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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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게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헌법 제9조 있어 전쟁방기는 군사적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와 같이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P.225)  
   

  내면적 감정의 소요에 천착하는 말랑말랑 글들에 빠져있던 가운데, 동발검의 의지로 읽은 가라타니 고진이다. 이제 차마 국가나 자본주의같은 거시담론을 논하기 민망할만큼이나 사회과학으로부터 멀리 와버렸지만, 한때는 소설보다 재밌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던가. 한참을 신나게 읽고 내려진 희망찬(!) 결론에 실소가 터졌다. 서둘러 출판일을 확인했더니, 2006년이다. 아니, 2003년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고, 도쿄의정서를 탈퇴한 '미국'의 결단을 보면서도 '자본'과 '네이션'의 '국가'가 '어소시에이션'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대항적 이념의 견제없이 신자유주의로 돌진하는 21세기에 이념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소시에이션을 상정할 수 있다. 이건 노암 촘스키의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좌표에 존재하며 프루동의 아나키즘과 맑스의 사회주의가 결합한다. 자본과 네이션(통상 민족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국가가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세계공화국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매듭을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방법은 다음과 같다.   

 1부 교환형식에서는 신자유주의국가하에서 화폐와 상품으로 통칭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복지국가에서 행해지는 탈취와 재분배, 국가사회주의 하에서의 증여와 답례를 협동조합적, 유기적 공동사회의 '교통'으로 포섭한다.  각체제별 교환양식은 각각 지배적인 시대가 존재했지만, 하나만 떼어내서 다룰 수는 없으며, 각 좌표평면 외부로부터 대항하지만 사회구성에 함께 내속하고 있다. 상품교환이라는 위상에서 생겨난 자유로운 개인 위에서 호수적 교환을 회복하려고 하는것. 이것이 어소시에이션의 방식이다.  

 2부 세계제국은 원시사회, 봉건국가를 지나 '국가'의 기운을 탐색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떠올려야 한다. 국가를 가자가 그들의 자연권을 한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사회계약말이다. 뽀인뜨는 이 계약이 폭력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민이라는 주체는 절대주의 왕권에 복종하는 신하로서 형성된 것이며, 주권자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의해 폭력적인 '자연상태'가 사라진다. 원자화된 개인의 뜻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주권자에 대한 복종으로 안녕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화폐와, 신용, 유통과 교역에 관한 중요한 지점들이 설명되지만, 절대적인 취향의 문제로다가 인상적이었던 몇가지. 

   
 

 화폐축장자는 이런 '질권'을 축적하기 위해 실제 사용가치를 단념하는 자인 것입니다. '황금욕'이나 '치부충동'은 결코 물건(사용가치)에 대한 필요나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전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물질적으로 무욕인 것입니다. 정확히 '천국에 보물을 쌓기'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욕망이 없는 신앙자처럼 말입니다. 

 자본가는 합리적인 수전노입니다. 즉 상인자본 운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수전노의 축적충동(화폐 페티시즘)과 같습니다. '합리적 수전노'로서의 자본가는 자본을 증식하기 우해 무리하여 유통 속으로 뛰어듭니다. (p.89 )

 
   
   
   예언자 종교는 이런 주술을 부정하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주술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신 예배'가 아니라 '신 강제'이고 신에의 호소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즉, '받기 위해 준다'라는 것이 넓게 고루 미치고 있는 그 근원적 특질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모든 종교에 갖추어져 있다. '차안적인' 외면적 재화를 피하고 또 '차안적인' 외면적 이익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이런 것이 가장 피안적인 종교에서조차도 모든 통상의 '기도'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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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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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느릿느릿 어렵사리 읽어내는 독서패턴으로 한권의 책을 성실하게 읽는 까닭은 그 책을 공들여 한자한자 적어 내려갔을 작가의 땀방울을 하나하나 담기 위해서이다. 책으로 말을 거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람에 세계 속에서 내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기대이리라. 때문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배신이었다. 일본어로 발행되어진 책이 특별히 번역되어 내 손에 쥐어졌을때에는 이유가 있을 법도 하건만, 슬프게도 이책에 닿을 수 있는 길을 나는 모른다.

