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오늘의 어린이책 1 - 다움북클럽이 고른 성평등 어린이·청소년책 2019-2021 오늘의 어린이책 1
다움북클럽 지음 / 오늘나다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함께 배우고 나누고 싶었는데,
그 길에 함께할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를 만난 느낌입니다.
매년, 아기가 자라는 만큼, 세상이 변하는 만큼,
함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덕후 엄마의 태교용 소설로 선택했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창 말랑말랑하던 청소년기, 장장 12년의 신앙생활을 제법 신실한 마음으로 임했는데도, 막상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내가 주로 좋아하던 것은 예쁘고 착한 이야기 가득한 시편이었고, 호기심으로 제법 열독했던 요한계시록정도. 
 
 김규항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게 '예수전'이라길래 무척 흥미로웠다. 치기어린 스무살의 눈에도 교회의 출석자체는 하나님의 뜻과 크게 상관이 없음을 깨닫기 어렵지 않았으나, 따르고 배워야 한다는 예수님 삶,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물론, 그 안에서 답을 구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탕아의 변명일 뿐이다. 그저 전도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나는 늘 조직사업에 취약했다. 이제 그저 다만 성향이라고 정리한다. 
  
 여하간에,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장로를 위시한 몇몇 기독교인들의 지극한 나라사랑이 오늘날 이 지경을 만들었다는 짙은 한숨을 거두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치면서, 애먼 예수님까지 욕먹이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은 열독의 가치가 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그 실천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p.66)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마몬"은 아람어로 '물질적인 부'를 뜻한다. 물론 사람이 현실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물질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을 갖지 못한 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물질을 도외시하라는 게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날 때부터 마몬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누구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한 적당한 물질을 바라지만 그 '적당한 물질'의 수준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래서 어느새 저도 모르게 마몬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몬은 사람을 직접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식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줌으로써,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치게 만든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고결하고 금욕적인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해치는 일을 경고한다.(p.101)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중세의 암흑을 무너트리는 훨씬 더 어려운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덕에 그들 스스로가 법적인 차원에서나마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실은 그들이 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제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 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p.112-113) 

 

 우리는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핌으로써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며 냉소한다.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다위의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p.119)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누구나 수긍할 만한 지당하고 단순한 이치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조화는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이를테면 20세기에 '영성 없는 혁명'에 빠져들었던 수많은 투사들은 제 영성의 빈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정반대의 편향에, '혁명 없는 영성'에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밖의 적은 허상일 뿐이다!'라고 외친다.

 먹고사는 데 절박하지 않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정한 안정을 가진 그들에게 밖의 적은 허상이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밖의 적에 의 해 삶을 위협받는 수많은 사람들, 도무지 내 안을 되돌아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허상이려야 허상일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적이 밖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도 있었다. 나는 절반의 쌍무만 해 온 셈이다. 두 가지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정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p.123)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이 삶을 만든 게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사실, 개념이란 우리 삶과 세계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이치를 표현하는 언어적 약속일 뿐,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는 아니다. 물론 개념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걸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어설픈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보듯 개념이 곧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인 양 오해하여, 그 개념이 다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념의 체제에서만 관념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개념이 없이도 혹은 개념을 몰라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에 이미 충만할 수 있음을 예수는 보여 준다.(p.138)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이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p.187)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내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 밖에 없다.(p.204)
 

 

그나저나, B급 좌파를 자처하는 이 사람, 덕분에 난 감히 좌파를 엄두도 못 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게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헌법 제9조 있어 전쟁방기는 군사적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와 같이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P.225)  
   

  내면적 감정의 소요에 천착하는 말랑말랑 글들에 빠져있던 가운데, 동발검의 의지로 읽은 가라타니 고진이다. 이제 차마 국가나 자본주의같은 거시담론을 논하기 민망할만큼이나 사회과학으로부터 멀리 와버렸지만, 한때는 소설보다 재밌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던가. 한참을 신나게 읽고 내려진 희망찬(!) 결론에 실소가 터졌다. 서둘러 출판일을 확인했더니, 2006년이다. 아니, 2003년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고, 도쿄의정서를 탈퇴한 '미국'의 결단을 보면서도 '자본'과 '네이션'의 '국가'가 '어소시에이션'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대항적 이념의 견제없이 신자유주의로 돌진하는 21세기에 이념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소시에이션을 상정할 수 있다. 이건 노암 촘스키의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좌표에 존재하며 프루동의 아나키즘과 맑스의 사회주의가 결합한다. 자본과 네이션(통상 민족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국가가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세계공화국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매듭을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방법은 다음과 같다.   

