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기발하고 정교한 플롯과 트릭,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을 특징으로 하는 추리소설(推理小說)에는 법칙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대표적인 법칙이 미국 추리소설 작가 “S.S.반다인(S.S. Van Dine)”의 “추리소설 법칙 20”과 영국 대주교 겸 추리 작가인 “로널드 녹스(Ronald Arbuthnott Knox)”의 “추리소설작법 10계”가 있다고 하는데,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일종의 “두뇌 게임”이라는 추리소설의 본령상 게임을 제시하는 작가가 독자에게 범인을 추리할 수 있는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고 독자는 그 단서들을 토대로 범인을 추리해낸다는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법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법칙을 세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항목들이 많은데, 표현과 문구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법칙 중의 하나가 살인 방법과 이에 대한 수사 방법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추리소설에서 비과학적인 초능력(超能力)이나 마법(魔法), 과학과 관계없는 미지의 독약(毒藥) - 이 미지의 독약에 대한 규칙은 “영국 탐정소설 작가 클럽”의 신입회원 서약으로 유명하다 - 등은 금기(禁忌)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몇 몇 추리 소설에서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살인 방법과 수사 기법은 마법과는 관계없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추리소설 법칙을 위반하지는 않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마법이라고 해서 꼭 배제될 것이 아니라 여기에 추리소설의 원칙, 즉 분명하고 명확한 원인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라는 “공정성”의 원칙을 부여한다면 추리소설의 소재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시도를 멋지게 성공해낸 작품을 이번에 만났다. 바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판타지 미스터리 소설 <부러진 용골(원제 折れた龍骨 / 북홀릭 / 2012년 5월)>이 그 작품이다.

 

브리튼 섬 동쪽, 런던에서 출항해 북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사흘 밤낮을 가면 도착하는 크고 작은 섬 두 개로 이뤄진 “솔론”제도의 영주 “로렌트 에일윈”은 “저주받은 데인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용병들을 모집하던 차에 “병원형제단”의 기사 “팔크 피츠존”과 그의 종사 “니콜라 바고”의 방문을 받는다. 기사 팔크는 암살기사 “에드릭”이 영주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영주는 그 다음날 자신의 작전실에서 그만 싸늘히 식은 시체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전날 영주가 작전실에서 밤을 새울 것이라는 말을 들은 용병들과 방문객, 그리고 집사로 압축되고, 영주의 딸이자 이 책의 화자(話者)이기도 한 “아미나 에일윈”은 팔크 일행과 함께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전날의 알리바이를 탐문 수사하게 된다. 영주의 장례식과 아미나 일행의 탐문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영주가 두려워했던 데인인 군대가 솔론 섬을 습격하고, 용병들과 팔크 일행, 그리고 솔론 제도 주민들은 유혈이 낭자하는 처절한 싸움 끝에 가까스로 그들의 습격을 막아낸다. 전쟁이 끝나고 영주의 성(城)에서 승전 기념파티가 열리는데, 기사 팔크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수사해온 결과와 범인의 정체를 밝힌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잉글랜드의 사자왕(獅子王) 리처드 1세(Ricard Ⅰ;1157~1199)가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12세기 말(1190년) 영국령(領)의 가상의 섬인 솔론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우리의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저주와 현혹 마법, 인형술(人形術) - 책에서는 그리스 청동거인 “탈로스(Talos)”을 조종한다 -, 불사(不死) 등 마법들이 실재(實在)하는 판타지 세계이다. 이 책에서 추리 대상이 되는 사건은 영주인 “로렌트 에일윈” 살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범인은 마법에 의해 조종되는 “미니온”이라는 존재이다. 마법에 의한 살인이라니 앞서 말한 추리소설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셈이지만 작가는 여기서 사전 전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미니온이란 마법사가 대상자의 피를 채취해 마법을 걸면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인데, 단순히 꼭두각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살인 지령을 완수해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증거를 감추는 등의 행위를 하고, 살인이 일어난 이후에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완벽하게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이다. 즉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영주가 작전실에 있을 것이라는 말을 직접 들었거나 알았던 용의자들 중에 범인이 있는데, 정작 범인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가정 속에서 탐정은 용의자들의 알리바이와 행위를 수사하면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사람부터 용의선상에서 지워나가는, 추리소설에서 가장 흔한 방법인 “소거법(消去法)”을 통해서 범인을 압축해나가는 방식이 가장 자연스러운 수사방법일 것이다. 이 책에서 탐정인 “팔크 피츠존”은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행적을 조사하고는 데인인들과의 전쟁이 끝나고 승전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에서 각 용의자별로 범인이 아닌 이유를 상세하게 밝힌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전혀 의외의 범인을 지목한다. 이외에도 완벽한 밀실에서의 탈출이나 밤만 되면 고립되어 버리는 섬의 비밀 등 추리 소설적 요소가 다분한데, 여기에도 작가는 공정성의 시비를 비껴가기 위해 사전에 전제를 달아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전혀 이질적인 장르인 추리와 판타지를 제대로 융합해 낸 소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저주받은 불사지체인 데인인의 존재나 각종 마법들의 현현(顯現) 등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잘 가미했고, 추리적인 면에서도 전통적인 소거법과 밀실 트릭 등 추리소설 본연의 묘미를 잘 살린, 어느 정도는 장르 융합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다면 추리소설의 “공정성” 면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분명 비과학적인 요소인 마법이 살인 방법으로 등장되지만 허무맹랑하지 않고 개연성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사전에 전제를 설정해 공정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니 이 시도도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불공정한 것은 바로 “범인의 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결말은 밝힐 수 없지만 범인의 정체야 말로 공정성의 원칙을 완전히 위배하는 불공정한 결말일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런 “불공정한” 결말 때문에 평가절하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불공정한 결말 때문에 마지막 반전의 충격은 더 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 판타지라니 두 장르 모두 좋아하는 나에게는 즐거움이 배(倍)가 되는 그런 소설이었지만, 추리소설의 공정성과 법칙을 엄격하게 따지는 팬들에게는 논란이 될 수 도 있는 그런 소설이라고 하겠다. 일본 추리소설의 장르적 다양함과 실험정신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이질적인 두 장르의 융합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해내다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 일본 각종 추리소설 상들을 휩쓸 정도로 유명한, 즉 성공한 작품이라고 하니, 이 책의 제목이자 암호(暗號)이기도 한 “부러진 용골”이 전 유럽에 울려 퍼지는 후속편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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