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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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그녀가 특별히 80년대 대학이야기에 감응하는 이유를 모를리없다. 심지어 21세기에 대학을 다녔던 나조차 학생운동의 끝을 잡고 바둥거리지 않았던가. 

 과거의 향수를 안주삼아 추억할 뿐, 사교육과 주식에 몰두하는 꼬라지가 시대의 절망만을 보여주고 있을 때, 노골적으로 그 시대의 찬란한 무용담이 짜증스러워지는 찰나, 무리들의 한켠에서 조용히 사색하던 작가가 묘사하는 1980년대를 만났다. 정여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예리한 지성과 따스한 멜랑꼴리가 불안하게 공존한다'

 어쩌면 20대가 그러려니. 의기탱천한 혈기로 팔뚝질을 하거나. 적당한 포지션를 찾지못하고 우왕좌왕 우물쭈물 엉거주춤 그렇게 흘러가거나. 그 많은 일들이 한가지 통로로 수렴했을 때조차 의연한 어른인척 흉내내는.  

 늘상 대오 중간에서, 혹은 행렬을 이탈에서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던 까닭에, 그녀의 주춤거림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별히 아버지와의 낮술과 연애의 기승전결이 마음에 감응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난 주말은 특별히 애틋했고, 또 덕분에 진보신당 헌책방에 기증된 5권짜리 아라비안나이트를 덜컥 구입해버렸으니, 20대가 가기전에 꼭 읽어보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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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이름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듣는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p.23) 

 여전히 기만에 찬 감상을 못 버린 나는 내 눈물이 장갑으로 따귀를 맞은 모욕감에서 솟구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진정 내 눈물의 의미는 그런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눈빛에 어떤 감정을 담을 수 있고 상대방이 눈빛을 통해 그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전경과 나는 그 순간 진정 눈빛으로 교감했던 것이다. 전경을 바라볼 때의 내 눈빛에는, 비록 불타는 적의를 담으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실제의 내 눈빛에는 애원과 공포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전경은 그것을 제대로 읽었던 것이다. 내 속에 있던 약아빠진 계집애가 내 눈초리에 그런 얄궂은 색칠을 했고, 꼬리를 내린 강아지같이 샐쭉 내려앉은 내 눈을 본 전경은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냐는 심정으로 곤봉이 아닌 가벼운 가죽장갑으로 나를 따끔하게 혼내주었던 것이다. 종태가 아픔을 못 이겨 울었다면 나는 모욕도 울분도 아닌, 분노도 치욕도 아닌, 단지 비굴한 감사를 못 이겨 울었을 뿐이다. 내가 이런 연유로 운다는 걸 종태나 해수가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예전에 해수의 차돌멩이 같은 몸 뒤로 내 길쭉한 몸을 숨겼듯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122 

 

 이야기는 진정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치유했는가? 나를 치유했는가?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로터스 꽃이다. 셰에라자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이것 좀 들어보세요' '저것 좀 들어보세요' 맛깔스럽게 권하면서 무한한 괄호의 연쇄 속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빨아들인다.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임시로 치유하는 장치이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내 과거의 불행도 그다지 엄청난 것은 아니로군,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끄덕이는 순간에 불행했던 왕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속의 한 불행으로 환치하고는 거리를 두고 그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신의 불행이 그의 불행의 최대치이자 요약이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딛고 일어설 기운을 주는 동시에 그 해결방식의 극단성을 초래했다면,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의 진기담과 불행담과 모험담은 그의 불행을 다양한 제반 인간사의 지평에 올려놓고 이러저리 재고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고 따라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을 인간적으로, 즉 문명적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강렬한 이미지, '오, 나의 사우드 님' '나를 후련하게 해줘요'라고 외치는 여자들의 쟁쟁한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최대 매력은 여기에 있다. 마신의 불행이 샤푸리야르 왕의 불행을 위로하면서도 가슴 저미게 상기시키는 불행의 심연이었던 반면에, 셰에라자드가 해주는 이야기 속의 불행들은 인생이라는 양탄자가 휘감을 수 있는 무한한 불행들의 너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깊이를 길이로 바꾸는 날렵하고 미적인 범주 넘나들기, 이미지의 깊이로 시작하여 서사의 길이로 끝나는 것, 심도에 대해서 연장으로 대답하는 것, 불행한 의식의 심연을 무한하고 다양한 서사의 미로로 봉쇄하는 것, 길을 잃게 만드는 것 칼을 묻었던 곳을 잊게 만드는 것. 

