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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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인형극으로 본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시험관에 담긴 정체불명의 약물이 내뿜는 뽀얀 연기, 그리고 약물을 마시면 하이드라는 괴물로 변신하는 지킬 박사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후 영화, 만화 등으로 각색된 다양한 지킬 박사 이야기를 봤지만 제대로 기억에 남는 건 없습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 새로울 것도 없고,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그중 가장 시시했던 건 성인이 된 뒤 보았던 영화 <메리 라일리>였습니다. 스티븐 프리어스가 연출하고 줄리아 로버츠와 존 말코비치가 출연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라 매우 진지한 작품이었는데 이렇다할 장면이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을 보면 꽤나 재미없게 보았나 봅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스티븐슨의 원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이한 경우>(원작의 본래 제목)를 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진장 재미있더군요. ‘지금까지 본 XXX는 모두 잊어라!’라는 어떤 영화의 진부한 홍보문구가 떠오르더군요. 정말 스티븐슨의 원작은 실로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더군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가 주는 즉물적인 공포의 순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순전히 ‘내’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이 ‘남’이 아닌 ‘나’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본 다른 지킬 박사의 이야기는 하이드의 악마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지킬 박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조명한 작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작만큼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악마성을 공고히 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원작을 읽다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이한 경우’는 사라지고 나를 포함한 평범한 인간들의 ‘일반적인 경우’로 치환되는 것이 느껴집니다. 섬뜩한 순간이죠. 이는 원작이 풍기는 모호함과 책의 서문에서도 지적한 흥미로운 구성이 분명히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수많은 하이드들이 출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선으로 위장한 인간의 악마성은 이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하디흔한 현실이 아니던가요?
아니 오히려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 하이드일 수 있다는 공포는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하이드일 수도 있다는 것이 진짜 무서운 거죠. 이야기 속 지킬 박사가 느꼈던 건 고뇌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이 공포는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됩니다. 지킬은 ‘약물’을 이용해 하이드로 변신했지만 현실 속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하이드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끔찍한 실험을 통해서도 이미 증명된 바 있습니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 유명한 실험 있잖아요. 그 실험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끔찍했습니다.

함께 실린 단편 <시체도둑>과 <오랄라>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특히 <시체도둑>은 매우 현대적인 작품으로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스티븐슨의 창작론을 엿볼 수 있는 <꿈의 관하여>의 축약본이 실려 있습니다. 충실한 서문과 참고할 만한 해설을 연이어 읽다보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작품의 의미를 여러모로 조망해볼 수 있습니다. <오랄라>의 몽환적이고 모호함에 대한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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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책은, 한 세달동안 장바구니와 보관함을 왔다갔다 하다가 보관함 1페이지로 사라져버린 그 책이군요! 리뷰읽을때마다 빛을 잠깐씩 보지만 언제나 다른 책들에게 눌려요 ㅠㅠ
이번 구매할때는 반드시!!

제가 어렸을 땐 이거보단 '투명인간'이 더 무서웠어요;; 맨날 상상하고-_-
그런데 존 말코비치가 나왔는데도 지루했단 말이에요? 저는 이사람 나오면 진짜 특이해서 연기하는거 구경만해도 즐겁더라구요 ㅎㅎ

lazydevil 2009-05-14 09:54   좋아요 0 | URL
'투명인간' 생각해 보면 무섭죠. 그런데 전 어릴 때 철없던 전 부러워했다는...^^

저두 존 말코비치 좋아해요. 독특한 얼굴에 포스가~~~~
근데 <매리 라일리>는 정말이지 기억이 전혀 안나요. 지킬 박사 이야기라는 거 빼구요. 제목도 '지킬'이라고 기억했는데 리뷰 쓰고 확인해보니 '매리 라일리' 덜구요^^;ㅋㅋ
 