 1부 교환형식에서는 신자유주의국가하에서 화폐와 상품으로 통칭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복지국가에서 행해지는 탈취와 재분배, 국가사회주의 하에서의 증여와 답례를 협동조합적, 유기적 공동사회의 '교통'으로 포섭한다.  각체제별 교환양식은 각각 지배적인 시대가 존재했지만, 하나만 떼어내서 다룰 수는 없으며, 각 좌표평면 외부로부터 대항하지만 사회구성에 함께 내속하고 있다. 상품교환이라는 위상에서 생겨난 자유로운 개인 위에서 호수적 교환을 회복하려고 하는것. 이것이 어소시에이션의 방식이다.  

 2부 세계제국은 원시사회, 봉건국가를 지나 '국가'의 기운을 탐색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떠올려야 한다. 국가를 가자가 그들의 자연권을 한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사회계약말이다. 뽀인뜨는 이 계약이 폭력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민이라는 주체는 절대주의 왕권에 복종하는 신하로서 형성된 것이며, 주권자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의해 폭력적인 '자연상태'가 사라진다. 원자화된 개인의 뜻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주권자에 대한 복종으로 안녕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화폐와, 신용, 유통과 교역에 관한 중요한 지점들이 설명되지만, 절대적인 취향의 문제로다가 인상적이었던 몇가지. 

   
 

 화폐축장자는 이런 '질권'을 축적하기 위해 실제 사용가치를 단념하는 자인 것입니다. '황금욕'이나 '치부충동'은 결코 물건(사용가치)에 대한 필요나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전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물질적으로 무욕인 것입니다. 정확히 '천국에 보물을 쌓기'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욕망이 없는 신앙자처럼 말입니다. 

 자본가는 합리적인 수전노입니다. 즉 상인자본 운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수전노의 축적충동(화폐 페티시즘)과 같습니다. '합리적 수전노'로서의 자본가는 자본을 증식하기 우해 무리하여 유통 속으로 뛰어듭니다. (p.89 )

 
   
   
   예언자 종교는 이런 주술을 부정하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주술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신 예배'가 아니라 '신 강제'이고 신에의 호소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즉, '받기 위해 준다'라는 것이 넓게 고루 미치고 있는 그 근원적 특질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모든 종교에 갖추어져 있다. '차안적인' 외면적 재화를 피하고 또 '차안적인' 외면적 이익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이런 것이 가장 피안적인 종교에서조차도 모든 통상의 '기도'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산다는건 정치요, 예술이라고. 몇년동안 대답하던 레파토리가 있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살아내는게 내게는 정치투쟁이요 예술활동이므로 부끄럽지 않게 삶을 창조하리라! 뭐 이런식의 대답을 마련했더랬다.

 고미숙의 내공에 '그린비'의 기획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공부'량'은 많아졌으나 '공부'의 알맹이를 잃은 이시대 청년들에게 '공부'의 맛과 '공부'의 힘을 전해주는 학습 지침서.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실용적이고, 출판시장의 70%를 차지한다는 학습지코너와는 불화하고, 서점에서 발에 채이는게 뻔할뻔자의 인생지침서라고 했을때 단연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평균학력은 높아져도 교양수준은 하향평준화되는 서글픈 현실. 활자중독증인 나야 내가 좋아서 책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만, 활자기피증인 친구들에게는 영상매체도 학습매체려니 인정하고 독서편력을 활자에 대한 취향의 문제로 간주했더란다. 그런데 고미숙씨가 아니랜다.

 책을 읽으란다. 나는 고전 한장 넘기는데 하루가 걸리는데 고전을 읽으랜다. 소리 내어 암송하란다. 내 소리를 감당할만한 만만하고 넉넉한 공간이 없음을 핑계삼아보지만 온몸으로 공부하란다. 사람들 앞에서 구술하란다. 수다는 자신만만하지만 발표는 영 어눌할지라도 끊임없이 소통하란다. 앎의 꼬뮌을 조직하란다. 유유상종이라고 독서모임 하자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일상에서 공부하라. 더이상 '공부'를 핑계로 학교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갈길이 멀다. 내 짝꿍의 말마따나 '이르다고 느긋해 하지 말고, 늦었다고 체념말'아야 할 일이다. 배움은 계속될 터이니 지금부터 시작해도 될 일이다.

 운동권스러운 간판탓에 더이상의 재생산은 없다고 여겼던 동아리에 후배가 들어왔다. 그가 이 공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꿈꾸며 실천적인 삶의 투사가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바친다.    

