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동서 미스터리 북스 87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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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재주꾼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입니다. 수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는데 그중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와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읽고 선명히 떠오른 것은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알랭 들롱이 아니라 맷 데이먼의 모습이었습니다. 원작의 톰 리플리는 잘생기고 우수어린 눈동자를 가진 알랭 들롱보다 섬세한 감수성이 엿보이는 어눌한 미소를 지어 보일 줄 아는 맷 데이먼이 더욱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노골적으로 풍기는 동성애적 뉘앙스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책의 원제는 매우 비아냥대는 농담이 담긴 제목입니다. 톰 리플리는 열등감과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더구나 자기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파렴치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사기꾼이자 영악한 살인자이기도 하죠. 그런 인물에게 재주꾼이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죠.

허영심은 리플리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비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에 어울리는 그럴 듯한 새 삶을 꿈꿉니다. 스스로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제로 삼류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비해 리플리는 섬세한 영혼과 명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러기에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그러니까 남루한 현실을 자각했을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낍니다. 그 치욕은 리플리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리플리가 부잣집 아들인 디키 행세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을 때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제는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짐꾸리기를 계속했다. 그는 이로써 디키 그린리프도 마지막이라고 각오하니,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의 자기 습관을 다시 몸에 익힌다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는 자기의 무능력한 마음이 정말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다시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견딜 수 없이 싫은 것은, 새것일 때에도 별로 고급이 아니었는데, 얼룩투성이며 다리지도 않은 다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싶지 않은 기분과 흡사했다.(p.240~241)
 
   

<태양은 가득히>의 가장 큰 매력은 리플리라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경찰과 탐정만큼이나 멍청하고 한심한 번역으로 만났음에도 리플리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은 사람의 친구와 가족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할 때조차도 리플리를 동정하게 됩니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인물에 공감하고 빠져들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리플리’시리즈는 모두 다섯 권입니다. 만약 다른 작품들도 <태양은 가득히>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출판사에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전작의 판권이 수년전에 싹쓸이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러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하던 생각이, 이 작품을 읽고 뚝딱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책을 낼 작정이야! 책을 내지 않는 속사정이야 알길이 없지만 이래저래 속 타는 마음을 해외에서 발간된 ‘리플리 전집’의 감동적인 북디자인을 보고는 것으로 달래보았습니다.







덧붙임.
말년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녀가 겪은 세월이 어떤 모습이었기에 이렇게 늙어버린 걸까요? 그녀가 쓴 작품만큼이나 그녀의 삶도 궁금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1995년에 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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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6-08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미국 국적이었지만 독일계 부친과 스코틀랜드계 모친과의 사이에 태어났고 자신의 작품이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선지 그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지냈다고 하네요.무슨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싫어했다고 하며 그래선지 만년에는 스위스의 산중에서 2마리의 고양이와 살았다고 합니다.
태양은 가득히는 소설로도 읽었지만 영화가 더 유명한것 같은데 어느 출판사인지는 모르지만 판권계약이 됬다면 나머지 4권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네요.
참고로 5권의 영문 제목은 아래와 갔습니다.
1 The Talented Mr. Ripley-1955
2 Ripley Under Ground-1970
3 Ripley's Game-1974
4 The Boy Who Followed Ripley-1980
5 Ripley Under Water-1991
첫번째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이 완결되기까지 36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lazydevil 2009-06-08 21:4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고맙습니다. '36년 리플리 시리즈'를 좌악 정리해주셨네요^^
그러게요... 기왕이면 '재주꾼 리플리'부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Forgettable. 2009-06-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ㅡ 그 리플리가 이 리플리군요,
라고 말하는건 ㅎㅎ
전 리플리's 게임 영화만 봤어요, 존 말코비치 나오는거^^
기대도 안했는데 그냥 미스터 말코비치 이름보고 본건데 완전 득템이라 재밌다고 좋아했는데, 책의 리플리 시리즈가 있었군요~
리뷰를 보니, 제가 본 영화는 원작에 비하면 좀 많이 대중적인듯...