의미를 잃어버린 기호의 언어.
역자가 후기에서 밝혔다시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개의 재료들은 시대 풍속에 너무 밀접하게 다가간 나머지 보편성을 지니지 않는 단어이다.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내게는 산만한 기호에 불과하고,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원래의 의미가 강하게 각인되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지식에 따라, 언어의 수용정도에 차이를 초래한다. 결국 ‘문장 안에 모든 언어의 의미나 이미지, 중요함과 가벼움이 왜곡되어서, 문장은 거기에 쓰여 있는 언어 이상의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만, 여전히 그 궁극의 무엇인가가 무엇일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상실의 공백과 몰입의 광기
애초에 기대했던, 어렵사리 추리한 결론은 이러하다. 이외수의 장외인간이 ‘달’을 유일하게 기억해내는 자를 중심으로 미친세상을 반추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야구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야구’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처절한 몰입으로 미친세상의 광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지만,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야구와 연계시키는 그들의 몰입은 너무나 태연하고, 야구 없는 세상은 별탈없이 안녕하시다. 왜냐하면 야구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행위의 조건이 될 이유도 없이 그저 우아하고 감상적인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즐기는 야구란 야구가 되고 싶은 캐치볼에 불과하며, 소설의 구성은 등장인물로 위장한 선수들의 경기내용으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야구가 중심에 있는 세상에서 진짜 현실의 단서는 아주 살짝 잠깐씩 스쳐갈 뿐이다.

그리고 대단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일본야구의 행방’

   
  ‘저 팬들은 응원에 열중하곤, 시합 쪽은 별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내 기우일까?’
‘리치, 네 말대로야. 아무도 시합 같은 건 보고 있지 않아. 시합 경과는 집에 돌아가서 ‘프로 야구 뉴스’를 보면 알게 돼. 모두, 응원하러 나온 거야.’ – p.183
 
   

‘한신 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다’는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있는 1985년 시즌에 대하여, 전쟁터화된 경기장의 선수 군인들의 신음소리는 제법 생생하다. 우승을 목전에 두고 홀연히 빗속으로 자취를 감춘 자들의 의외성에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야구가 아니다’라는 선언의 개연성이 숨어있다. ‘승리’를 위한 ‘승자 중심’의 야구는 그렇게 종적을 감춘다.

   
  “어쨌든, 나는 매일, 읽고 있어. 지금의 내 감상을 말하자면 말야, 야구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야.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어.” – p.208  
   


좌우지간, 야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믿음’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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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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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누구나 유년시절, 모종의 철조망에 저항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아이들의 일상은 실제로 온통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탐험 그 자체이다. 전자오락가 TV가 단단히 그들을 포섭하면서 아이들의 탐험 또한 비상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타고난 야성을 길들이려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학교의 거대한 훈육 밑에서 조금씩 힘을 잃고, "부노미과 선생님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고, 그 후엔 거리의 무수한 광고메시지가 주입하는 대로 "부자"가 되어 더 많이 "소비"하는 착한 자본주의자가 되는 일에 긴 줄을 설 때, 우린 비로소 "이제 철이 들었다."는 덕담을 듣는다. (p.5)  
   

 경계를 넘는 다는 것, 궤도를 따라 도는 것, 어느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유로운척 했지만, 마음 속 불안을 감당하기 버거웠고, 태연한척 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들에 안달냈다. 욕심이 없는 척, 조건에 연연해했고, 이미 이탈한 궤도를 찾아가겠다고 꾸역꾸역 시들어갔다. 나 말이다.

 목수정처럼 맘껏 자유로운 영혼. 거침없이 당당한 여인들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넌 왜 그렇게 찌질하냐고 물으시면, 아직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한다. 진심이다. 그리고 난 계속 이렇게 이상과 현실 어딘가에서 부유하게 될거라는걸 안다. 팔자다.

