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6세 여성 하마무라 아카리는 묻지마 살상범 케이치가 휘두른 흉기에 십여 차례나 찔리지만 범인을 막아선 중년남자 아키히로 덕분에 목숨을 건집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아카리에게 약속은 지켰다고전해 줘.”라는 말을 남깁니다. 사건 이후 거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심신은 붕괴되고 가족들과도 충돌을 거듭하던 아카리는 다시금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아키히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연고 묘에 매장된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잡지 기자 미조구치 쇼고는 범인 케이치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개인적으로 그를 취재할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과 꼭 닮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케이치에 대해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매 작품마다 묵직한 주제와 정교한 미스터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온 야쿠마루 가쿠가 이번에는 묻지마 살인, 학대와 폭력, 갱생과 회한, 범죄피해자의 고통 등 더욱 더 현실적이고도 무겁기 그지없는 소재들로 채워진 미스터리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선 안 될 죄의 경계에 대한 야쿠마루 가쿠의 일성은 그 어떤 논픽션이나 연설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첫 번째 화자는 범죄피해자 아카리입니다. 불면과 우울, 폭음과 거친 언행 등 평소엔 찾아볼 수 없었던 태도로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아카리의 삶은 사건 이후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그 어느 미스터리에서도 이처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범죄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선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카리의 모습은 공감을 넘어 응원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해 보였습니다.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아카리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을 살리고 숨진 아키히로에 관해 알아내는 것. 또 그의 유언을 전달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없고 친척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한 탓에 무연고 묘에 매장된 아키히로의 삶을 추적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지난한 여정 끝에 아카리가 알아낸 사실들은 그녀를 충격과 연민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또 한 명의 화자는 잡지기자 쇼고입니다. 어머니로부터의 학대와 아동시설에서 보낸 유년기라는 공통점을 지닌 묻지마 살인범 케이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구치소에서의 면회를 통해 논픽션 책을 출간할 것을 제안합니다. 범행의 원인이 된 잔혹했던 유년기를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놀랍긴 했지만 케이치가 동의한 또 다른 목적을 들은 쇼고는 적잖은 충격에 빠집니다. 물론 쇼고 자신도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쇼고의 캐릭터가 관심을 끈 건 그는 한때 죄의 경계를 넘었던 적이 있지만 현재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이중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경계 양쪽에 있는 케이치와 아카리를 관조하는 듯하면서도 언제라도 다시 그 경계를 넘어설 것만 같은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란 뜻입니다.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죄의 경계는 소설적 미덕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돌직구 같은 구성과 전개를 지닌 작품입니다. 물론 거듭되는 반전과 굴곡이 심한 스토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범인-피해자-기록자 등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지독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한 대목들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공개되고, 관련자들의 과거를 훑어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보니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논픽션의 서사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흥분을 놓칠 새가 없는 것은 물론 수시로 울컥하게 만드는 픽션의 힘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죄의 경계는 그만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과 함께 죄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 작품으로 기대 이상의 여운과 만족감을 남겨줬습니다.

 

신간 소식이 들리면 덮어놓고 구해 읽는 작가 중 한 명이 야쿠마루 가쿠입니다. 아직 책장에 방치해놓은 채 못 읽은 작품도 몇 편 있지만, 2024년에는 그의 신작 소식이 좀더 자주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검색해보니 20234월에 출간된 最後를 포함하여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모두 다섯 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한새마 지음 / 북오션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년 전, 어선에서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강시호는 광역수사대 3팀장이 된 지금도 당시의 범인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강시호의 등에 새겨 넣었던 라플레시아, 일명 시체꽃 문신입니다. 비슷한 문신의 소유자들은 꽤 있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꽃잎을 채운 진짜 시체꽃 문신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편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맡은 강시호와 3팀은 여러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리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해 고전합니다. 그러던 중 피살자가 과거 사이비 종교에 몸담았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 부분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강시호는 충격적인 사실과 직면합니다.