lazydevil 2009-06-08 21:46   좋아요 0 | URL
오호라~~ 리플리'스 게임이 영화로ㅡ 그것도 존 말코비치라고요? 이거 챙겨봐야겠네요^*^

쥬베이 2009-06-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lazydevil님 리뷰가 화려해요^^
저는 이렇게 이쁘게 못 씁니다ㅋㅋㅋ 텍스트만 나열하고 혼자 만족하는 타입이라-_-
(lazydevil님, 여름이라 슬럼프인데,속시원한 스릴러
하나 소개해 주세요~ 편하게 읽히면서도 재밌는..뭐 그런거 없을까요?)

2009-06-15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곤조 2009-06-1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저 이미지를 노출시키다니요!

lazydevil 2009-06-18 14:55   좋아요 0 | URL
리플리 전집 이미지, 곤조님이 저한테 보여주셨죠?! 출처 밝혔습니다.^*^
 
제리코의 죽음 - An Inspector Morse Mystery 4
콜린 덱스터 지음, 장정선.이정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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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티븐 킹은 대중소설 작가임을 망각하지 않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한 단편집 후기에서 문학적 상피성이 자기를 늘 괴롭힌다고 고백한 적 있습니다. 실제로 스티븐 킹의 작품은 종종 보편적인 대중소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그의 몇몇 단편과 중편은 정말로 뛰어납니다. 그는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치고는 꽤 쓰는 편이 아니라,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정말로 잘 쓰는 작가이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문학적 상피성 속에 감춰진 ‘싸구려 상상력’과 ‘B급 정서’가 그를 자꾸 제자리(?)로 끌어내는 거죠. 그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쫓아 마구 써대고, 그 결과 작품의 수준이 들쭉날쭉합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문학적 상피성이 그를 제대로 괴롭히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콜린 덱스터의 <제리코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스티븐 킹을 들먹였군요. 문학적 상피성을 논하자면 콜린 덱스터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작가입니다. 덱스터의 문학적 상피성은 이른바 ‘예술적 교양’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들어나는 방식은 ‘잘난 척’입니다.

그럼 누가 잘난 척을 할까요? 당연히 작가 자신과 모스 경감입니다. 모스 경감 시리즈는 3인칭 소설이지만 1인칭 소설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그렇듯 사건 전개의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해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작가의 목소리와 모스 경감의 목소리가 매우 흡사합니다.
특히 모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런 양상을 보이는데, 짐짓 작가는 모스와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능청스럽게 범인의 머리 속을 슬쩍 들쳐 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독자를 따돌리고 작가와 모스 둘만 범인을 알고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둘은 키득 거리도 잘난 척하는데, 불쌍한 루이스 경사와 독자만 늘 바보가 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모스는 덱스터입니다. 책날개에 실린 덱스터의 사진을 보면, TV 시리즈에서 모스 경감을 맡은 배우보다 더 모스 같아요.

불쌍한 루이스와 독자가 바보가 되는 순간은 또 있습니다. 작가와 모스만이 알고 있는 문학, 클래식, 언어학, 역사 따위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넘치는 교양을 주체할 길 없는 작가와 모스가 잘난 척 하는 것에 속수무책을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루이스 경사.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리코의 죽음>(1981)은 해문에서 나온 (아마도) 마지막 모스경감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작품연보를 살펴보니 시리즈의 초기 작품이더군요. 그래서인지 데뷔작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1975)와 매우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이 작품에서 모스는 란치아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순간 무스탕으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콜린 덱스터의 문학적 상피성은 종종 유머러스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제리코의 죽음>에서는 루이스에게 첫 번째 사건의 범인을 설명하고 지목하는 대목이 특히 그러합니다. 술도 한잔 했겠다 매우 격정적으로 범인이 누구인가 설명하는 모스의 모습은 순간 감동이며 모스의 천재성과 박식함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장면이 그 어떤 대목보다 코믹한 상황입니다. 데뷔작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에서 실연의 상처 때문에 눈물짓는 불쌍한 모스가 웃겨 보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아... 왜 문학적 상피성 어쩌구 하느냐고요? 모스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들먹이며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울다가 웃기는 형국입니다.