 『아라비안나이트』의 표면적인 질문과 대답은 방종에 대한 정숙으로의 보상이다. 그러나 이 가짜 문답 뒤에 숨은 것은, 시와 소설, 이미지와 서사, 일탈과 치유, 광기와 문명의 문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물한 살의 나는, 이 심오한 문담 속에서 진정한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낮술처럼 값싼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173-174 

  

 사변적인 자들은 말한다. 의심하는 순간 사랑은 완성된다고. 회의에 빠졌을 때 비로소 사랑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고. 사랑에 대한 믿음은 한갓 베일 뒤를 보지 못하고 베일 위의 그림만을 보는 허약한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철학적인 논객들의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랑의 정수나 실체에 관련된 진리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사랑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사랑은 확실성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애의 행복감도 사랑의 확실성이 일상 속에 용해되어 더이상 아무 새로움도 환기하지 않는 불행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가 자세를 조금 바꾸었을때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고 짧은 행복감이 찾아들듯, 우리는 연애의 작은 고비고비마다 서로에게 다정한 마음이 되어주었고, 그 다정함이 사랑의 이마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걸 확ㅇ니하면서 잠시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다.   216

 

 한영과 헤어진 이후에야 나는 오히려 그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가볍게 취급하기는 곤란한 어떤 병에 걸려 당분간의 요양이 필요한 환자처럼 나는 아주 허약하고 고즈넉한 상태였다. 한동안 너를 생각할 것이다. 한동안 너를 잊어갈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한동안,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정말 너와 헤어졌구나 하는 실감이 드는 날이 오면그제야 매우 서러울 것이다...... 잔뜩 감상적이 된 나는 이미 남남이 된 한영에게 속류 김소월식 버전의 감미로운 이별사를 속삭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따위를 완전히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제법 신통하게 여겼다. 217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치킨수프를 한술 뜨면서 나는 가난한 부부처럼 냄비를 빋기로 한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를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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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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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필이면 '플루토' 8권을 찾아헤매는 중이었고.  

 때마침, 도서관 책장에서 발견했을 따름이다.(검색이 아닌 방식으로 책을 골라 대출하는것은 얼마만이었던가.)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라는 의미심장한 책을 사랑했던지라, 막연하게 아톰은 원자력을 동력삼는 주제에 착한척 하는 로보트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작가가 얼마나 생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미래사회의 발전을 경계했는지는 가늠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라사와나오키'를 좋아했을 뿐이고, 그가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했을 뿐이다. 

 오며가며 지하철에서 펼칠만한 가볍고 작은 책이었는지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년의 지혜'라고 생각하며 술술 읽었다. 그동안 재미없고 난해한 책들로 잔뜩 팍팍해진 머리에게도 한줌 휴식이 필요할 법 했으므로, 나쁘지 않다. 만, 너무 착한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닌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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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꽤나 콤플렉스가 많은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투쟁이 내 만화의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일지라도, 그 내면엔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마다의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그 보물과도 같은 재능을 발굴해낼 수 있도록, 어른들은 보다 깊고 따스한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p.58-59)  

 

 인간은 그저 목숨을 연명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삶의 보람'이 없으면 의욕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발달한 의료기술에 의해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오히려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단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는 꽤나 냉정한 데가 있는 듯합니다. 노인을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바라보는 청장년층의 시선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며 오만입니다.젊은이들도, 지금 사회 일선에서 한창 일하는 사람들도, 젊음을 만끽하며 세상을 즐기고 일에 몰두하는 동안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자신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대꾸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는 의미에서라도 몇십 년 동안 계속 일을 해오다 늙어버린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 한 번쯤 차분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툭하면 병에 걸리고 신체적인 장애까지 동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움직이던 손과 발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의 자괴감과 비참함, 자동판매기 앞에서 어설픈 동작으로 우물쭈물하는 자신의 모습에 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인들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역이나 빌딩 등 도시의 구조는 도저히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신체가 부자유스러워지고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다름아닌 곧 마주하게 될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지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고민해야 합니다.(p.80-81)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최고예요! 아톰에게 '애스트로 보이'라는 별명을 붙인 건 실은 우리 집 아이랍니다. 듣자마자 곧장 이름을 바꿔줬죠. 애스트로 보이는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이 자화자찬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되물었습니다. 

