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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록
프리키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1월
평점 :
요즘 들어 국적 불명의 필명을 쓰는 한국 장르물 작가들이 부쩍 늘었는데 좀 비뚤어진 편견이긴 하지만 그런 작가의 작품은 무슨 이야기인지 관심은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홍보카피의 한 줄 - “브릿G에서 10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공개하고 있는 필명 프리키” - 때문입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의 편견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킬 만큼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카피였고, 그래서 첫 수록작만이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기생록’의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장르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집’이라는 출판사 소개대로 수록된 여섯 편은 미스터리, 스릴러, SF, 호러, 판타지 등 각기 다른 장르의 서사를 선보입니다. 100% 현실에 충실한 이야기는 단 한 작품뿐이고 그 외엔 캐릭터든 소재든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빚어낸 독특한 설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수록작들을 소개하면...
①국가생명연구소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에 처한 두 남녀, 그리고 이들을 협박하며 살상극을 벌이는 정체불명의 복면남 등 긴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극.
②이웃을 놀라게 하는 법
자신을 무시하는 이웃을 놀라게 하려던 가벼운 장난이 돌이킬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고 마는 미스터리 소동극.
③이 안에 원귀가 있다
부모와 함께 살해당한 뒤 원귀가 된 남자가 게임을 통해 복수를 도모하는 호러물.
④소녀 사형집행관
살인을 저지른 촉법소년이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비밀기관에 갇힌 채 사형집행관이라는 임무를 맡아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처벌을 받는다는 이야기.
⑤괴물 사냥꾼
인체실험의 실패로 탄생한 돌연변이 괴물과 그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파견된 요원의 이야기를 그린 SF 스릴러.
⑥기생록
혐오스런 외모와 왜소한 몸집 때문에 평생을 왕따로 살아온 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존재와 만난 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호러 판타지.
개인적으론 잔인한 살육극을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그린 ‘국가생명연구소’, 기노시타 한타의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떠올리게 한 미스터리 소동극 ‘이웃을 놀라게 하는 법’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아무래도 현실감 있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좋아하다 보니 이 두 작품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괴물 사냥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대놓고 대중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면 훨씬 더 알찬 작품이 됐을 것 같았고, 촉법소년을 등장시켜 기대가 컸던 ‘소녀 사형집행관’은 마무리가 다소 맥이 빠져서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 호러와 SF 작품들은 소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구성과 전개가 선명하지 않거나 살짝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과도한 멋부림과 사족 때문에 스토리가 손해를 본 느낌이라고 할까요?
‘장르의 종합선물세트’로서의 매력을 갖춘 건 분명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더 많이 느껴져서 좀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독자에 따라 수록작마다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호러 판타지나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의견이 무척 궁금해진 작품인데, 서평을 마치는대로 인터넷서점과 SNS에서 ‘기생록’을 다시 한 번 검색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