아마도 큰 이변이 없는 한 당분간은 콜린 덱스터와 모스가 잘난 척하는 걸 못 볼 것 같습니다. 모스 경감 시리즈의 국내 출간이 조용히 중단된 듯 하니까요. 돌이켜보면, 그간 해문에서 소개한 다른 추리소설들에 비해 모스 경감 시리즈의 번역은 매우 충실한 편입니다. 조금 투박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본래 작품의 어투를 잘 살린 듯 하여 좋았습니다. 때론 설명 없는 무차별 의역보다 역주가 달린 직역이 고마울 때가 있는데 모스 경감 시리즈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반면 시리즈 첫 권인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에 실린 유일한 해설은 다시 읽어보니 정보나 분석 모두 심히 빈약한 수준이더군요. 추리소설 전문가로 알려진 분이 쓴 해설임에도 모스 경감 시리즈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이 너무 역력히 드러나요

이제 모스를 만나려면 다시 읽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죠. 출간된 작품 중 딱 한 권만 다시 읽는다면 무엇을 고르겠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숲을 지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두 권을 고르라면 고민이 되네요. <제리코의 죽음>도 유력하고,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도 만만치 않고,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도 다시 읽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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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6-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데빌님 서재에서 보고 보관함에 담아 놓은 책들도 한가득이고, 캐드펠시리즈도 얼른 다 마련해야 하는데-
이렇게 아닌듯 은근한 애정을 드러내시면 모스경감시리즈도 자꾸 눈에 아른아른거리잖아요 ㅠ
그런데 선뜻 장바구니로 안가는게요, 잘난척하는 작가는 좀 개인적으로 안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폴오스터같은 작가 문체에서 왠지 잘난척 삘이 느껴지거든요. 폴오스터와 비교해서 비슷한 느낌인가요?? 리뷰만 보면 왠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잘난척할 것 같은데- 잘난척이라는게 참 오묘하게 호오가 엇갈리잖아요^^;; (엄청 주절주절)

lazydevil 2009-06-03 22:06   좋아요 0 | URL
캐드펠 시리즈... 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만 앞서고 손은 더디고 늘 읽을 책은 풍년이죠^^
폴 오스터하고는 전혀 달라요. 콜린 덱스터는 대놓고 잘난척 합니다. 그런데 귀여워요.^^ 모스 경감도 마찬가지고요. 근데 저는 오스터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그의 초기작은 언제 한번 다시 읽어볼까 생각중입니다.
 
사라진 보석 - An Inspector Morse Mystery 3
콜린 덱스터 지음, 장정선.이경아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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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옥스포드에 관광을 온 미국인 여행객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랜돌프 호텔에 머뭅니다.(늘 그렇듯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고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모습을 보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행객 중 하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시에 사망자가 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했던 ‘보석’이 들어있던 핸드백이 사라집니다. 사망사고와 도난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거죠. 당연히 모스 경감과 루이스 경사가 사건을 수사하는데, 실마리를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피해자는 ‘보석’의 기증을 주선했던 인물이죠.
이번에도 모스 경감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고, 루이스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만날 때마다 추파를 던집니다. 그래도 사건은 잘도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모스 경감이죠.