 "아톰이란 이름이 뭐가 어때서요" 

 그러자 미국에서 아톰은 방귀를 뜻하는 속어라고 일러주는게 아닙니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기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흐뭇한 기분도 잠시, 문화의 차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시청률도 상당히 높고, 반응도 좋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꽤 많이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아요." 

 만화에서 덴마박사는 자신의 죽은 자식을 본떠 아톰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아톰이 자라지도 않고 계속 아이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자 '이런 건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로봇을 서커스단에 팔아버립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인신매매'에 해당하니 수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이야기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이 에피소드는 삭제한 후 반영하였습니다. 

 또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찌르면 대개 그 로봇이 산산조각나거나 손발이 망가지는데, 이것은 살인에 해당하므로 고쳐야겠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라면 상관없지만 여기 등장하는 로봇은 걷고 말하고 생명까지 지닌 존재인데, 아무리 악당이라 해도 아톰이 때려부수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톰은 어린이 프로그램 프라임 시간대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아침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다음날인 일요일이면 어린이들이 교회에 가게 됩니다. 자신이 본 것을 목사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주면, 목사는 그건 사악한 만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NBC측은 이런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수고 난 후에, 나중에 다시 조립해서 '내가 나빳어,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는 고칠 수 없어요!" 

 나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또, 아톰이 악당을 감옥에 가두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악당들이 철창에 매달려 제발 용서해달라고 울며 애원하지요. 

 "철창이나 감옥은 어린이를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드니까 수정했으면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쇠사슬에 쇠공을 매달아서 다리에 묶으면 되지요," 

 나로서는 감옥이나 쇠사슬이나 그게 그거 같은데, 어쨌든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그릴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나오면 일단 가톨릭으로 받아들입니다. 미국에는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신자가 모두 있지요. 십자가가 등장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채널을 돌려버려서 시청률이 떨어지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덤만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주소년 아톰>은 뜨거운 호응을 받긴 했지만, 미국으로 보낸 200편 가운데 40편 정도가 되돌아왔습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밀림의 왕자 레오>였습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아프리카로 당연히 흑인이 등장합니다. 콩 족이라는 흑인들의 마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흑인을 모두 백인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니 그럼 흑인들을 모두 할리우드 스타처럼 팔등신으로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백인은 아무리 추하게 그려도 상관없다나요. 

 게다가 아프리카 각국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서 '흑인'으로 지정해도 안 된다. 각 나라의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전통의상 같은 것을 입는 것도 금물이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그려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더이상 <밀림의 왕자 레오>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 p.102~105 )  

 

 물론 지금 당장 '만약~라면' 하고 상상해보면 일단 암담한 상황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리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힘을 내 버티면서, 차라리 이런저런 어두운 상상을 전부 다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거꾸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며 그 속에서 밝은 미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바쁜 나머지 그런 상상조차 쓸데없는 바보짓이라 여기는 어른들을 어쩌면 좋을까요? 언뜻 보기에 하찮은 일, 쓸모없는 일, 궤도를 벗어난 일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심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당신은 무엇을 할까요? 

 '만약 자녀의 목숨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요? 

 이는 언뜻 보기에는 너무도 어두운 'If'이지만, 그 결과 떠오른 생각을 몇십년 동안의 인생에서 조금씩 실현해나간다면 그 양상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금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의 현실에서부터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현실만 직시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질을 발견해야 합니다. 개개의 사건과 상황에 상상력을 발휘해 깊숙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 상상력은 원대한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 우리 이웃의 고민에 다다르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민에 끼어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따뜻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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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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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말랑말랑하던 청소년기, 장장 12년의 신앙생활을 제법 신실한 마음으로 임했는데도, 막상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내가 주로 좋아하던 것은 예쁘고 착한 이야기 가득한 시편이었고, 호기심으로 제법 열독했던 요한계시록정도. 
 