 

그동안 여러 편의 앤솔로지나 수상작품집에서 이름만 눈여겨보곤 했던 한새마의 첫 장편입니다. 아쉽게도 읽은 작품이 없어서 성향이나 장점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장편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강시호와 광역수사대 3팀이 수사하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이고 또 하나는 12년 전 인생의 밑바닥을 살던 김민서가 우연히 만난 또래 여성을 통해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한 일들입니다. 이에 덧붙여 시체꽃 문신 살인마를 쫓는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가 간간이 끼어들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풍성한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관 없어 보이던 세 개의 미스터리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한줄기로 묶이면서 강시호에게 큰 충격과 시련을 안깁니다.

 

일단 강시호라는 주인공 캐릭터가 가장 눈길을 끕니다. 20년 전의 참혹한 사건은 강시호의 몸과 마음에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희생된 아이들 중엔 여동생도 있었기에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복수심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날것처럼 생생합니다. 범인이 등에 새겨 넣은 끔찍한 시체꽃 문신을 일부러 지우지 않은 것은 강시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20년 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뒤 최연소 광역수사대 팀장이 되어 문신 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다혈질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냉정과 이성을 되찾는 점이나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폭력 재능과 함께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미스터리 주인공의 필수 스펙은 빠짐없이 장착한 인물입니다. 문신 살인마에 집착한 나머지 잔혹한 살인사건이라면 자청해서 맡는 강시호 덕분에 3팀이 잔혹범죄전담팀이라는 별명을 얻은 설정도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잔혹범죄전담팀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강시호라는 캐릭터 덕분일 것입니다.

 

다만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가장 큰 건 짧은 분량에 세 개의 미스터리를 담다 보니 서사의 깊이나 밀도가 얕고 옅어 보인 점입니다.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막판에 여러 차례의 반전을 거쳐 진범이 드러나긴 하지만 메인 사건이라고 하기엔 전개나 해법 모두 다소 가볍고 급해 보였습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어울리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12년 전 김민서가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물론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와도 접점을 이루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왠지 그 접점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접점에 자리 한 인물이나 사건 모두 필연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딱 떨어지는 쾌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느낌입니다.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 역시 그녀가 20년을 짊어졌던 죄책감과 복수심에 비하면 너무 쉽게 마무리됐습니다. 물론 그녀의 수사는 완결되지 않았고 후속작에서 계속 이어질 거라는 떡밥이 남겨지긴 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찜찜함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인물, 사건, 심리(감정) 묘사가 가볍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듬성듬성 이뤄지는 미스터리에는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데,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역시 그런 인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고통이 진심으로 전해지지 않은 점도,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의 발단이 된 안타까운 사연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강시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지금보다 100페이지 이상 분량이 늘어나도 좋으니 좀더 디테일하고 깊이 있는 서사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캐릭터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며 유명 만화가의 보조로만 5년을 보낸 야마시로 케이고는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천성이 착한 나머지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해 만화가 데뷔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그가 한 저택을 스케치하러 갔다가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범인과 마주쳤음에도 충격 때문에 그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 야마시로는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알리바이 덕분에 겨우 풀려납니다. 얼마 후 단골 펍에서 만난 분홍머리 남자가 살해현장에서 마주쳤던 범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야마시로는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본 야마시로는 드디어 찾아낸 악의 캐릭터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로 야마시로는 데뷔와 함께 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본 딴 듯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읽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띠지에 적힌 소설-만화 동시 발행이라는 문구였고, 또 하나는 인터넷서점에서 나가사키 타카시라는 이름으로 30편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그중 28편이 만화라는 점입니다. 소설을 모방한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익숙하지만 만화를 모방한 살인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주인공 야마시로 케이고의 딜레마는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면서도 너무도 선한 성격 탓에 인기를 끌만한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범인과 마주친 뒤로 그토록 그려내지 못했던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악한 캐릭터를 창조한 바로 그 순간 야마시로 자신의 캐릭터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비틀어졌다는 점입니다.

