典) 속의 홈즈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새로운 모습의 “셜록 홈즈”와 그에 버금가는 천재적인 두뇌 솜씨를 보여주는 “메리 러셀”, 일견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원작의 홈즈와 왓슨 콤비를 무색하게 만드는 멋진 궁합과 활약을 펼쳐 보이는 “캐릭터”의 매력을 들 수 있겠다. 우선 이 책에서 홈즈의 가장 큰 변화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홈즈 맞아?”라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확 바뀌어 버린 그의 “성격”을 꼽을 수 있겠다. 쉰 네 살 노년(老年)에 접어 든 탓인지 아니면 악의와 살의가 가득한 범죄의 온상인 런던이라는 대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유순해진 탓인지 예전처럼 음울한 성격 - 종종 이런 음울한 성격 때문에 다른 페시티슈 소설 속에서 마약 중독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과 무능한 경찰들을 비웃던 냉소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이토록 인간적인 셜록 홈즈는 본적이 없다!”라는 뒷 표지 문구처럼 한결 인간미 있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홈즈의 인간미는 친우 왓슨 박사나 안주인 역할을 하는 허드슨 부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에서나 마흔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제자 메리를 때로는 딸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모습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성격적인 변화 외에 홈즈의 추리 솜씨에도 원작과는 다른 면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물론 사소한 몇 가지 단서들로 그 사람의 인적상황을 추리해내는 번뜩이는 추리 - 책 도입부에서 처음 만난 메리의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을 마치 곁에서 지켜본 것 마냥 세세하게 읊어대어 메리를 놀라게 만든다. 메리는 그런 홈즈에게 200년 전이었다면 화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맞받아치며 자신 또한 홈즈의 내력을 몇 가지 단서로 추리해 낸다 -, 변장술과 추적술, 사건 수사 능력 등 원작에서 보여준 능력들은 전혀 퇴색하지 않았지만 원작에서처럼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마치 사건 전말을 홈즈 혼자서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한 초능력(超能力)과도 같은 능력이 아니라 좀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일부러 원작보다 그 능력의 수위(水位)을 낮춘 듯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원작에서는 지적 수준과 추리 능력 면에서 평범한 일반인인 왓슨의 시각에서 홈즈를 그려내다 보니 작은 단서들 만으로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홈즈의 능력에 놀라움과 경탄 일색일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홈즈에 필적하는 두뇌 회전과 추리 능력을 가지고 있는 메리의 시각으로는 왓슨처럼 신기하지 만은 않은, 동등한 수준에서 바라보고 이해해 볼 수 있는, 또한 제자로서 배우고 또는 응용해 낼 수 있는 그런 설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설정은 메리가 홈즈와 여러 사건을 겪어 나가면서 보조 또는 제자 역할에서 머무르지 않고 홈즈의 든든한 파트너로 성장해 나가는, 즉 파트너로서의 홈즈와 메리의 관계 설정에 개연성과 설득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시리즈의 첫 시작이다 보니 아직은 미숙해서 홈즈에게 많이 의존하는 메리이지만 시리즈가 거듭될 수 록 홈즈와 훌륭히 짝을 이뤄 사건들을 해결하는, 심지어 홈즈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멋진 활약을 펼치는 캐릭터로 성장해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절로 들게 한다.

 