모스 경감을 처음 만난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은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추리소설에 꽤나 야박하게 굴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 역시 좋았습니다. 신선한 시도였고, 짧지만 야심 찬 작품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어느 때보다 모스 경감의 캐릭터가 잘 나타난 작품이었습니다. 간호사와의 로맨스도 압권이었고요. 게다가 모스와 루이스가 거의 만담 콤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웃겼습니다.
<숲을 지나는 길>의 경우 ‘최고!’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아니 ‘단연 최고!’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여러 인물들을 한 데 엮어내는 머리 좋은 작가의 솜씨가 발군이었고, 모스 경감의 치밀한 작전 역시 탄복할 만 했습니다.
<제리코의 죽음>도 빛나는 작품입니다. <숲을 지나는 길> 만큼은 아니지만요.

냉정하게 말하면 <사라진 보석 The Jewelry Is Ours>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 비해 완성도가 조금 덜한 작품입니다. 그래도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모스 경감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거죠.

<사라진 보석>의 출간 년도는 1991년입니다. 바로 두 해전에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으로 골든대거(황금단도)상을 받았고, 이어 다음 해인 1992년에 출간한 <숲을 지나는 길>로 또 한번 골든대거상을 수상했더군요. 이 시기가 바로 모스 경감 시리즈의 두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첫 번째 절정기는 <Service of All the Dead>(1979), <제리코의 죽음>(1981)로 역시 한 해 걸러 실버대거상을 수상했던 시기였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물을 읽을 때 출간 순서를 따져 가면 읽는 것에 집착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순서대로 읽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책읽기의 재미도 더 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과 <사라진 보석>, <숲을 지나는 길> 역시 순서대로 한데 묶어 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스 경감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종종 옥스퍼드 관광홍보용 책자에 어울릴 법한 정보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라진 보석>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옥스퍼드에 관광을 온 미국인 여행객들이 중심인물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그 만큼 옥스퍼드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한번이라도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더욱 신나게 읽었겠다 싶었습니다. 혹여 영국 여행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모스 경감 팬들 대부분은 옥스퍼드는 반드시 빼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재치 있는 작가의 인용문을 여럿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것들도 있었는데, 콜린 덱스터와 앰브로스 비어스가 동시에 좋아지는 인용문이었습니다.

   
  역사, 명사
다수가 악당인 통치자들와 다수가 바보인 군인들이 만들어 낸 대부분이 중요하지 않고, 대부분이 거짓인 이야기.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
 
   


덧붙임. 
콜린 덱스터의 바이오그래피를 살펴보니 할아버지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1930년생이네요. 콜린 덱스터는 1975년에 첫 작품을 발표했고, 1999년 <The Remorseful Day>가 마지막 작품이네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가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하긴 새 작품을 써도 국내에 출간되어야 말이죠.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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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나를 위해 웃다>의 젊은 작가는 분명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며 가볍고 씩씩합니다. 일감이 그래요.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나를 위해 웃다>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모두 그렇습니다. 일감이 그래요. 독자들 또한 그녀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느낍니다. 덕분에 책읽기는 한층 수월해집니다.

때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작가의 목소리가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에 따라 종종 다르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무게’가 필요이상으로 희석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식의 ‘무게’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 아쉬웠고, 후자의 경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한 작품 한 작품 읽을수록 작가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종국에는 아쉬움이 익숙해짐으로 슬며시 변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가 빠졌네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작가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지만 절대로 선을 넘지 않습니다. 매우 단하하고 정제되어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입니다. 생각해보면 절제된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또 한번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작가의 목소리는 맞보기를 하듯 양쪽을 모두 엿봅니다. 작가의 목소리가 가볍지만 전혀 경박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저래 작가의 목소리는 가벼운 충돌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 중 하나가 이미지의 여백이고요. 술술 읽히는 가운데도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그려보게 하는 힘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은 큽니다. 젊은 작가다운 감수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그간 우리 소설들이 주로 다뤄왔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아쉽고도 아쉬웠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맴도는데 말이죠.

덧붙임.
피츠제럴드의 단편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 ‘나를 위해 웃다’가 무척 좋았습니다.