 

‘34’라는 제목의 야마시로의 데뷔작에 등장한 악한 캐릭터는 대거라는 이름의 무차별 살인귀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만을 골라 참혹하게 살해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독자는 대거에게 열광했고 야마시로는 데뷔작부터 초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만화를 그대로 모방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점입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야마시로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만화를 포기할 것인지 연쇄살인의 공범이 돼서라도 어렵게 이룬 만화가의 꿈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선한 캐릭터의 만화가 지망생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4인 가족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의 캐릭터까지 망가지고 마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만화 속 살인마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 만화 오타쿠이자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카나가와 현경 수사1과의 세이다 슌스케, 망가진 야마시로 때문에 절망하는 연인 나츠미 등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를 미스터리 못잖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소설보다는 만화에 적합한 서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미스터리를 설계한 뒤 그 안에 악과 마주하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을 함께 불어넣음으로써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막판의 흥미로운 반전과 클라이맥스에서는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앞서 탄탄하게 쌓아온 서사 덕분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 외에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약간의 위화감 때문에 별 0.5개를 뺀 건 무척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 모두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만화 계열의 미스터리에서 성장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발휘된 덕분이란 생각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이 만화나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선 야마시로가 그린 만화 장면이 대사로만 설명되는데, 만화나 애니라면 소설과는 달리 매력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시 45분 열차에서의 고백
리사 엉거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시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뢰하던 보모 제네바가 남편 그레이엄과 불륜 관계임을 알게 된 셀레나는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통근열차에서 만난 낯선 여자 마사가 직장상사와 불륜 중이라는 고백을 해오자 자기도 모르게 남편과 보모의 불륜을 털어놓았던 셀레나는 얼마 후 제네바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열차에서 들은 마사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한기를 느낍니다. “그 여자가 그냥 사라져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실제로 마사라는 여자가 제네바의 실종과 관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셀레나의 불안감은 날로 커져갑니다. 한편 그레이엄의 불륜 사실을 알아낸 경찰은 제네바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그레이엄과 셀레나를 주목합니다. 하지만 셀레나는 마사에 관해선 일체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출간 당시 이 작품을 읽을 목록에 올리지 않았던 건 단 한 가지 이유, 도메스틱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한때 홍수처럼 쏟아져 피로도가 높아진 탓에 어지간히 눈에 띄는 줄거리가 아니라면 일단 보류해왔는데,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 202310대 스릴러로 뽑힌 걸 보곤 한번쯤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셀레나의 삶이 순식간에 뒤흔들린 건 그녀가 남편 그레이엄과 불륜 중이었다는 점과 열차에서 만난 미지의 여자 마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은 점 때문입니다. 오로지 가정을 지켜야 된다는 압박감에 이미 여러 차례 성추문을 일으킨 그레이엄을 용서해왔던 셀레나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만, 하필 불륜 상대가 실종된 탓에 경찰이 개입하는 지경에 이르자 또 다시 그레이엄의 추태를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문제는 자신 외에 그레이엄의 불륜을 아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는 점.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마사에게 자신의 불행을 들려준 일이 몹시도 신경 쓰이던 셀레나는 어느 날 마사로부터 만나자는 문자를 받자 깜짝 놀랍니다.

 