   
  우주 전체와 왕성하게 친구하며 지내는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릴 일이 없고, 천재적인 창조력을 무궁무진하게 발휘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하다. 아침에 칼리가 눈을 뜨고 서서히 세상과 다시 접촉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면,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무수히 금빛 조각들이 반사되면서 떨어진다. 그 광경은 언제나 생명의 눈부심을 일깨우고 이난의 신성을 투명하게 표출한다. 화분에 스프레이를 뿌릴 때는 "엄마, 꽃이 정말 맛있다고 했어."라고 말하고, 아가 변기에 떨어진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보고는 "엄마, 내 뱃속에 있는 하트가 똥으로 나왔나 봐."한다 (p.108-109)  
   

 인체의 신비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우주의 신비, 생명의 경이. 여성의 날을 선택해서 태어난 칼리를 주저없이 낳아 기르는 용기. 세상의 모든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창피해'란 단어를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 그녀처럼 거꾸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뚝심이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풍성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나조차도 자녀양육의 부담은 만만치 않아서, 칼리는 '프랑스 시민'이잖아. 라면서 스스로의 결정을 위로할 따름이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은 출산파업이기에.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 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다행이도 자기가 처음 파기 시작한 우물에서 계속 재미있는 게 나오면 좋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지조없이 연애도 많이 했고, 또 지조없이 여러 우물을 파면서 살아온 나한테는 언제나 이 경구가 마음의 짐이었다. 그걸 어느날 희완이 훌훌 떨치게 해주었다. 문학, 연극, 사진, 문화정책, 흙건축 참 난 너무 여러 우물을 파는 것 같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잠시 회의하고 있는 나에게 희완은 말했다.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거. 그리고 그걸 다 해볼 용기가 있다는 거. 그럼 너의 인생이 얼마나 풍요롭겠니." 오호, 그렇다. 관점을 전환하면 그렇게 된다.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한 영역씩 맡아서 한우물을 죽어라 파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수도 있다. 난 이 거대한 사회의 나사가 아니다. 나 혼자서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다. 여러 우물을 파면서, 세상의 모든 재미를 두루 즐기면서. ( p.163 )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하며 금융권 입사에 성공한 친구는 1년 한번 휴가를 기다리며 한해를 버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옹색한 꼬라지의 나는 아직 못이룬 꿈이 있다며 1년의 반을 딩가딩가거리고 있다. 이솝우화에서는 베짱이를 기다리게 추운겨울이라고 했지만, 개미는 과연 겨울에 쉴 수 있는걸까?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내게 주어진 삶을 악착같이 챙기는 거다.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고, 그리고 스스로의 길을 긍정하면서.

   
  "넥타이 속의 남자는 절대 사귈 수 없어!"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연애 불가 상대의 기준이었다. 그 필터에 많은 남자들이 무더기로 걸러졌다. 내가 보기에 이 사회가 남성에게 허락하는 모든 악행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람들, 단지 대세라는 이유만으로 우파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넥타이를 죽어라 매고 다녔다. 자신의 자아가 찌그러진 것도 모자라 가부장적인 위세로 세상까지 찌그러지게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도 넥타이를 소중하게 목에 걸어 매고 다녔다. 넥타이를 맨 대신 자유를 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 예술적인 감수성은 있는 사람인가? 삶에 대한 열정은 충만한가? 지적인 욕망과 그가 쌓아온 지식의 창고는 어느 정도인가? 어린시절 부모와 충분히 애정을 교감했는가? 정치적 지향은 어떤가? 사고와 행동은 얼마나 일치하는가? 머릿속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미적 감각이나 옷 입는 취향은 만족스러운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외모인가? '멋있다'는 형용사에 가까운 사람인가? ( p.253-254 )  
   

 나의 이상형은 줄곧 바뀌었다. 어린시절 언변이 화려하고 몸가짐이 거침없이 기세등등한 날렵한 외모의 사람을 연모했다면, 또 한때는 단순하고 소박하면서 수더분한 사람이 좋았던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 서로의 삶을 긍정하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마초의 경계를 살짝 넘어왔지만 차마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한, 깊게 사유하고, 따뜻하게 마음 쓰는 고운 사람이다.