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잔학기>는 스물 다섯 살 남자에게 1년 1개월간 납치 감금되었던 열 살 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녀가 감금된 1년 1개월간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잔학기>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이후 소녀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매우 ‘모호한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잔학기>는 작품 속의 작품 형식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고 다층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잔학기’는 소설가인 주인공 고미 나루미가 25년 전 겪은 납치 사건을 수기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그런데 고미 나루미는 ‘잔학기’를 남기고 실종되고, 남편은 ‘잔학기’를 출판사에 보냅니다. 남편은 아내의 글을 공개하는 이유를 짤막하게 밝힌 글과 아내가 ‘잔학기’를 쓴 계기가 된 편지 한 통을 ‘잔학기’와 함께 동봉합니다. 이 편지는 25년 고미 나루미를 납치했던 납치범이 보낸 편지죠. 이렇게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잔학기>는 남편의 글, 납치범의 편지, 고미 나루미가 쓴 ‘잔학기’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아니 한 가지 더, 작품 말미에 남편이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 작품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잔학기>도 후다닥 읽어버렸습니다.(그만큼 읽는 재미는 보장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 읽고 나도 도대체 주인공이 납치되었던 1년 1개월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납치범은 왜 어린 고미 나루미를 납치했는가? 납치범의 숙소 뒤 켠에서 발견된 여성의 사체는 누구인가? 공범은 있는가? 실종된 고미 나루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납치범과 주인공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잔학기>는 사건을 둘러싼 그 어떤 진실도 일러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는 함구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25년 만에 피해자인 고미 나루미가 입을 연 거죠. 재미있는 건 피해자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점입니다. 피해자는 사실을 기록한다고 몇 차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년 만에 쓴 ‘잔학기’는 작가가 임의로 자르고 덧대고 가공한 진실일 뿐입니다.(소설가는 거짓말이 공인된 직업이죠.)

피해자는 당연히 자기가 겪은 끔찍한 상황을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랬다면 자신의 일생을 지배한 그 기억으로부터 진작 자유로웠을 겁니다. 그 ‘경험’은 고미 나루미의 발목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고, 고미 나루미가 그것을 사실 그대로 고백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잔학기>는 여성지 독점 수기처럼 추측과 호기심만 증폭시킬 뿐 아무런 진실도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기리노 나쓰오는 왜 이런 선정적인 사건을 소재로 어줍지 않은 ‘수기’를 썼을까요? 기리노 나쓰오는 사건을 둘러싼 잔인한 호기심과 선정적인 추측에 대한 조롱이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납치범이 주인공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렸는가?’를 보여주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추악한 호기심이 주인공을 어떤 상처를 주었는가?’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때도 굴욕을 느꼈다. 모두들 멋대로 사정을 짐작하고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그런 복잡한 감정을 아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아이만큼 굴욕에 민감한 존재는 없다. 굴욕을 받아도 해소할 수단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p.82)

부끄럽게도 주인공이 냉소를 퍼부었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추잡하고 선정적인 호기심으로 ‘잔학기’를 읽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스물다섯 살 납치범과 열 살 난 소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이 서둘러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던 거죠. 독자인 저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잔학기’는 번번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말을 자르고, 말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나마 선정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 대목들도 나중에 보니 고미 나루미(소설가!)가 지어낸 허구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보기 좋게 물을 먹은 거죠.

게다가 작품 말미에 덧붙여진 남편의 편지는 또 한 번 독자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듭니다. 우리가 읽은 ‘잔학기’는 수기(진실)가 아니라 소설(허구)일 지도 모른다는 거죠. 결국 ‘잔학기’는 우리가 한껏 상상하고 즐겼던 것을 진실을 빙자해 보여준 허구일 뿐입니다. 그 와중에 ‘나를 망친 것 납치범이 아니라 당신들의 추잡한 호기심이야!’라는 고미 나루미의 전언이 모호한 형식으로 곳곳에 숨어 있었던 거죠.