궁금증.
<나를 위해 웃다>는 작가의 첫 소설집입니다. 그런데 해설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이 언급되는 단편 ‘스톤피시는 어디로 갔을까?’는 왜 수록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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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여인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4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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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젠장, 이 사람 정말로 글을 잘 쓰는구나!’입니다. 번역된 작품을 보았을 뿐인데도 작가의 뛰어난 글 솜씨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영어로 된 원작을 읽으면 도대체 어떨까요? 외국어에 젬병인 독자로서는 아마 평생 모르겠지요?

추측 건데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챈들러를 내심 질투하거나 흠모했을 겁니다. 챈들러는 대다수 탐정소설 작가들이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과시한 탐정소설 작가입니다. 바로 문체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또한 현실감 넘치는 인물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개성 넘치는 독특한 캐릭터가 많은 탐정소설에 등장했지만 챈들러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그들이 범접하기 힘든 생동감을 자랑합니다. 작품을 읽다보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의 수기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탐정소설의 고유 영역이자 한계점이었던 서스펜스와 트릭의 세계에서 벗어나 문체와 생동감 넘치는 인물까지 성취한 챈들러가 어찌 부럽지 않았겠습니까.

<호수의 여인>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답지 않게 매우 나긋나긋한 작품입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 이박삼일을 쉬지 않고 격무에 시달리는 필립 말로의 모습은 여전합니다. 늘 그래왔듯 사건현장의 시체를 발견한 첫 목격자도 말로입니다.
그런데 하루에 25불을 벌기위해 하드보일드하게 고생하는 말로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입니다. 이기적이고 무례한 의뢰인에 대한 짜증도 덜하고 농담도 많이 합니다. 말로는 이전에도 냉소적인 유머를 과시했지만 대부분 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호수의 여인>에서는 극중 인물들과 적지 않게 농담을 나눌 정도로 ‘사교적’ 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 같고요. 당연히 말로는 그 어느 때보다 수다스럽습니다.

<호수의 여인>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짠’한 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이나 인물 간의 관계는 흠잡을 때 없이 치밀하지만 범행의 동인이 되는 설정이 약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범인)의 비중이 적습니다. 독자도 탐정도 범인(들)의 심리를 이해하기에는 작품 속에서 만나는 시간이 너무 적거든요. 그래서 관찰자로 머무르고 ‘짠’한 게 없이 덤덤하게 이야기의 파국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책에 실린 친절한 해설에서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호수의 여인>은 챈들러가 그간 발표한 세 편의 중편을 기초로 완성한 작품이라네요. 다양한 인물과 서로 다른 사건을 잘 끼워 맞췄지만 아무래도 감정까지 융합시키는 것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아무튼 챈들러의 말처럼 진실을 찾아나서는 것이 탐정의 몫입니다. 심리상담은 정신과 의사가 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짠한 감정이 어쩌구’하는 불평은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 덧붙이면,
말로가 사건 현장에 마주친 집주인 여자(플록 부인)에게 자신을 ‘파일로 밴스’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플록 부인이 파일로 밴스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탐정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말로가 이런 농담을 하는 거보면 탐정소설의 독자겠죠? ‘탐정도 탐정소설을 읽는군!’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동시에 ‘말로와 밴스가 실제로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까요?’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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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5-1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반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는 1920년대에 챈들러의 말로우 시리즈는 그 후에 나왔을 겁니다.하드 보일드 작가들이 본격 추리 작가들을 비판을 많이 했지만 반다인은 영국 위주의 추리 소설을 미국 주도로 바꾼 대표적인 작가죠.반다인의 추리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엘러리 퀸등이 나왔읍니다.당시 웬만한 추리 소설 애독자들은 반다인의 소설을 봤을테니 말로우가 파이로 밴스를 들먹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lazydevil 2009-05-19 21:31   좋아요 0 | URL
제 엉뚱한 생각을 카스피님께서 명확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좋은 설명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