 가부장제의 저격수를 자처하는 작가답게 결혼과 가정에 대한 비판은 통쾌, 상쾌, 유쾌하다. 우리의 취향이 구조조정 당하기도 했겠지만,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배우자의 조건 또한 무시해버릴 수 없기에 머뭇거리는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이중성을 확인할 밖에.

   
  최근 들어 깨달은 좌와 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며 깨어있는 존재가 좌파라면, 텔레비젼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영혼을 무덤 속에 파묻고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믿는 쪽이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p.290 )  
   

그런 전차로 나도 좌파였다.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휴일도 반납하고, 밤잠도 안 자는 파란지붕집의 사람들이 엄청 사고를 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될 수 없듯이.( p. 309 )  
   

현재를 즐기자는 명제는 관념상에만 존재할 뿐, 대개 미래에 저당잡힌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삶들이 태반이다. 그런 삶을 가엾다고 여기지도 못하고 오늘날의 밥그릇을 위협받는 것이 또 현실이다. 목수정은 옳았다. 우리가 거추장스러운 속박을 하나하나 벗어버릴수록 인생은 또 세상은 찬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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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1-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했어요.
너무 잘난 사람 이야기일까봐 아직 선듯 손이 가지 않았는데 후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요즘 간단하고 소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중입니다.
 
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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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첫문장이다. 지옥인줄 알면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대표적인 계급주의 작가답게 직유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계몽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계몽의 방식과 사회적 여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까닭에, 일본 서점가를 강타하고, 공산당원수의 증가에 일조했을 것이다.

 올여름 촛불집회가 아쉬웠던 까닭은 어렵사리 모아진 열망을 제대로 받아안아 실현할 정치집단이 없단 이유로 변화, 혹은 발전의 동력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화물연대가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반대한 파업으로 지지를 얻기는 했지만, 여타노동단체들에서 FTA관련 정치적 사안을 이슈로한 파업투표는 대개 부결된것으로 알고 있다.  엄격한 법적인 절차하에 집행된 철도공사의 파업이 '해고자 복직' '구조조정 저지'등 정치적 사안을 걸었단 이유로 멀리 타지에 계신 대통령이 몸소 '불법파업 엄정처단'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후쿠야마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운운하며 역사가 종말을 선언한지 10여년이 넘어가도 세상은 1cm도 희망도 보여주지 못한다. 나와 다른 삶의 조건하에 정서적 풍요를 만끽하는 프레시안의 북유럽 특집기사를 읽으며 겪어보지도 않은 사회주의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이때,  슬라예보 지젝이 가디언과의 인터뷰 말미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비밀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란다.

 여하간에, 프로문학의 전형. 여러모로 다양한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직유법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으로 별은 네개! 

   
 

 무전수는 다른 배의 교신 내용을 듣고, 그 어획량을 낱낱이 감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하쓰코호는 아무래도 다른 배한테 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독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어업노동자와 잡일꾼은 전보다 몇 배나 센 노동 강도에 직면했다. 언제나, 그리고 뭐든지 막판에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감독과 잡부장은 일부러 '선원'과 '어업노동자, 잡일꾼'이 서로 일을 놓고 경쟁하게 만들었다. 똑같이 게 잡는 일을 하면서, '선원한테 졌다'고 하면, (자기들이 돈을 버는 일도 아닌데,) 어업노동자와 잡일꾼은 왠지 똥이라도 씹은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감독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오늘은 이겼다, 오늘은 졌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진다고 하면서, 피를 머금은 듯한 나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날 하루 만에 오육십 퍼센트나 생산량이 늘었다. 그러나 대엿새 지나다 보면, 양쪽이 모두 맥 빠져서 일의 능률은 부쩍 떨어져갔다. 일을 하다가 자주 고개를 앞으로 떨어뜨렸다. 감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후려 갈겼다. 불시에 얻어맞은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들 서로 경쟁사앧로 여기는지,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했다. 잡담을 할 말한 여유가 없었다.

