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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근현대교과서 논란이 한창인 요즘이다.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에 이어 검정교과서 시비까지 MB파시즘의 촌스러운 수작은 "모든 금지된 것을 금지하라"는 낡을뻔한 반항의식을 고취 및 진작시키니 되려 고맙기까지 하다.
이런 시국인지라 박헌영의 담백한 일대기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노골적으로 새빨갛게 공산주의자로 격동의 시기를 살아냈던 까닭으로 역사에 기억되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제통치기간의 항일해방운동이야 지식인의 사명이었다 손 치더라도 해방이후 미군정 수장과 공식적인 회견을 진행하고, 진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한 핵심 지도자중 한사람에 대해 우리역사는 그 이름 석자 한번 제대로 알려준적이 있던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며 반탁운동의 입장을 견지했던 백범김구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환호하면서, 김구가 임시정부란 간판을 달고 안전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한반도 지하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독립을 위해 애쓰던,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았던 이정박헌영에게는 어찌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없다 할 것인가.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거세하고 반쪽짜리 역사만 바로세운다고 한들 그게 이 땅의 역사라 할 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하고, 그 이후에 스스로 판단하게 될, 그 결정이 뭐가 그리 두려워서 애써 부정하기 급급한지는 숨겨야 할 사람이 분명한 그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번의 결혼과 월북후 총살, 배다른 오누이의 드라마틱한 상봉까지 극적인 요소를 두루갖추고 있는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주변인물들의 증언과 객관적인 신문자료, 공문서의 기록등을 통해 서술자의 감정적 개입없이 기술된 건조한 글은 갖가지 형용사로 포장해서 인위적으로 강요하는 감동 이상의 울림이 있다. 인물의 무용담 위주로 개인을 미화시키는 위인전 방식은 실제 비범치 못한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시킬 따름이며, 과도한 영웅주의로 맹목적인 믿음을 추동하는 요소중 하나이다. 맨손으로 호랑이라를 때려잡았다는 북조선의 위대한 아바이 수령과, 그의 죽음앞에 통곡하는 인민들은 흡사 세상의 무너지는 날을 준비하는 종말론자들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건 이미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믿음의 광기일 따름이다. 이 책은 박헌영이라는 중간정도 성적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학생이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죽어가는, 그 시대에 대한 성실한 기록으로서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위인전에서 강제하는 교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에 대한 연민이 짙은 것도 책의 서술적 특징으로 가능했다.
박헌영을 아는 것과, 그를 따라 공산주의 혁명에 자신의 생애를 던지는 것은 구별해야 할 판단이다. 그가 실제 미제의 간첩이었는지, 우리는 추가로 밝혀지는 사실들을 통해 알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조금 더 면밀하게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며,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잊혀지고 묻어두고자 하는 약자의 역사일수록 우리의 역사관을 명료하고 분별있게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