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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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여성 하마무라 아카리는 묻지마 살상범 케이치가 휘두른 흉기에 십여 차례나 찔리지만 범인을 막아선 중년남자 아키히로 덕분에 목숨을 건집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아카리에게 약속은 지켰다고전해 줘.”라는 말을 남깁니다. 사건 이후 거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심신은 붕괴되고 가족들과도 충돌을 거듭하던 아카리는 다시금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아키히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연고 묘에 매장된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잡지 기자 미조구치 쇼고는 범인 케이치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개인적으로 그를 취재할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과 꼭 닮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케이치에 대해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매 작품마다 묵직한 주제와 정교한 미스터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온 야쿠마루 가쿠가 이번에는 묻지마 살인, 학대와 폭력, 갱생과 회한, 범죄피해자의 고통 등 더욱 더 현실적이고도 무겁기 그지없는 소재들로 채워진 미스터리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선 안 될 죄의 경계에 대한 야쿠마루 가쿠의 일성은 그 어떤 논픽션이나 연설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첫 번째 화자는 범죄피해자 아카리입니다. 불면과 우울, 폭음과 거친 언행 등 평소엔 찾아볼 수 없었던 태도로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아카리의 삶은 사건 이후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그 어느 미스터리에서도 이처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범죄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선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카리의 모습은 공감을 넘어 응원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해 보였습니다.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아카리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을 살리고 숨진 아키히로에 관해 알아내는 것. 또 그의 유언을 전달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없고 친척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한 탓에 무연고 묘에 매장된 아키히로의 삶을 추적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지난한 여정 끝에 아카리가 알아낸 사실들은 그녀를 충격과 연민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또 한 명의 화자는 잡지기자 쇼고입니다. 어머니로부터의 학대와 아동시설에서 보낸 유년기라는 공통점을 지닌 묻지마 살인범 케이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구치소에서의 면회를 통해 논픽션 책을 출간할 것을 제안합니다. 범행의 원인이 된 잔혹했던 유년기를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놀랍긴 했지만 케이치가 동의한 또 다른 목적을 들은 쇼고는 적잖은 충격에 빠집니다. 물론 쇼고 자신도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쇼고의 캐릭터가 관심을 끈 건 그는 한때 죄의 경계를 넘었던 적이 있지만 현재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이중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경계 양쪽에 있는 케이치와 아카리를 관조하는 듯하면서도 언제라도 다시 그 경계를 넘어설 것만 같은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란 뜻입니다.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죄의 경계는 소설적 미덕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돌직구 같은 구성과 전개를 지닌 작품입니다. 물론 거듭되는 반전과 굴곡이 심한 스토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범인-피해자-기록자 등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지독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한 대목들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공개되고, 관련자들의 과거를 훑어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보니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논픽션의 서사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흥분을 놓칠 새가 없는 것은 물론 수시로 울컥하게 만드는 픽션의 힘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죄의 경계는 그만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과 함께 죄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 작품으로 기대 이상의 여운과 만족감을 남겨줬습니다.

 

신간 소식이 들리면 덮어놓고 구해 읽는 작가 중 한 명이 야쿠마루 가쿠입니다. 아직 책장에 방치해놓은 채 못 읽은 작품도 몇 편 있지만, 2024년에는 그의 신작 소식이 좀더 자주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검색해보니 20234월에 출간된 最後를 포함하여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모두 다섯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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