 감독은 이번에는 경쟁에서 이긴 조에게 '상품'을 주기 시작했다. 불에 잘 타지 않아 연기만 나던 나무는 다시 불이 붙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거야."

 감독은 이렇게 말하며, 선장실에서 선장을 상대로 맥주를 마셨다.  (p.72-73)

 
   

  친구 왈, 초등학교, 정교사와 기간제교사, 방과후 학교 교사의 공공연한 무시와 마찰이 빈번하고, 가르치는 내용도 뻔할텐데 은근한 서열이 존재하단다. 불필요한 경쟁, 노동자의 분화 1cm도 변하지 않고 세상은 반복되고 계속된다. 

   
 

 일본 영화는, 가난한 한 소년이 '낫토 장수', '신문팔이'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공장에 들어가 모범적인 직공으로 일하다가 특별히 등용되어 큰 부자가 되는 영화였다. 변사는 대사엔 없었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참으로 근면이야말로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이냐!"

 거기에 잡일꾼들은 '진지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어업노동자와 선원들 가운데 이렇게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거짓말쟁이! 그렇다면, 나는 벌써 사장이 돼 있어야 하잖아!"

 그러자 다들 크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저런 곳에선, 당신의 운과 힘을 모조리 쏟아부으라고, 되풀이,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회사로부터 명령받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회사 소속의 공장과 사무실을 비췄다. '근면'하게 일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를 보여줬다. (p.113)

 
   

 정치적으로 나쁜 드라마, 에덴의 동쪽.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에서 자수성가 인생역전 스토리는 패배감만 극대화시킨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개인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400여명의 인물을 선원과 어업노동자등 집단화시켜 서술한다. 처음에는 책읽는 진도가 더딘 까닭도 캐릭터화시킨 인물중심으로 소설을 읽던 습관탓이었다.  

   
 

 ".....들어봐, 가령 부자가 돈을 내서 만든 배가 있다고 치자구. 선원과 보일러공이 없으면 배가 움직일까? 게가 바다 속에 수억 있다고 하자. 만약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일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제아무리 돈을 냈다고 해도 게가 한 마리라도 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가겠어?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한여름 일해서 대체 얼마나 수중에 돈이 들어오겠어. 그런데 부자들은 이 배 한 척으로 사실상 손에 넣는 게, 사오십만 엔이라는 돈을 착복하는 거야. 자 그렇다면 그 돈의 철처인데, 무에서 유가 된거야. 알겠어. 모두 우리의 힘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죽을 듯한 우울한 얼굴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더욱 힘을 내자구. 갈 데까지 가면, 거짓말이 아니야. 저들이 우리를 더 무서워한단 말이야. 벌벌 떨지 마. 선원과 보일러공이 없었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아.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동전 한 푼도 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없어. 배를 사거나 도구를 준비하는 돈도, 마찬가지로 다른 노동자와 피를 짜서 벌어준 거야. 우리한테서 착취해간 돈이야. 부자와 우리는 부모와 자식 같은 거야..."(p.155-156)

 
   

 정답이다. 뭉치면 힘이 세다. 뭉/치/면

   
 

 덧붙이는 말 중 세번째,
 그로부터 감독과 잡부장 등은, 어기 중에 파업 같은 불상사를 불러일으켜서 생산량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저 충실한 개는 '무자비'하게 땡전 한 푼 없이 해고당하고 말았다는 것 - 어업노동자들보다 더욱 비참하게도! 재미있는 일은, "아아 분하다! 내가 지금껏, 젠장, 속고 있었다!"하고 감독이 절규했었다는 것.(p.179)

 
   

 가장 코믹했던 반전이다. 공장선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던 감독, 진짜 적은 내륙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데, 저항의 대상은 눈앞의 상대적(!) 권력자를 향할 수 밖에 없다. 그 역시 회사에 복무하는 충실한 개였을 따름이라는 것. 이용가치를 소진한 후에 무참히 버려진다는 것. 이 사회 비정규직의 무능함을 탓하는 잘난 정규직, 혹은 관리직이거나 경영직. 그들의 최후도 다르지 않을게다. 