 김규항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게 '예수전'이라길래 무척 흥미로웠다. 치기어린 스무살의 눈에도 교회의 출석자체는 하나님의 뜻과 크게 상관이 없음을 깨닫기 어렵지 않았으나, 따르고 배워야 한다는 예수님 삶,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물론, 그 안에서 답을 구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탕아의 변명일 뿐이다. 그저 전도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나는 늘 조직사업에 취약했다. 이제 그저 다만 성향이라고 정리한다. 
  
 여하간에,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장로를 위시한 몇몇 기독교인들의 지극한 나라사랑이 오늘날 이 지경을 만들었다는 짙은 한숨을 거두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치면서, 애먼 예수님까지 욕먹이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은 열독의 가치가 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그 실천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p.66)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마몬"은 아람어로 '물질적인 부'를 뜻한다. 물론 사람이 현실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물질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을 갖지 못한 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물질을 도외시하라는 게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날 때부터 마몬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누구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한 적당한 물질을 바라지만 그 '적당한 물질'의 수준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래서 어느새 저도 모르게 마몬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몬은 사람을 직접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식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줌으로써,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치게 만든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고결하고 금욕적인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해치는 일을 경고한다.(p.101)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중세의 암흑을 무너트리는 훨씬 더 어려운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덕에 그들 스스로가 법적인 차원에서나마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실은 그들이 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제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 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p.112-113) 

 

 우리는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핌으로써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며 냉소한다.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다위의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p.119)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누구나 수긍할 만한 지당하고 단순한 이치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조화는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이를테면 20세기에 '영성 없는 혁명'에 빠져들었던 수많은 투사들은 제 영성의 빈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정반대의 편향에, '혁명 없는 영성'에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밖의 적은 허상일 뿐이다!'라고 외친다.

 먹고사는 데 절박하지 않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정한 안정을 가진 그들에게 밖의 적은 허상이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밖의 적에 의 해 삶을 위협받는 수많은 사람들, 도무지 내 안을 되돌아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허상이려야 허상일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적이 밖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도 있었다. 나는 절반의 쌍무만 해 온 셈이다. 두 가지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정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p.123)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이 삶을 만든 게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사실, 개념이란 우리 삶과 세계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이치를 표현하는 언어적 약속일 뿐,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는 아니다. 물론 개념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걸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어설픈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보듯 개념이 곧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인 양 오해하여, 그 개념이 다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념의 체제에서만 관념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개념이 없이도 혹은 개념을 몰라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에 이미 충만할 수 있음을 예수는 보여 준다.(p.138)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이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p.187)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내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 밖에 없다.(p.204)
 

 

그나저나, B급 좌파를 자처하는 이 사람, 덕분에 난 감히 좌파를 엄두도 못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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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사람들 - Hello, Strang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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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설게 하기.라는건 러시아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쉬플로크스키가 제시한 말이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영화에서 취하는 대표적인 즐거움이 낯설게 하기 였더랬다. 당연했던 일들이 살짝 변주되면서 모순을 드러내는 순간, 익숙했던 것들이 배치에 따라 어색하게 느껴지는 맥락이 영화를 비롯한 문화영역의 미덕이 아닐까. 했더랬다. 

 한국판 '누들'이라 할 만하다. 비록 다 큰 베트남 청년은 중국소년만큼의 동정심을 유발하지 않고, 탈북청년도 딱히 도움을 줄 만큼 여유로운 형편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마음을 나누는 기본적은 뼈대는 동일하다. 당연하게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벽, 그 암담함을 동력삼아 그들은 애써서 말하고, 애써서 듣는다. 여자친구든 여동생이든 사소한 오해야 어쨌든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절망은 그야말로 일맥상통한다.