<잔학기>를 단순한 범죄 소설로 읽는다면 이런 모호함은 치명적인 결함이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밝혀진 진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모호함 덕분에 <잔학기>는 통속성에서 벗어나 곱씹어 볼만한 작품으로 거듭납니다. 보르헤스 이래(아니 그 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이미 써먹었던 수법이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성깔’과 어우러지니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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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0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9-05-1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집에 가서 찬찬히 다시 읽어 봐야겠어요^^
기리노 나쓰오, 제 베스트 작가입니다ㅋㅋ

lazydevil 2009-05-13 08:55   좋아요 0 | URL
제 리뷰 읽고, 대놓고 칭찬해주시는 분,
쥬베이님 밖에 없어요~~~ㅋㅋ 암튼 민망하지만 기분 좋네요~^^;;

기리노 나쓰오, 작품의 수준과 관계없이 매 작품이 흥미롭더군요.
정말 매력적인 작가에요. <그로테스크>나 <다크>도 기대됩니다.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불필요한 선입견이나 기대심리에 간섭받지 않고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선입견이나 기대심리를 대신하는 것은 호기심.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독서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편안한 관계맺음의 시작일 겁니다.

<늑대의 문장>은 생경한 작품들로 채워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는 용감하게도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포기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로 이야기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웁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작품은 줄거리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고, 읽고 난 후 독자의 머리 속에 남는 것은 낯선 이미지들과 만났던 기억뿐입니다. 마치 <안달루시아의 개>같은 전위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솔직히 두 세 차례 끝까지 읽기를 포기할까 생각했을 만큼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서두르지 않고 읽었습니다. 낯선 이미지를 섬세하게 더듬어내는 탄탄하고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문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문장도 허투로 풀어놓지 않으려는 젊은 작가의 끈기가 엿보였고, 이는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일 겁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종종 과욕으로 비춰질 때가 있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의 불쑥 튀어나와 쫓아가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의심도 해보았습니다. 사실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기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작가는 단편 하나 써내는 것도 버겁고 버겁지 않았을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심을 불식시킬 만큼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섬세한 문장을 아름다웠습니다.

재미있는 책읽기였지만 작가에 대한 판단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싶습니다. 작가를 파악하기에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턱없이 부족하고, 작가가 만든 세계를 조망하기에도 불충분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든 세계는 아직 미완이기에 더욱 쉽지 않습니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일궈낸 일정부분의 성취, 그리고 기대와 우려가 섞인 조심스러운 전망이 고작일 것입니다.

여하튼 젊은 작가 김유진의 첫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분을 책 말미에 실린 한 평론가의 ‘해설’이 잡쳐놓았습니다. 책장을 덮은 뒷맛이 영 안 좋아요.  무슨 소린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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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5-08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작가의 해설은 좀 그렇지만 외국 작품에 대한 해설이 없으면 좀 2%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그 작가의 작품이 또 번역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전후 좌후에 대한 해설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일부 번역가나 출판사에서는 이게 귀찮다고 안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저는 외국 작품에 한해서는 해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lazydevil 2009-05-09 00:09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좋은 해설을 읽는 즐거움은 두 말하면 잔소리죠. 마치 즐거운 후식을 맛보는 기쁨이잖아요. 그리고 독자들이 그런 해설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말한 건 그런 좋은 해설이 아니라 공감할 수 없는 해석과 현학적인 지식만 난무하는 꿈보다 해몽식 평론을 말한 거랍니다.^*^ 그런 평론보다 카스피님 서재에 있는 좋은 정보들이 저같은 독자에겐 훨씬 도움이 된답니다.~^^;;


쥬베이 2009-05-0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이 작품 읽었어요!!
저는 나름 좋았는데, lazydevil님께는 약간 아쉬웠나 봐요^^
해설부분 비판하신거..멋지십니다!! 해설은 어깨에 힘만 잔뜩들어가 있는 글이죠ㅋㅋㅋ

lazydevil 2009-05-13 08:55   좋아요 0 | URL
국내 작가의 작품은 서평하기가 좀 그래요. 별점 주는 것도 머쓰하고요.
그래서 서평도 잘 안쓰는데... 이 작품은 평론가의 '해설'때문에 쫌 흥분해서리 과격해졌네요~~^*^
아무튼 이 책의 주인, 어린 작가가 좋은 문장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도 되고, 한편으로 부러웠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를 본 소감을 묻는다면, 지루하고 따분하다, 라고 대답할 겁니다.
 
