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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ㅣ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드디어 한국 추리소설도 오랜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일까? 일본, 영미, 북유럽 등 외국 추리소설들이 장악 - 2012년 기준 국가별 추리소설 매출 점유율에서 일본(20.8%), 영미(25.4%), 독일·프랑스·북유럽(50.6%)로 외국 추리소설들이 전체 96.8%를 차지한다고 한다(중앙일보. 2012.06.19.“나라별로 즐기는 추리소설” 참조) - 한 추리 소설계에 “우리” 추리 소설들이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지만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한다. 특히 신인 작가들이 그러한데 “서미애(<반가운 살인자>)”, “손선영(<죽어야 사는 남자>)”, “유현상(<살인자의 편지>)”, “허수정(<망령들의 귀환)>”, “김유정(<7년의 밤>)” 등의 작품들과 신구(新舊)세대 추리작가들의 단편 모음집 <목련이 피었다> - 이 외에도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있을 텐데 읽어본 작품들만 골라봤다 - 등은 외국 추리소설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성과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작가들과 함께 독특한 캐릭터와 정교한 트릭과 반전을 구사하는 작품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 바로 현직 판사라는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가 바로 그이다.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붉은 집 살인 사건>은 2년 전 쯤에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주인공인 “고진” 변호사는 범죄를 사법(司法)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응징하는 일종의 "다크 히어로(Dark Hero)" - 현직 판사가 사법 제도에 의존하지 않는 변호사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니 의외성의 재미를 준다 - 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어 아직까지 우리 추리소설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로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반해, 사건 추리가 너무 서술적 설명 위주이고 부자연스럽고 납득하기 힘든 트릭들은 조금 아쉬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는 그의 후속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2년 여 만에 그의 신작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김진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인 단편집 <순서의 문제(시공사/2012년 5월)>이 그 책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에는 표제작(表題作)인 “순서의 문제” 포함하여 7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탐정인 “김진구”라는 캐릭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친구 변호사의 신분으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 사적 응징을 하는 전작의 “고진” 못지않게 불법적인 일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그런 캐릭터로 설정하고 있다. 고교 시절 부모님을 사고로 여의고 천애 고아 신세가 된 진구는 법대 중퇴 학력으로 변변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시원을 전전하여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릴없는 백수 신세이다. 그런데 이 친구, 기자, 형사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신분 사칭을 스스럼없이 하고, 젊은 시절 배워놓은 열쇠 따기 기술을 이용해 빈 집이나 자동차 문을 척척 따기도 한다. 심지어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트릭을 낱낱이 밝혀내어 범인을 협박하여 고액의 돈을 뜯어내고(“순서의 문제”), 여자 친구의 목격담 만으로 앉은 자리에서 살인사건의 전말을 추리해내는 천재적인 솜씨를 펼쳐 보이지만 결국 보상금을 타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며(“대모산은 너무 멀다”), 자살을 해서 생명보험금을 타지 못하는 여자 친구의 친척을 위해 사인(死因)을 살인(殺人)으로 바꾸는 사기극을 꾸미기도 한다(“티켓 다방의 죽음”). 물론 이렇게 자신의 잇속만을 위해 추리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살인사건을 위장하기 위한 알리바이 증언자로 끌어 들인 부부의 트릭을 법정에서 멋지게 깨뜨리고(“뮤즈의 계시”), 납치된 소녀의 엉뚱한 증언이 소녀의 “공감각(共感覺; 자극을 받은 감각이 다른 감각에 적용되어 반응하는, 색에 기반한 감각의 공유 현상)”이라는 특이한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며,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축 건물 환풍기에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한편 범죄사건은 아니지만 여자 친구와 페루로 여행가기로 해놓고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쳐 버리자 진구는 발상을 전환(易發想)하여 오히려 여자 친구보다 먼저 페루 공항에 도착해 여자 친구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막간; 마추피추의 꿈>). 다만 전작인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의 고진 변호사와 비교해보면 성장과정이나 현재 위치, 나이 등의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불법적인 일도 서슴치 않은, 역시나 “다크 히어로” 적인 면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큰 차별성을 느낄 수 없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추리소설로써의 트릭과 구성은 어떨까? 한편 한 편 작가가 공들여 꾸민 트릭과 플롯은 기발하고 정교하지만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안락의자 탐정의 전형을 보여준 <대모산은 너무 멀다> 편에서 지하철에 동승한 남자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여자 친구의 목격담만을 듣고서 살인사건의 전말, 즉 그 남자가 애인을 죽이고 사체의 일부를 대모산에 파묻으러 가는 것이라는 사건의 전말과 남자의 거주지까지 추리해내는 장면은 나름 기발하긴 하지만 정확한 근거나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라기 보다는 억측(臆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는 “저 사람은 실연당했을 꺼야” 또는 “저 사람 어제 외박했을 꺼야” 등등 멋대로 상상해보는 그런 이야기 수준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런 멋대로의 상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를 가지고 나름 추측해보는 것이라 실제로 들어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책처럼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또한 그런 살인사건을 몇 마디 목격담 만으로 추리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서의 문제>에서 살인 장소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서 강물에 사체를 띄워 바다까지 먼 거리를 보낸다는 설정 또한 실제로는 불가능한 트릭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정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실에서는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허구의 추리소설 속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 사실 이름 있는 일본 추리소설들 중에는 이 책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트릭이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비일비재하다 - , 너무 엄격한 논리성이나 사실성의 잣대만 들이대지 않는다면 기발하고 재미있는 트릭이기 때문이다. 일곱 편의 단편들 중에서는 진구라는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자살을 살인 사건으로 둔갑시킨다는 설정 또한 기발한 <티켓 다방의 죽음>편과 반가운 이름인 “고진” 변호사가 카메오로 등장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뮤즈의 계시> 편이 캐릭터와 트릭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단편들로 꼽고 싶다.
트릭과 반전 면에서는 다소 아쉽지만 - 감상을 적다 보니 비판적인 내용이 적지 않은데 이 작품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소설에 대한 애정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 캐릭터의 매력이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그런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외국 소설과 비교해 캐릭터가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 소설 상황에서 작가의 두 주인공인 “고진”과 “진구”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 추리소설 중에서 우리 소설이 3.2%에 불과할 정도로 그 비중은 미미하지만 이렇게 한 편 두 편 눈에 띄는 우리 작품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면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앞으로도 이 책과 같은 반가운 우리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