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 Himalaya, where the wind dwe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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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영화를 만든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고. 미친듯이 불어대는 바람때문에 통계상 정신병이 많이 발생하는 동네로의 '귀향'을 만든건 페도로 알모도바르였다. 그리고 히말라야에 바람을 주인공으로 찍은 이 영화의 감독은 전수일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였던가. '검은 땅의 소녀와'도 보기는 했다. 절망 그 이상을 말해주지 않는 예술영화의 불편함. 유머없이 건조한 삶을 응시하게 만드는 잔인함.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그가 인정받는다는 것과 별개로, 탐미주의적 영상미학을 구현한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그의 영화는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제목외의 사전정보는 없었으면서, 당연히 다큐라고 생각했다. '히말라야'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서사인데, 다른 수식이나 장식이 필요있으랴. 그 땅에 대한 오래된 로망으로 망설임없이 애매했고, 아침부터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은 달랑 세명.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생면부지의 사람들일지언정,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을 지언정, 그 자리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뻤다. 

 친절한 대사로 자상하게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주인공이 회사를 쫓겨난 기러기 아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거운 트렁크를 셀파에게 맡기고도, 끝내 고산증으로 쓰러져 나귀등에 실려 가는 주인공 '최'는 어쩌다보니 구두를 신고 히말라야에 올랐을 따름이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영상은 카메라만 올려놓으면, 명장면이 된다. 최민식은 그 위에 숟가락만 올려놓듯 그냥 서 있는걸로 충분했다. (물론 고산지대에서의 촬영이 쉽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만,) 내가 영화를 통해 견뎌야했던 그곳의 고요함과 평안에서 주인공 '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죽은자를 위로하기 위해 바람에 흩날리는 천조각과 달그락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푸차레, 손에 피를 묻히고 난 후에야 양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정직한 살생, '라카(?)'를 마시며 이방인에게 노인들을 위한 일이 있냐고 묻는 할아버지들하며, 도르지의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부인과 뜨거운 밤을 보낸 인증된 아빠의 등장까지, 말로 설명되지 않은 상황들이 존재자체로 이야기가 되었다. 

 딱 한장면, 짧은 영어로 도르지의 아들과 나눴던 대화가 있기는 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대로 기억해두지 못한게 아쉽지만, 저 산 너머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에서 카르마를 닦는다고 했던가. 최가 히말라야를 오르는 내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이끄는대로 흘러갔던 그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오고, 폐허가 된 한국 어느 골목에 버림받은 몰골로 꿈을 꾸고, 다시 도르지 아내의 보살핌으로 새로운 생을 얻게 될때까지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이 불어갔다. 바람이 분다는데, 그래서 그냥 살아갈 따름인데, 왜 당신의 결론은 '희망'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려 무엇할것이냐. 

 반복된다. 그 꼬맹이가 불던 피리소리마냥, 미묘한 변화에 애써 귀기울여주지 않으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한번도 가지 못했던 그 곳, 히말라야의 평화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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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죽어버린 그 네팔노동자는 그 좋은 땅 버리고 왜 이 험한 땅에 온것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걸 감수하면서까지 필요한게 무엇인가. 영혼을 잃은 기러기 아빠나 몸을 잃은 이주노동자나 왜 인생의 덕목은 인내와 헌신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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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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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챙겨먹임 당하는, 아들은 좋겠다.
 

  '모성은 본능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친구는, 친절하고 자상해서 천상 여자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인품을 겸비했더랬다. 국민 엄마 김혜자의 연기는 연기일까. 실제일까. 강명석의 인물분석에 의하면, 그는 모성애보다 연기욕심이 짙은 천상배우란다. 요즘 드라마 작가들은 엄마를 위해 '잘 다녀왔니? 밥을 먹었고?'라는 대사밖에 만들 줄 모른다며, 기꺼이 김수현의 뮤즈가 되어 뿔난 엄마로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 조차도, 김혜자의 모성성은 의심받지 않았다. 

