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그녀가 특별히 80년대 대학이야기에 감응하는 이유를 모를리없다. 심지어 21세기에 대학을 다녔던 나조차 학생운동의 끝을 잡고 바둥거리지 않았던가. 

 과거의 향수를 안주삼아 추억할 뿐, 사교육과 주식에 몰두하는 꼬라지가 시대의 절망만을 보여주고 있을 때, 노골적으로 그 시대의 찬란한 무용담이 짜증스러워지는 찰나, 무리들의 한켠에서 조용히 사색하던 작가가 묘사하는 1980년대를 만났다. 정여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예리한 지성과 따스한 멜랑꼴리가 불안하게 공존한다'

 어쩌면 20대가 그러려니. 의기탱천한 혈기로 팔뚝질을 하거나. 적당한 포지션를 찾지못하고 우왕좌왕 우물쭈물 엉거주춤 그렇게 흘러가거나. 그 많은 일들이 한가지 통로로 수렴했을 때조차 의연한 어른인척 흉내내는.  

 늘상 대오 중간에서, 혹은 행렬을 이탈에서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던 까닭에, 그녀의 주춤거림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별히 아버지와의 낮술과 연애의 기승전결이 마음에 감응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난 주말은 특별히 애틋했고, 또 덕분에 진보신당 헌책방에 기증된 5권짜리 아라비안나이트를 덜컥 구입해버렸으니, 20대가 가기전에 꼭 읽어보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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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이름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듣는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p.23) 

 여전히 기만에 찬 감상을 못 버린 나는 내 눈물이 장갑으로 따귀를 맞은 모욕감에서 솟구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진정 내 눈물의 의미는 그런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눈빛에 어떤 감정을 담을 수 있고 상대방이 눈빛을 통해 그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전경과 나는 그 순간 진정 눈빛으로 교감했던 것이다. 전경을 바라볼 때의 내 눈빛에는, 비록 불타는 적의를 담으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실제의 내 눈빛에는 애원과 공포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전경은 그것을 제대로 읽었던 것이다. 내 속에 있던 약아빠진 계집애가 내 눈초리에 그런 얄궂은 색칠을 했고, 꼬리를 내린 강아지같이 샐쭉 내려앉은 내 눈을 본 전경은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냐는 심정으로 곤봉이 아닌 가벼운 가죽장갑으로 나를 따끔하게 혼내주었던 것이다. 종태가 아픔을 못 이겨 울었다면 나는 모욕도 울분도 아닌, 분노도 치욕도 아닌, 단지 비굴한 감사를 못 이겨 울었을 뿐이다. 내가 이런 연유로 운다는 걸 종태나 해수가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예전에 해수의 차돌멩이 같은 몸 뒤로 내 길쭉한 몸을 숨겼듯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122 

 

 이야기는 진정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치유했는가? 나를 치유했는가?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로터스 꽃이다. 셰에라자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이것 좀 들어보세요' '저것 좀 들어보세요' 맛깔스럽게 권하면서 무한한 괄호의 연쇄 속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빨아들인다.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임시로 치유하는 장치이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내 과거의 불행도 그다지 엄청난 것은 아니로군,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끄덕이는 순간에 불행했던 왕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속의 한 불행으로 환치하고는 거리를 두고 그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신의 불행이 그의 불행의 최대치이자 요약이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딛고 일어설 기운을 주는 동시에 그 해결방식의 극단성을 초래했다면,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의 진기담과 불행담과 모험담은 그의 불행을 다양한 제반 인간사의 지평에 올려놓고 이러저리 재고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고 따라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을 인간적으로, 즉 문명적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강렬한 이미지, '오, 나의 사우드 님' '나를 후련하게 해줘요'라고 외치는 여자들의 쟁쟁한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최대 매력은 여기에 있다. 마신의 불행이 샤푸리야르 왕의 불행을 위로하면서도 가슴 저미게 상기시키는 불행의 심연이었던 반면에, 셰에라자드가 해주는 이야기 속의 불행들은 인생이라는 양탄자가 휘감을 수 있는 무한한 불행들의 너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깊이를 길이로 바꾸는 날렵하고 미적인 범주 넘나들기, 이미지의 깊이로 시작하여 서사의 길이로 끝나는 것, 심도에 대해서 연장으로 대답하는 것, 불행한 의식의 심연을 무한하고 다양한 서사의 미로로 봉쇄하는 것, 길을 잃게 만드는 것 칼을 묻었던 곳을 잊게 만드는 것. 

 『아라비안나이트』의 표면적인 질문과 대답은 방종에 대한 정숙으로의 보상이다. 그러나 이 가짜 문답 뒤에 숨은 것은, 시와 소설, 이미지와 서사, 일탈과 치유, 광기와 문명의 문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물한 살의 나는, 이 심오한 문담 속에서 진정한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낮술처럼 값싼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173-174 

  

 사변적인 자들은 말한다. 의심하는 순간 사랑은 완성된다고. 회의에 빠졌을 때 비로소 사랑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고. 사랑에 대한 믿음은 한갓 베일 뒤를 보지 못하고 베일 위의 그림만을 보는 허약한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철학적인 논객들의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랑의 정수나 실체에 관련된 진리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사랑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사랑은 확실성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애의 행복감도 사랑의 확실성이 일상 속에 용해되어 더이상 아무 새로움도 환기하지 않는 불행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가 자세를 조금 바꾸었을때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고 짧은 행복감이 찾아들듯, 우리는 연애의 작은 고비고비마다 서로에게 다정한 마음이 되어주었고, 그 다정함이 사랑의 이마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걸 확ㅇ니하면서 잠시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다.   216

 

 한영과 헤어진 이후에야 나는 오히려 그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가볍게 취급하기는 곤란한 어떤 병에 걸려 당분간의 요양이 필요한 환자처럼 나는 아주 허약하고 고즈넉한 상태였다. 한동안 너를 생각할 것이다. 한동안 너를 잊어갈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한동안,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정말 너와 헤어졌구나 하는 실감이 드는 날이 오면그제야 매우 서러울 것이다...... 잔뜩 감상적이 된 나는 이미 남남이 된 한영에게 속류 김소월식 버전의 감미로운 이별사를 속삭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따위를 완전히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제법 신통하게 여겼다. 217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치킨수프를 한술 뜨면서 나는 가난한 부부처럼 냄비를 빋기로 한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를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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