이렇게 전설인 홈즈와 현실의 메리가 어우러져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캐릭터 관계 설정인 참 재미있고 매력적이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기대했던 만큼 기발하고 흥미롭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이 메리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 또한 그런 성장 과정에 맞춰 소소한 사건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커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도 있지만 원작에서처럼 매 사건 기이하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다소 실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특히 홈즈와 메리를 먼 중동지방까지 몸을 숨기게 만들었던 마지막 사건은 그 전개와 마지막 장면에서 홈즈와 메리가 맞딱뜨리는 범인의 정체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 는 없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홈즈와 메리는 홈즈와도 인연이 깊은, 어쩌면 둘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적일 수 도 있는 의외의 인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범인과 벌이는 결투씬은 기대했던 것처럼 긴장감 넘치고 짜릿하지는 않은, 오히려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실망스럽게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18년간 계속 이어져 왔을 정도로 많은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제 파트너의 위치로 한껏 성장한 메리가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는 좀 더 기이하고 신비로운 사건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절로 불러일으키니 미리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감상하는 게 좋을까? 원작에서의 차갑고 냉소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홈즈를 기대했던 독자들이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독자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작품 속에서 “나의 홈즈는 왓슨의 홈즈가 아님을 인정하는 바다.”라고 말하고 있고, 홈즈 또한 소설에서 왓슨의 소설 속 자신의 모습은 과장되었다고 밝히는 등 여러 번 자신이 그려낸 홈즈의 원작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원작과의 차이만을 자꾸 들춰내어 비교하는 것 보다는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로라 R.킹”이 새롭게 만들어 낸 “셜록 홈즈 이야기” 로 감상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출간을 기다려온 보람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책으로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늦게나마 국내 출간의 물꼬를 트게 된 이상 이 시리즈의 남은 10권과 올해 출간될 예정이라는 12번째 시리즈까지 계속해서 출간되어 주길, 여기에 하나 더 욕심 내보자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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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 여류작가 “세라 워터스(Sarah Waters)”의 “빅토리안 로맨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라는 <끌림(원제 Affinity / 열린 책들/ 2012년 4월)>은 제목이 “끌림”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여성 작가 - 내가 남자인 탓인지 아니면 중년에 접어들어 감수성이 많이 메말랐는지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에 제대로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인데다가 그 시대상과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부족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거기에 약간은 부담스러운 동성애(레즈비언)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적 소수자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들의 사랑과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을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신론(無神論)”이 아니라 “불가지론(不可知論)”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보니 그들의 사랑을 지지하거나 공감하고 있진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부담될 수 밖에 없는 소재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주저하게 되는 책들은 결국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표지를 펼쳐든 이 책, 읽는 내내 책에 몰입하지 못해 몇 번을 덮었다가 다시 읽은, 결국 줄거리만 쫓아 겨우 읽어낸 꽤나 애를 먹었던 그런 책이 되고 말았다.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1874년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과 연인의 변심으로 인한 상실감에 우울증에 시달렸던 상류층 집안의 숙녀 “마거릿 프라이어”는 아빠의 지인이었던 “밀뱅크” 교도소 책임자인 “실리토” 씨의 권유로 교도소를 방문하게 된다. 여자 죄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들을 교화(敎化)하고 자신의 우울증도 치료하기 위해서다. 소지품을 조심하고, 감옥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되며, 감옥에 있는 여자와 그 어떤 약속도 안된다는 경고를 듣고 여죄수들이 수감된 감옥 건물 안으로 들어선 마거릿은 죄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시작된 대화가 계속되면서 마거릿은 자신이 비록 밖에서는 상류층 집안의 숙녀로 대우받고 있지만 이곳 밀뱅크 감옥에 수감 중인 저 죄수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의 죽음에 충격 받아 몰핀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어머니의 혹독한 감시 하에 살고 있는 자신 또한 어쩌면 감옥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신비로운 매력의 한 여인을 만난다. 바로 자신이 영매(靈媒)라고 주장하는 “셀리나 도스”가 바로 그녀였다. 한해 전인 1873년, 셀리나는 자신이 불러들인 영혼인 “피터 퀵”이 의뢰인인 “브링크” 부인의 아들을 심하게 다루었고 그 광경을 목격한 부인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죽자 사기죄와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된 것이었다. 초혼(招魂)할 수 있다는 셀리나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마거릿은 셀리나의 물건들이 자신의 방에서 발견되고,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맞추는 셀리나의 능력에 충격을 받으며 더욱더 그녀에게 매료되어 간다. 아버지의 죽음과 연인과의 이별에 상처를 받은 마거릿, 미신 취급당하며 사회에 외면당한 셀리나, 두 여자의 위험하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이 그렇게 시작된다.

 

 책은 두 주인공인 마거릿과 셀리나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여자의 내밀한 속마음을 훔쳐 보는 듯한 은밀한 재미를 준다. 또한 불가사의한 존재라 할 수 있는 영매 셀리나의 일기 속에 감춰진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은 마지막까지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마지막 결말의 반전 또한 꽤나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빅토리안 로맨스 3부작 중 첫 작품인 <핑거스미스>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를 본 독자들이 “반전영화 수작”, “슬픈 반전 영화” 라고 평하는 것을 보면 이 작가, 미스터리적 이야기 전개와 반전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로 느껴진다. 프롤로그에서 셀리나가 구속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중간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잊었는데, 결국 그 사건에 반전이 숨어 있다니 꽤나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처럼 신비롭고 미스터리적인 구성, 그리고 여느 추리소설 못지 않는 반전 등 책 재미로만 놓고 보면 꽤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데, 난 이 책에 쉽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서두에서 우려했던 거리낌들을 여지없이 느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들의 일기를 교차 편집하여 그들의 심리를 여성작가 특유의 세밀하고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지만 쉽게 몰입되지가 않았고, 책 속 곳곳에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 - 빅토리안 로맨스 3부작 중 다른 작품들은 꽤나 수위가 높았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직접적인 행위보다는 심리적인 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 들도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다 보니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지루하기까지 느껴져 줄거리와 큰 상관없는 사건이나 심리 묘사는 생략한 채 대화 위주로만 읽고 말았다. 여기에 요즈음 큰 활자(活字)에 성긴 간격의 편집에 익숙했던 탓 인지 30줄에 가까운 빽빽한 줄 간격으로 페이지 하나 가득 넘치는 작은 글자들에 눈이 쉽게 피로해진 것도, 그리고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대한 부담감 또한 몰입을 방해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하겠다.

 

결국 이 책, 결국은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고 그러기에 이 책에 대한 평가 또한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별점 후하기로 소문(?)난 내가 세 개 밖에 주지 않는 것도 이 책이 가치가 없고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올곧이 공감하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투정 쯤으로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 혹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글 보다는 책의 재미와 감동을 올곧이 느끼신, 제목처럼 이 책의 “끌림”의 요소들을 제대로 발견하신 다른 독자분들의 리뷰를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다른 분들의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고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핑거 스미스>를 책과 영화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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