 봉준호가 갈때까지 가는, 폭주하는 엄마를 그린다고 했을때 김혜자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상냥하고 자상하고 여리고 순수한 우리들의 엄마가 걱정스러웠던 탓이다. 마더에서 그녀는 눈동자를 이동하고, 손가락을 바르르 떨면서까지 온몸으로 연기했다. 이것이 40년 연기인생의 내공이었구나 감탄할 따름이었다. 

 왜 영화감독이 카메라 모델을 하는걸까 했더만, 이 아저씨 사진찍듯 영화를 만든다. 화면에는 필요한 요소들이 알맞게 들어가도록 구성되고, 전경을 담은 화면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맨하튼이란 술집 내부컷의 인물배치와, 진구와 대면하는 집안컷의 조명각도, 증거품 골프채를 입수하는 순간의 긴장된 편집이, 웰메이드 영화의 명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살인장소와 골프장, 보리밭, 진구집, 고물상, 심지어 교도소까지 꼼꼼한 헌팅의 노고가 그대로 묻어나 컷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마지막 고속버스신의 석양은 단연 압권이었다.  

 엄마는, 뭐 그러려니 한다.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빛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처연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억척스러움은 마냥 옹호받을 수 없는 광기가 있다. 그 사실을 봉준호가 부러 알려주지 않아도 알 법 하다. 

 하지만, 바보새끼.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라고 배운 바보 새끼는 오래된 박카스병만 기억하고, 엄마 없는 바보새끼는 칠칠치 못한 흔적으로 없는 죄도 뒤집어쓴다. 허벅지에 침을 놓고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고 한들, 쌀떡이란 슬픈 은어가 지워질리 있을까. 두부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불에 그을린 침통을 비밀리에 전한다고 한들, 진실을 알고 있었던 정직한 장사꾼의 죽음의 진상이 궁금할리 있을까.  

 정직한 리얼리티와 시대정신의 미덕을 갖춘 감독, 그의 차기작이 기대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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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엄마, 혹은 아줌마.

 명랑한 전화벨이 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던 그 엄마, 혹은 아줌마 덕분에 -1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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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텐 - Adrift in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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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오다기리 조는 미키 사토시의 뮤즈였던 모양이다. 
 
 일본배우로서는 흔하지 않은 바람직한 기럭지와 예쁜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오다기리 조는 '메종 드 히미코'이후부터 오랫동안 아껴왔지만, 미키사토시는 잘 알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수다와 재치로 긴장을 조율하고 기승전결을 엮어내는 영화가 감독을 궁금하게 만들지 않을만큼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였던 비추고 있었던 탓이다.  

 필모그래피를 본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 구미코의 카메오 등장과 엉뚱한 3인조 직장동료에서 '시효경찰'은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인더풀'과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발견한 순간 그의 영화들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일상적이지만 정상적이지 않(다고 평가되)는 존재에 대한 긍정, 특이한 만화 캐릭터를 연상시키지만 별다르게 특별하지는 못한 어중간한 삶에 대한 낙관. 권태로움이 사무칠때, 그래도 즐겁지 아니하냐고 묻게 되는 힘을 가진 영화들이렸다.

 네이버에서 '코미디'로 분류한 바, 나름의 유머가 가득하고, 포스터 본격도쿄산택무비라고 규정한 바, 아름답게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일본의 골목과 사람냄새가 가득하다. 제목을 '텐텐'이라고 명명하는 바, 굴러가고 돌아가며 과거의 기억의 기억과 꾸며진 행복을 '전전'하는 내용이다.

 키시베 잇토쿠를 만나니 진짜 행운이 있었다. 시부야 엄마 덕분에(!) 후쿠하라와 재회할 수 있었고, 롤러코스터도 타고, 동물원에서 하마도 보고, 맛있는 카레도 먹었는데, 그 모든 찰나의 시간들이 행복했으면 그 뿐. 그가 날 버린 아빠냐고 알아서 무엇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양말 악어 오려붙인 라코스테 티셔츠와 '어떻게 먹고 사냐'는 질문에 무술로 응수한 시계방 할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실실 쪼갤만한 에피소드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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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이 있고, 고아가 있는데, 한없이 밝은 영화.