감독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관객의 변덕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암튼 <친절한 금자씨> 이후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신선함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구질도 익숙한데다가 수싸움마저 밀린 투수의 볼배합처럼 다음 공이 무엇을 날아들지 예상이 가능하니 밋밋하고 싱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화면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뼈가 부러지고, 목이 꺾이고, 여배우의 젖가슴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남자 배우의 성기가 노출되는데도 말입니다.

<박쥐>를 보면 떠오른 레퍼런스는 비스콘티의 <강박관념>(혹은 케인의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과 여러 뱀파이어물, 70년대 한국영화(혹은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 같은 일본영화), 크리스티의 소설 등이 박찬욱 감독 식으로 ‘우스꽝스럽게’ 뒤섞여 있습니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각 작품에서 빌려 온 아이디어가 그냥저냥 조화를 이루는 수준에 머무릅니다.  

 

 

 

 

 

 

 


솔직히 기대했던 뱀파이어와 팜므파탈의 캐릭터는 평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뱀파이어의 고뇌를 더욱 흥미롭게 맛보려거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읽는 것이, 악녀를 만나려거든 케인의 소설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울 겁니다. 그러니까 <박쥐>는 어느 것도 기대에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허약하기만 합니다. 애초에 박찬욱 감독에게 잘 짜인 플롯을 기대하는 것이 현명치 못한 짓이겠지만 최소한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은 존재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야기가 거칠다보니 감독의 스타일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기는 하더군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스타일의 과잉이었습니다.
국적 불명의 의상과 세트,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 문어체식 대사, 과도한 카메라 이동, 반복되는 엇박자 편집, 고상함과 천박함을 오가는 음악, 태어나서 한번도 해본적 없는 마작, 붉은 핏빛 바다에 헤엄치는 고래의 이미지... 솔직히 지겨웠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영화 속의 배우들만 울고, 웃고, 떠들고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야기의 힘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탄탄한 힘이 감독의 스타일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던 거니까요. 참 이야기의 힘이란 게 ‘반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창조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관습을 이용하고, 벗어날 줄 아는 감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감독이 매너리즘에 빠져 겉멋부리기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쥐>는 익사 직전의 조짐이 보였기에 지루했고 아쉬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데 뒤에 따라오던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민망해하며 이러더군요. "미안해~". 미안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독이라면 이런 상황이 민망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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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맞아요 맞아- 영화 보기 전에 스포는 되도록 피하는 편이라 영화보러 나가기 전에 이 글을 제목만 보고 클릭하지 않았었는데, 읽고 갔으면 영화 내내 이 페이퍼만 생각했을 것 같군요^^;;

lazydevil 2009-05-03 14:20   좋아요 0 | URL
책이나 영화나 되도록 스포는 빼고 정리하려고하는데 은연중 삐져나오곤 합니다. 암튼 영화는 포켓터블님처럼 관련 글을 보지 않고 감상하는 게 현명한 거 같아요.^^;
포겟터블님 반갑습니다~~^^

쥬베이 2009-05-0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못봤어요. 얼른 봐야지ㅋㅋㅋ
'여배우의 젖가슴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이 부분! 기대됩니다ㅎㅎㅎㅎㅎ

lazydevil 2009-05-10 11:00   좋아요 0 | URL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빼고, 큰 기대 안하면 그럭저럭 볼만 합니다.
그리고, 김옥빈양... 영화 속에서 고생이 많더군요.^^