남편의 불륜과 보모의 실종으로 인한 경찰의 압박, 그리고 미지의 여자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 등 셀레나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15살 소녀 펄에 관한 이야기가 나란히 병행됩니다. 수시로 남자를 갈아치우는 엄마에 대한 원망, 그런 엄마의 새남자로 보이는 서점직원 찰리에 대한 의심,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친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 등 펄이 겪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 불온한 분위기와 함께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셀레나의 이야기와 펄의 이야기는 중반부 이후 예기치 못한 반전과 함께 접점을 이룹니다. 셀레나의 공포와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드는 대목이자 제네바 실종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단계이기도 한데 이 무렵부터 이야기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너무 많아서 초중반 이후의 내용이나 설정에 관해선 언급하기가 무척 곤란한 작품입니다. 열차에서 만난 마사라는 여자의 정체, 의문투성이인 제네바의 실종, 가정과 삶의 붕괴에 고통스러워하는 셀레나의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15살 소녀 펄이 이후 어떤 사건들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가 등 초반부터 독자에게 던져진 궁금증들이 아주 천천히 양파 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지며 공개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서평들 가운데 뜻하지 않게 대형 스포일러가 담긴 경우가 있을 수도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도메스틱 스릴러의 외형을 지녔지만 서스펜스+심리스릴러의 미덕까지 갖춘 작품이라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특히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사건보다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간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리사 엉거는 스무 편 이상의 작품을 펴낸 베테랑 작가라고 하는데, 이전까지 한국에는 2008년에 출간된 아름다운 거짓말한 편이 전부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그녀의 전공이 도메스틱 스릴러라면 살짝 아쉬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간 소식이 들리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재앙의 책
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도 너무 특이하고 책에도 암수가 있어서 아무렇게나 붙여 놓으면 새로운 내용을 가진 책을 잉태해버린다.”라는 기발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을 갖고 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재앙의 책을 통해 오다 마사쿠니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설정과 그로테스크한 스토리에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 같이 비현실 혹은 이세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아주 묘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식의 리얼리티라고 할까요? 또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화() 혹은 재앙에 휘말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참혹하거나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에 따라 그만하면 주인공 입장에선 해피엔딩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는 작품도 일부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작품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식서(食書)

신작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던 소설가가 화장실에 숨어 책을 찢어 먹는 여자를 목격하곤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처럼 책을 찢어 먹은 소설가는 소설 속 세계로 전이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미모구리(もぐり)

타인의 귀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그 속으로 몸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귀 주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지닌 미미모구리. 주인공은 미미모구리에게 능력을 전수받은 뒤 4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드나듭니다.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らかなところへ)

바짝 마른 몸의 아내를 둔 남자는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난 풍만한 체구의 여자에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한 욕망을 느낍니다.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풍만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남자 앞에 버스에서 만난 여자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농장(農場)

20대에 노숙자가 된 이노우에는 한 노인의 제안으로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수확하는 희귀 작물의 이름은 하나바에. 하지만 그것은 잘라낸 코를 밭에 심은 뒤 6개월 후에 수확한 재생산된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꿈속에서 만나곤 했던 소녀가 자신의 안구에서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상색기’), 머리카락 신을 모시는 사교집단에 도우미로 참석했다가 끔찍한 참극에 휘말리는 여자(‘머리카락 재앙’), 신체접촉만으로 감염되는 노출증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세계(‘나부와 나부’)등 상상을 뛰어넘는 설정과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의 어두운 감정들이 밑바닥에 진하게 깔린 이야기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혐오와 불안입니다. 어찌 보면 공포보다 훨씬 더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그 어떤 호러물보다 더 독한 여운을 남깁니다.

재미있는 건 일곱 편 모두 공통적으로 인체기관을 소재로 사용한 점입니다. , , , , , 머리카락, 나체가 그것인데, 읽는 내내 느낀 신경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감의 근원은 아마 이 인체기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혐오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체기관과 조합되면서 이야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읽는 동안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쓰하라 야스미의 일레븐이 떠오르곤 했는데, 두 작품 모두 괴담 이상의 괴담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데다 캐릭터나 설정 역시 단순히 비현실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기괴함과 파격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자나무의 경우 사랑이라는 주제가 엽기적인 설정과 조합된 독특한 작품이고, ‘일레븐은 모든 장르가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 ()-재앙의 책과는 톤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평범한 상상력으론 도달할 수 없는 서사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첫 두 수록작(‘식서’, ‘미미모구리’)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별 5개도 부족하다며 감탄했지만 이후 수록작들이 살짝 기대에 못 미쳐서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먼저 출간된 오다 마사쿠니의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아직 출간 안 된 그의 작품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릴 작품으로 보이는데,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감수하고라도 특별한 괴담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