 우리나라 영화는 어째 이리 한없이 무거운가.

 -1점은 엔딩크래딧후의 결정적인 장면을 생략한 상영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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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 Vicky Cristina 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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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힐 수 없다며, 출판되지 않을 시를 쓰는 할아버지. 만큼이나 줏대있는 할아버지 우디알렌의 대중적인 영화란다. 내 취향이 대중성을 획득하는 것일까. 말랑말랑 발랄명랑한 로맨스가 심금을 울려주시는, 바야흐로 봄인게다. 
 
 일대일 연애관계에 익숙한 우리풍토에서 평화로운 삼각관계가 웬말이냐. 싶겠지만,
 그래서 영화가 아니겠는가. 현실의 문제로 닥치기 전에 필요한 가상 시뮬레이션.

 '아내가 결혼했다'만큼 질척거리지도 않고, 꽤나 설득력있게 연애한다. 물론, 한국이 아닌 '유럽'의 문화적 풍토하에 가능한 설정이다마는. 게다가, 결혼이 아니라 '연애'니까 가능한 해피엔딩이다마는. 해피엔딩이라고 해봐야 결국 그들은 그냥 그렇게 계속 또 살았습니다. 이지만서도.

 원작 제목 그대로 주인공은 세개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안정적인 남자와 결혼해서 평화롭게 살고 싶은 비키와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감정에 충실한 연애주의자 크리스티나가 중심을 잡는 핵심인물이다. 이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는 스페인 화가와 그의 부인 마리아는 아무래도 조연이다. 그래서 페넬로페 크루즈가 아카데미에서 받은 상이 여우조연상이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따위 포스터라니. 쩝.

 다시 본론으로, 여행지에서 싹트는 로맨스라는 공식은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에서 차용되고 있는 바, 바르셀로나라는 공간은 사랑이 무럭무럭 솟아나기에 부족함이 없어서 나를 충동질하신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가우디의 예술작품이 솟아있고, 카탈루냐 전통기타의 선율이 흐른다. 낭만과 열정의 땅, 바르셀로나에서 연애를 꿈꾸지 않은자. 유죄렸다.

 논문쓰는 비키는 안정적인 직장인과 약혼중인지라 처신을 단정히 한다.

 그랬던 비키가 자유로운 스페인의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혼남과 못잊을 밤을 보낸다. 평소처럼 이성적이지 못한 불장난이었다. 라고 하기에는 그에 대한 마음이 한순간의 쾌락으로 끝내버릴 종류도 아니었던것이 문제인게다. 총으로 피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흔들렸다. 

 영화찍는 크리스티나는 그림그리는 이혼남의 도발적인 대쉬에 적극호응한다.

 그랬던 크리스티나였기 때문에, 사랑은 거칠것이 없었다. 유럽 예술가들과의 교류로 풍부한 영감을 받고 스스로의 사진에 용기를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혼남의 전부인과 더불어 평화로운 삼각구도에 균형을 잡아서 너무너도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때, 돌연 결별을 선언한다. 불만도 없고, 갈등도 없었다. 어느순간, 불쑥, 뜬금없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생각할때 빠르게 결단을 내리는 성격일 따름이라고 했다. 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충동이 너무 잘 이해되는거다. 대부분 이성적이지만, 가끔 충동적인 내 결정들의 축적이 나인 까닭이다.

 세여자와 연애하는 매력적인 이혼남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일단, 처음 본 사람에게 '눈동자가 무슨 색깔이죠'라고 물으면서 1박2일 여행을 제안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예술적 뮤즈가 되어준 전부인 마리아가 아플때는 보호자를 자처했지만, 크리스티나를 위해 영어를 사용하라고 종용할만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완성되지 않은 사랑이 로맨스로 남는다'며 뿔난 여자를 다독일 줄 알았고, 뽀인트는 매순간 만나는 여인에게 진실했고 충실했다는데 있다.

  이 영화가 주말내내 날 달뜨게 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서 내 양면성을 발견했던 탓이다. 안정되고 싶어도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고, 무작정 감정에 몰입하려니 자꾸 주춤거리는 내 꼬라지가 보였다.