 낯선 사람들이 낯선 곳을 헤매는데, 엉뚱하게도 한국이 낯설어졌다. 이 땅 어딘가 탈북자가 살고 있을 테고, 이 땅 어딘가 팔려오듯 시집온 베트남 처녀가 아이를 가졌을테고, 그녀를 사랑한 베트남 총각이 불법체류를 감수하며 임금체불에 시달릴게다. 도시에는 멋대가리 없는 아파트가 즐비하고, 시골 어느곳에서도 '꿈의궁전'이라는 모텔이 있을법하다. 대형마트에서 이불을 구입하고, '503호' 내 집을 찾아가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버거운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한국을 발견한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고속버스와, 규격화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유와 인간성을 잃어가는데, 이 곳에 미적응한 덕분으로 그는 길잃은 외국인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내어줄 수 있었을게다. ATM옆에서 현금인출을 가르치던 형사와의 미묘한 긴장감이 그의 선의를 의심할 수 있을만큼 나의 경계심는 날을 세우고 있었고, 밀폐된 택시 속 잠깐 마주칠뿐인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실랑이가 끊이지 않는 그녀의 만성적 피로감에 내가 덩달아 지쳤다.  

 비록 나도 어색하고 불편한 대한민국 땅이지만, '내래 집에 잘 들어왔어요'라고 환하게 말하던 그 탈북자에게 이 땅이 쉴만한 '집'이 될 수 있기를, 소 키우며 살겠다는 베트남 청년에게도 그를 놓아주었던 경찰관의 나라로 기억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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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풍경 가득한 곳으로 여행을 희망한다면, 멀리 바다 건너갈 것도 없이, 이 영화를 보면 되겠다. 이곳이 더이상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행을 충동질하던 낯선곳에 대한 로망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덧말. 낯선 대한민국 운운하며 리뷰를 쓰긴 했지만, 바다 건너가도 도시의 삶이라는건 어차피 비슷하지 않더냐. 더이상 처음 만난 세계의 감동따위 있을리가 없다. 쩝. 

 그런 전차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주는 별점은 4개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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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키스 - Kiss Please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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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움직인다. 그 당연명제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키스'이지 않을까? 라고 말하는 프랑스 영화. 같이 영화를 본 혹자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과 다를바 없는 영화가 아니냐고 말함으로써 우리사이에 화해불가능한 코드의 강을 건너가버렸지만, 유쾌한 방식으로 '연애'를 성찰하게 만드는 흔치않은 수작이다. 불륜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가부장적 감성코드로는 감당할 수 없을만한 예의와 낭만을 겸비했는고로, 선정적인 카피와 거친 줄거리로 지레짐작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마주할 것을 강추하는 바이다. 

 애정결핍을 호소하는 남자, 키스해도 되냐고, 가슴을 만져도 되냐고, 일일이 허락받는 남자가 영화를 만든 감독이란다. 수다스럽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욕망을 설득해 준 니콜라스 덕분에 '키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영화속에서의 화자는 니콜라스와 주디트의 이야기를 전하는 에밀리이지만서도.) 보수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탓에 '비쥬'라는 인사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인지라, 프랑스인인 그에게도 키스가 무겁다는 동질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을것인가? 라는 구태의연한 질문에 답이 필요했던게 아니다. 어떻게 모든 관계가 '우정' 혹은 '사랑'으로 분류되며, '친구' 혹은 '연인'이라고 제목을 달 수 있겠느냐. 마는, 나름의 기준은 있었던 까닭이다.  스킨십에 떨림이 있느냐 없느냐. 그의 입술이 키스를 부르느냐. 마느냐. 굿바이 키스를 빙자해 무게를 재 볼 것도 없이, 아직까지 그 기준은 예외가 없었다.  

 특별히 마음을 후볐던 장면은 주디트의 남편이 운명적인 여성을 만난 척 떠날때였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이 사과를 받고,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며 겸허히 인정해주는, 사실을 드러내서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기대했던 결과로 매듭짓기 위해, 말 그대도 역지사지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마음을 시리게했다. 키스가 이유이건 말건, 끝내 사랑은 움직인다는 냉정한 사실을 가슴 저리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키스로 시작된 니콜라스와 주디티의 사랑이 쭈욱 안녕하기를, 에밀리와 가브리엘의 키스도 진정 굿바이가 가능했기를, 요즈음의 난 좀처럼 반전가능한 사랑 이야기가 불편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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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이따금 성욕을 해소(!)할 필요가 있는 탓으로, 당당하게 돈으로 거래해도 부끄러울 것 없다는 대한민국의 마초들에게 충분한 교육용 에피소드를 제공하고 있는고로 별 다섯개 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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