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훈을 만들어 오라'는 자녀의 학교 숙제에 '아님 말고'라는 네글자를 적어줬다는 아버지. 나는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가 있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이고, 성기노출따위로 마케팅하는 대중영화이며, 영화제의 사랑을 받는 예술영화를 만든다. 영화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포기하는게 없으면서, 시크한척 하기는. 

 여하간에 그는 모름지기 '영화란 이런것이다'라고 정답같은 영화를 만든다. 비유와 상징, 은유가 조밀하게 짜여져있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기자들의 연극같은 연기를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현실에 없을듯 있을듯 기묘한 공간을 꾸미고, 들릴듯 말듯 몽롱한 음악을 입혀서 영화는 창조적인 종합예술로 완성된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에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광기어린 연기, 유혈이 낭자한 폭력 자체의 거부감때문인줄 알았다. 하지만 거부감의 실체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치달리는 영화적 완전성 때문이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해가 가능한, 또 필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영화를 기대하고 챙겨 보게 된다. 아니 챙겨 읽게 된다. 

 박쥐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멜로영화로, 혹은 종교영화로, 컬트영화로 읽기도 하지만, 굉장히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날짐승과 들짐승도 아니었던 박쥐와 마찬가지로, 순교와 자살, 욕망과 금욕, 삶과 죽음, 많은 것들이 경계위에 서서 흔들린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공간 '행복한복집'은 (태주에게) 지옥이었다가, (물의 저주가 있는) 지옥이 되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지옥이기도 했다. 상현은 죽을 각오로 찾아가던 엠마뉴엘 연구소에서 살아났고, 살아서 일출을 보고 싶던 노신부는 죽었다. 상현은 자살이 죄악이라고 했지만, 자살한 자들의 피로 연명했고, 그 역시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의 피를 먹으면서, 그가 배고픈자들을 돕기 원한다고 변명했고, 강우를 물속에 묻으면서 죽을 만한 짓을 했다고, 태주를 탐한 욕망은 합리화되었다. 

 영화에서 빈번하게 차용되는 욕망의 상징적 심상은 '물'이다. 상현이 끊임없이 마셔야 하는 '피'는 그에게 생명수이기도 했다. '피'의 시각적 활용은 노신부가 마시는 '포도주'와 다르지 않았고, 살아있는 라여사도 늘 '보드카'를 마셨다. 강우는 저수지의 '물'을 과다섭취해서 죽었을테고, 태주와 상현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바다의 붉은 물결은 피처럼 출렁거렸다. 중학교 국어시간. "물이 무엇을 상징하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답은 '생명'이었다.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 엄마뱃속 '양수'인 까닭이라나 뭐라나. 물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것 같기도. 여하간에. 

 송강호는 역시나 송강호였고, 김옥빈은 의외로 김옥빈이었다. 연말 시상식에 좋은 일 있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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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하나는 깐느에서 채워주시려니 하면서. 별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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