 

 - 밑줄긋기 -

 멕시코 신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멕시코 원주민들의 조상은 옥수수신이란다. 옥수수신들이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 신들은 질문을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질문하면서 걷고, 걸으면서 질문하기로 결정했다. 걸으면서 질문하기! 요컨대, 신들이 지상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질문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평생 남이 제출한 질문지에 답을 쓰느라 바쁠 테니까. 그건 실로 청춘에 대한 모독이자 삶을 노예화하는 지름길이다. - p.7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 -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에서

 즉, 노동과 여가, 정치 활동과 가정생활 등 삶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버린다. 결정적으로, 그럼으로써 공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학교식으로' 재편한다. 그 결과 전 사회를 '학교화'한다는 것. ...... 자격증 및 학벌, 경쟁을 강요하는 공부, 입시지옥 - 이런 것이 나쁘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안다. '공부'하면 동시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 - 지겨운 노동, 참고 견뎌야 하는 과정, 족집게 도사, 성적의 비결, 성공하면 남을 지배할 수 있고 실패하면 영원히 무릎 끓고 살아야 하는 것 등등 - 은 모두 그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이런 공공연한 것들은 차라리 덜 위험하다. 누구나 그게 틀려먹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이런 표면적 폐해보다 더 심각한 건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무의식적 전제들이다. 그것들은 아주 보편적이고 심오한 진리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학교가 세상에 퍼뜨린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새빨간 거짓말에. 사람들을 아주 '체계적으로 그리고 일생 동안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기 전엔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고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새빨간 거짓말들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일이다. p.32-34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전혀 다른 욕망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 뭐 이런 것들이 창의성의 진짜 의미에 값한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에 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은 사람마다 스스로 몸을 돌볼 능력을 터득하여 '병원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공부로 축제를 열면 어떻게 될까? 가족이 해체된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등등. 사람들은 다들 머리 싸매고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다. 넓은 아파트에 아이들 교육에 노후대책까지 몽땅 혼자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더불어 함께 해결한다고 생각해보라. 일단 기본 비용이 반의 반도 들지 않을 뿐더러, 함께 살면 먹는 거나 입는 것이 몇배로 풍족해진다. 또 굳이 노후 대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함께 노년을 보낼 친구가 있는데, 무슨 대책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의기투합하는 친구가 있느냐인데, 바로 어릴 때부터 이걸 훈련하면 된다는 것이다. 의리, 우정, 신의 - 창의적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가치를 몸에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p.66-67

 코뮌에 접속하는 능력은 달리 말하면 코뮌을 조직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난 1980년대, 그 엄혹한 시대에 대학이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학생회관을 부글부글 끓게 했던 학습 동아리들 때문이었다 그때는 누구든 대학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동아리와 접속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경찰의 탄압과 학교 측의 징계, 그리고 가난한 부모님의 기대, 그 어떤 것도 그 욕망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억압도 방해도 없건만 모든 학습망은 와해되어버렸다. 현장의 역동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화려한 건물, 촘촘한 학사관리, 제도적 시스템이 그 공백을 메워버렸다. 그 결과 모든 학교가 리모델링에는 성공했지만, 학생들은 스승도 없고 친구도 없이 그저 죽은 지식만을 재생산하고 있다. p.86

 낭송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소리를 통해 몸의 안과 밖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집합적이다. 즉 혼자서 할 때조차 그것은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소통에의 욕구가 없이는 낭송이 불가능하다. 사람들 앞에서 하거나 혹은 여러 사람고 ㅏ더불어 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큰 소리로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기의 목소리만큼 낯선 것이 없다. 실제로 녹음을 해서 들어보면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곧 목소리야말로 내 안의 타자인 것이다. 따라서 낭송이란 일상적으로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집단적으로 암송을 하노라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도 터득할 수 있다. 즉, 목소리에도 개성과 표정, 색깔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에 대해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목소리와 타인의 목소리가 뒤섞일 때 전혀 다른 종류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지식과 몸의 소외가 극복된다. 소리를 내려면 두뇌보다는 몸이 적극 반응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낭송을 한다는 건 체력과 기운의 분포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 앎의 신체성! 이것이야말로 학교식 공부가 망실해버린 원리가 아니었던가 - p.94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의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눈에 안경이니, 눈에 콩깍지가 씌었느니 하는 말이 다 거기에서 연유한다. - p. 113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웬 인문학? 그가 보기에 빈밀들이 겪는 박탈감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빈민들에겐 그저 재활 교육이나 직업과 관련한 공부만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어설픈 동정심이거나 감상적 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 박탈당한 것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식적 자산이었다. 한 번도 지적 풍요로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늘 충동에 내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범죄와 마약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얼 쇼리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빈민운동이란 빈민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탐색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그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이상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당당하게 정치적이고 공적인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p.121

 고전이 말하는 공부법은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학습하고, 지식.기술.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서로 도와주는 순간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망 형성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일리히, 학교없는 사회』라는 '탈학교'의 전망과 아주 행복하게 조우한다. - p.146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9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