 과시적 소비로 위로하고, 돈벌이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지겨운 인생의 시시함과 욕망에 부응하고, 자극을 즐기면서 예술과 정치를 논하는 아찔한 젊음의 권태로움.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올걸 알면서도 인생의 한페이지. 우리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게 바람이건, 실수이건, 사랑이건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던가에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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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따위 '도발적'인 제목과 포스터로, 엄연한 주인공 비키의 비중을 축소시킨  국내배급사의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들어 -1점. 

 그러고보니, 스칼레요한슨의 작품은 언제나 타이틀 번역이 문제.
 진주 귀고리가 아니라 귀걸이를 한 소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고 번역된 Lost In Translation까지.
 스칼렛 요한슨이 무슨 죄겠냐마는.

 그리고 덧말 하나. 남자 주인공 하비에르 바르뎀. 처음에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자. 두번째는 '씨인사이드'에서 존엄사를 희망하는 전신마비환자. 세번째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매력적인 화가. 하나같이 내가 원츄하는 필모그래피. 페넬로페 크루즈와 연애중이란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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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Th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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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을 만들어 오라'는 자녀의 학교 숙제에 '아님 말고'라는 네글자를 적어줬다는 아버지. 나는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가 있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이고, 성기노출따위로 마케팅하는 대중영화이며, 영화제의 사랑을 받는 예술영화를 만든다. 영화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포기하는게 없으면서, 시크한척 하기는. 

 여하간에 그는 모름지기 '영화란 이런것이다'라고 정답같은 영화를 만든다. 비유와 상징, 은유가 조밀하게 짜여져있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기자들의 연극같은 연기를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현실에 없을듯 있을듯 기묘한 공간을 꾸미고, 들릴듯 말듯 몽롱한 음악을 입혀서 영화는 창조적인 종합예술로 완성된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에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광기어린 연기, 유혈이 낭자한 폭력 자체의 거부감때문인줄 알았다. 하지만 거부감의 실체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치달리는 영화적 완전성 때문이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해가 가능한, 또 필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영화를 기대하고 챙겨 보게 된다. 아니 챙겨 읽게 된다. 

 박쥐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멜로영화로, 혹은 종교영화로, 컬트영화로 읽기도 하지만, 굉장히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날짐승과 들짐승도 아니었던 박쥐와 마찬가지로, 순교와 자살, 욕망과 금욕, 삶과 죽음, 많은 것들이 경계위에 서서 흔들린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공간 '행복한복집'은 (태주에게) 지옥이었다가, (물의 저주가 있는) 지옥이 되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지옥이기도 했다. 상현은 죽을 각오로 찾아가던 엠마뉴엘 연구소에서 살아났고, 살아서 일출을 보고 싶던 노신부는 죽었다. 상현은 자살이 죄악이라고 했지만, 자살한 자들의 피로 연명했고, 그 역시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의 피를 먹으면서, 그가 배고픈자들을 돕기 원한다고 변명했고, 강우를 물속에 묻으면서 죽을 만한 짓을 했다고, 태주를 탐한 욕망은 합리화되었다. 

 영화에서 빈번하게 차용되는 욕망의 상징적 심상은 '물'이다. 상현이 끊임없이 마셔야 하는 '피'는 그에게 생명수이기도 했다. '피'의 시각적 활용은 노신부가 마시는 '포도주'와 다르지 않았고, 살아있는 라여사도 늘 '보드카'를 마셨다. 강우는 저수지의 '물'을 과다섭취해서 죽었을테고, 태주와 상현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바다의 붉은 물결은 피처럼 출렁거렸다. 중학교 국어시간. "물이 무엇을 상징하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답은 '생명'이었다.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 엄마뱃속 '양수'인 까닭이라나 뭐라나. 물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것 같기도. 여하간에. 

 송강호는 역시나 송강호였고, 김옥빈은 의외로 김옥빈이었다. 연말 시상식에 좋은 일 있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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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하나는 깐느에서 채워주시려니 하면서. 별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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