[해이] 2009-05-2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네요^^ 전 내일 박(찬욱)쥐를 보러갈텐데 긴이 좀 빠지네요... 물론 박찬욱한테 별 기대하는건 없지만 ㅎㅎㅎㅎㅎ

lazydevil 2009-05-27 09:46   좋아요 0 | URL
기대를 두고 가시면 그런대로 괜찮을 겁니다. 칸 수상작이잖아요~~^^(헉~ 나도 모르게 약간의 비아냥이^^;)
해이님 반갑습니다...^^/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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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작품 치고는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사건을 전개하는 양상도 다릅니다. 작가의 능청스러운 입담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작품은 험난한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트리샤라는 아홉 살 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구조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죠.
익히 알고 있는 스티븐 킹이라면 이런 이야기 속에 익숙한 괴물들이 등장시킬 겁니다. 소녀의 피를 제단에 바치려는 악마 숭배자나, 피에 굶주린 흡혈귀, 혹은 귀신 들린 살인마 같은 괴물 말입니다. 이들은 소녀를 더 한층 끔찍한 공포에 빠트릴 테니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습니까? 아니면 산 전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악마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은 이례적으로 자신의 짓궂은 상상력을 억누릅니다. 뜻밖에도 스티븐 킹이 아홉 살 소녀 트리샤에게 던져준 공포는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외떨어진 산 속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즉 고립과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정말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스티븐 킹의 작품 치고는 싱거운 작품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작가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배제된 르포타주 형식의 조난기는 아닙니다. 아홉 살 소녀의 눈을 거쳐 투사된 공포의 순간은 꽤 매력적인 환타지로 재구성되고 있거든요. 주인공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비틀어본 것입니다. 소녀가 좋아하는 <반지의 제왕> 풍으로 말이죠. 속내를 알 수 없는 교활한 살인마보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어둠의 기사가 더욱 무서울 테니까요.

소녀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기대는 수단 역시 환타지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환타지입니다. 독특한 설정이긴 한데, 일단 리그 최고의 구원투수를 추종하는 아홉 살 소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낯섭니다. 정서의 차이일까요?
아무리 한심한 부모라지만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야구선수를 수호천사로 삼아 역경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한 설정인 것 같습니다. 작품에 나타난 걸 보면 소녀의 부모는 그렇게 못된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만들어낸 환타지를 갑옷과 무기로 삼아 공포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특히 이야기 마지막, 현실적 위험이 코앞에 직면했을 때, 소녀가 맹신하는 환타지가 실제로 비범한 위력으로 발현되는 순간은 무척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순간을 간단히 요약하면, ‘몰아의 경지에 빠진 아홉 살 난 소녀가 무지막지한 공포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기에 결국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정도가 되겠군요. 무슨 구도 소설 이야기 같군요.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의 결론이 이것이고 그 과정이 꽤나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작가의 압도적인 묘사력입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야생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소녀의 여정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이는 스티븐 킹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끔찍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이기 전에 탁월한 문장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위대한 작가는 아닐지 몰라도 문장을 다룰 줄 아는 실력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역자와 편집자 모두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지(그렇다 해도 무성의에 대한 지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야구시합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재미있는 실수가 난발하더군요.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 유명한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를 ‘데렉 제터’로 고집스럽게 표기한 것과 양키스의 투수 앤디 페티트가 타자로 묘사된 대목이었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두 선수는 양키스의 주전선수로 뛰고 있는데, 경기를 볼 때마다 ‘데렉 제터’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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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9-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
작품의 느낌을 제대로 전해주시네요^^

스티븐 킹 팬인데 못읽은 작품이 많아요. 이 작품 꼭 찾아봐야겠어요.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ㅋㅋㅋ

lazydevil 2009-05-10 10:58   좋아요 0 | URL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이 보여준 묘사는 정말 대단했어요. 번역된 글인데도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더군요~. 전 야구를 워낙 좋아해서 엉뚱한 오역마저 재미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