 덧말 : 하얀표지의 해적판으로 게공선을 읽었다는 쫑원씨, 정녕 2000년대가 보장하지 않았던 출판의 성역이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물론,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과 함께 더불어살고는 있기는 합니다만. 게공선 정식발행을 기념하며 손수 타이핑한 책을 은밀하게 건네셨다는 선배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도 찍어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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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치 2012-07-2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되어있는것이 소설 내용에서 따온거라면 번역을 진짜 허술하게 했네요. 하쓰코호는 뭐냐. 핫코인데. 저따구로 번역해서 출간한다면 개나소나 번역가 되겠당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근현대교과서 논란이 한창인 요즘이다.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에 이어 검정교과서 시비까지 MB파시즘의 촌스러운 수작은 "모든 금지된 것을 금지하라"는 낡을뻔한 반항의식을 고취 및 진작시키니 되려 고맙기까지 하다.

 이런 시국인지라 박헌영의 담백한 일대기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노골적으로 새빨갛게 공산주의자로 격동의 시기를 살아냈던 까닭으로 역사에 기억되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제통치기간의 항일해방운동이야 지식인의 사명이었다 손 치더라도 해방이후 미군정 수장과 공식적인 회견을 진행하고, 진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한 핵심 지도자중 한사람에 대해 우리역사는 그 이름 석자 한번 제대로 알려준적이 있던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며 반탁운동의 입장을 견지했던 백범김구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환호하면서, 김구가 임시정부란 간판을 달고 안전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한반도 지하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독립을 위해 애쓰던,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았던 이정박헌영에게는 어찌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없다 할 것인가.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거세하고 반쪽짜리 역사만 바로세운다고 한들 그게 이 땅의 역사라 할 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하고, 그 이후에 스스로 판단하게 될, 그 결정이 뭐가 그리 두려워서 애써 부정하기 급급한지는 숨겨야 할 사람이 분명한 그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번의 결혼과 월북후 총살, 배다른 오누이의 드라마틱한 상봉까지 극적인 요소를 두루갖추고 있는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주변인물들의 증언과 객관적인 신문자료, 공문서의 기록등을 통해 서술자의 감정적 개입없이 기술된 건조한 글은 갖가지 형용사로 포장해서 인위적으로 강요하는 감동 이상의 울림이 있다. 인물의 무용담 위주로 개인을 미화시키는 위인전 방식은 실제 비범치 못한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시킬 따름이며, 과도한 영웅주의로 맹목적인 믿음을 추동하는 요소중 하나이다. 맨손으로 호랑이라를 때려잡았다는 북조선의 위대한 아바이 수령과, 그의 죽음앞에 통곡하는 인민들은 흡사 세상의 무너지는 날을 준비하는 종말론자들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건 이미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믿음의 광기일 따름이다. 이 책은 박헌영이라는 중간정도 성적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학생이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죽어가는, 그 시대에 대한 성실한 기록으로서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위인전에서 강제하는 교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에 대한 연민이 짙은 것도 책의 서술적 특징으로 가능했다.  

 박헌영을 아는 것과, 그를 따라 공산주의 혁명에 자신의 생애를 던지는 것은 구별해야 할 판단이다. 그가 실제 미제의 간첩이었는지, 우리는 추가로 밝혀지는 사실들을 통해 알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조금 더 면밀하게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며,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잊혀지고 묻어두고자 하는 약자의 역사일수록 우리의 역사관을 명료하고 분별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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