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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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말랑말랑하던 청소년기, 장장 12년의 신앙생활을 제법 신실한 마음으로 임했는데도, 막상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내가 주로 좋아하던 것은 예쁘고 착한 이야기 가득한 시편이었고, 호기심으로 제법 열독했던 요한계시록정도. 
 
 김규항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게 '예수전'이라길래 무척 흥미로웠다. 치기어린 스무살의 눈에도 교회의 출석자체는 하나님의 뜻과 크게 상관이 없음을 깨닫기 어렵지 않았으나, 따르고 배워야 한다는 예수님 삶,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물론, 그 안에서 답을 구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탕아의 변명일 뿐이다. 그저 전도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나는 늘 조직사업에 취약했다. 이제 그저 다만 성향이라고 정리한다. 
  
 여하간에,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장로를 위시한 몇몇 기독교인들의 지극한 나라사랑이 오늘날 이 지경을 만들었다는 짙은 한숨을 거두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치면서, 애먼 예수님까지 욕먹이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은 열독의 가치가 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그 실천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p.66)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마몬"은 아람어로 '물질적인 부'를 뜻한다. 물론 사람이 현실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물질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을 갖지 못한 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물질을 도외시하라는 게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날 때부터 마몬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누구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한 적당한 물질을 바라지만 그 '적당한 물질'의 수준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래서 어느새 저도 모르게 마몬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몬은 사람을 직접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식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줌으로써,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치게 만든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고결하고 금욕적인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해치는 일을 경고한다.(p.101)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중세의 암흑을 무너트리는 훨씬 더 어려운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덕에 그들 스스로가 법적인 차원에서나마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실은 그들이 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제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 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p.112-113) 

 

 우리는 2,000년 전 바리사이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핌으로써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며 냉소한다.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다위의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p.119)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누구나 수긍할 만한 지당하고 단순한 이치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조화는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이를테면 20세기에 '영성 없는 혁명'에 빠져들었던 수많은 투사들은 제 영성의 빈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정반대의 편향에, '혁명 없는 영성'에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밖의 적은 허상일 뿐이다!'라고 외친다.

 먹고사는 데 절박하지 않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정한 안정을 가진 그들에게 밖의 적은 허상이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밖의 적에 의 해 삶을 위협받는 수많은 사람들, 도무지 내 안을 되돌아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허상이려야 허상일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적이 밖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도 있었다. 나는 절반의 쌍무만 해 온 셈이다. 두 가지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정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p.123)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이 삶을 만든 게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사실, 개념이란 우리 삶과 세계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이치를 표현하는 언어적 약속일 뿐,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는 아니다. 물론 개념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걸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어설픈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보듯 개념이 곧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인 양 오해하여, 그 개념이 다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념의 체제에서만 관념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개념이 없이도 혹은 개념을 몰라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에 이미 충만할 수 있음을 예수는 보여 준다.(p.138)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이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p.187)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내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 밖에 없다.(p.204)
 

 

그나저나, B급 좌파를 자처하는 이 사람, 덕분에 난 감히 좌파를 엄두도 못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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