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 - 무라카미 류 걸작선
무라카미 류 지음, 김지룡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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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은 50여 편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읽은 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한 편뿐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19금 판정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수위가 센 이야기였다는 것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여 페이지의 분량에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토파즈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으로, 지금까지 읽은 성()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묘사 수위에 관한 한 거의 원톱으로 꼽을 만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인공은 가학적인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SM클럽 소속의 여성들입니다.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 속에 담아낸 작품도 있지만 마치 성매매 일지처럼 거칠고 엽기적인 성관계 장면을 디테일하게 서술한 작품도 있습니다. 돈으로 성을 사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야비한 변태로 그려지지만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호출할 다음 손님의 전화를 기다리는,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로 성매매에 나섭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알맹이 없는 SM 포르노그래피로 여길 수도 있고,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고 픽션의 탈을 쓴 다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관계 묘사만 놓고 보면 음지에서나 유통될 법한 SM 포르노그래피로 읽히는 게 당연합니다. 사회 고발물이나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주인공들이 성매매에 빠져들게 된 안타까운 경위라든가 어떻게든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라든가 좀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성매매를 비판하는 이야기 같은 건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을 사회파 소설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픽션의 탈을 쓴 다큐’, 즉 뭔가 독자에게 설파하려는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 요상한 세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아주 무관한 세상은 아닙니다.”라며 상식이나 도덕이라 불리는 것들과 거리가 먼, 겉으로는 더럽고 추하다고 부정하면서도 속으론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의 단면을 뚝 잘라 내보인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표제작인 '토파즈'를 비롯해서 간혹 주인공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어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왠지 주인공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타인의 관심과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또 누군가의 동정심이나 이해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그저 지켜보며 각자의 감정에 빠지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파격적인 19금 소설정도가 아니라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작품이라 함부로 추천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보고 싶은 독자라면 수록작 한두 편쯤 맛보기로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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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살인사건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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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외과의사 미즈키 치하야는 오랫동안 서먹한 채 벽을 쌓고 살아온 아버지 미노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망 직후 자신의 시신을 해부해달라는 미노루의 유언에 크게 놀란 치하야는 동기인 병리의(病理醫) 토야 시오리와 함께 해부를 진행한 결과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암호문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혼란스러운 치하야에게 닥친 결정타는 평생 경비원으로 일했다던 미노루가 실은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으며,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28년 전의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일명 종이학 살인사건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미노루가 사망한 바로 그날, 종이학 살인사건의 범인이 28년 만에 새로운 범행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치넨 미키토의 매력을 또 한 번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이 본격 미스터리에 치중한 작품이었고, ‘구원자의 손길이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이었다면, ‘종이학 살인사건은 두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된 메디컬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傷痕のメッセージ’(상흔의 메시지)입니다. 치하야의 아버지이자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였던 미노루의 위장 벽에 새겨진 암호 메시지가 이 작품의 원제이자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미노루로 하여금 경찰을 그만두게 만들었던 28년 전 연쇄 여아 살해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왜 아버지는 편지가 아닌 기이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는가? 만일 종이학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라면 왜 지금까지 경찰에 넘기지 않은 건가? 무엇보다 왜 아버지는 자신에게 전직 경찰임을 알리지 않은 걸까? 자신을 혼란에 빠뜨린 이 무수한 의문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치하야는 동기 의사인 시오리와 함께 암호 메시지 해독에 나섭니다. 그리고 거기에 28년 전 미노루의 파트너이자 신참 멘티였으며 현재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인 사쿠라이가 가세합니다. 그는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이 28년 만에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여성 교살사건 때문에 수사본부에 합류했고, 미노루의 죽음과 교살사건이 같은 날 벌어진 게 절대 우연이라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치하야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사쿠라이의 태도와 의도에 적잖은 의심을 품습니다.

 

미노루의 딸인 치하야가 그의 생전 인간관계를 조사하고, 미노루를 해부한 병리의 시오리는 그의 위장에 새겨진 메시지는 물론 시신에 담긴 또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현미경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사는 경시청의 사쿠라이가 담당합니다. 말하자면 치하야가 휴먼, 시오리가 메디컬, 사쿠라이가 미스터리를 담당한 셈인데, 사건 못잖게 이 세 인물의 케미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치하야는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면모에 여러 번 놀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시오리는 미노루의 장기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그의 시신이 전달하려는 또 다른 메시지를 찾는데 전념합니다. 병리의의 의무는 단순히 해부나 관찰에 그치지 않고 시신이 남긴 메시지를 유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시오리의 신념은 메디컬 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남다른 감동을 전합니다. 그리고 과거 사수였던 미노루가 그랬듯 사쿠라이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사를 감행하는 철두철미한 반골입니다. 유족인 치하야와 민간인 의사인 시오리와 비밀리에 협업하는 건 바로 그런 그의 수사 스타일 때문인데, 문제는 그 협업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연쇄 여아 살해사건 이후 28년 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도 흥미롭고,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치하야의 고통스러운 여정도 긴장과 감동을 번갈아 선사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놀라움 그 자체이고, 사쿠라이와 시오리가 알아낸 진실 때문에 자칫 평생을 지옥도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치하야의 위태로운 처지는 막판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어떤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정말 잘 짜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쾌감과 여운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라노벨 계열과 달달해 보이는 미스터리는 읽지 않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정극 미스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 읽는 편입니다. 검색해보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집필한 걸로 나오는데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소개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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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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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을 일곱 편쯤 읽고 나면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런 장르가 전공이라고 단정할 만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여덟 번째로 읽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딱히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작가인지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인 고전부 시리즈부터 기자의 소명과 보도윤리를 다룬 베루프 시리즈’,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서늘한 공포와 맛깔난 기담에 마지막 한 줄의 반전 미스터리까지 맛볼 수 있는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톤의 작품을 고르라면 현대물인 야경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시대적 배경입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 등장하고, 지역유지가 권세를 누리는 장면 등으로 미뤄보아 대략 20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됐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한 주인공이 인용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 산책’(1949)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각 수록작마다 배어있는 기담 혹은 괴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고풍스런 옛이야기의 정취가 초반을 장식하지만 이내 느닷없이 기묘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기담과 괴담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서사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고 순수한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깔끔한 해법과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록작도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을 감미롭고도 잔혹한 블랙 미스터리라고 부른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모든 수록작의 공통점은 바벨의 모임이라는 여대생들의 독서모임입니다. 모임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유수의 명문가의 영애들이며 집에서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탐독하고 그 감상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다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이 모임이 직접 묘사되거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각 수록작의 주인공을 맡고 있고, 때론 제3자로서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 주인공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모임에 모여들지요.” (p308)

 

명문가의 영애들이지만 기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행한 사연을 지닌 탓에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실에서의 도피 혹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녀들의 심리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간혹 내가 지금 판타지를 읽는 건지,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읽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반전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앞서 읽은 내용들을 천천히 복기하고 음미하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몸종의 비밀을 그린 집안에 변고가 있어서’, 동생에게 가문을 내주고 유폐당한 장남과 그를 감시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복여동생의 이야기 북관의 죄인’, 외진 곳의 고급 별장을 홀로 관리하던 여성이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뒤 벌어지는 서늘한 이야기 산장비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해지던 아가씨가 동갑의 몸종과 만난 뒤 벌어지는 비극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 그리고 바벨의 모임이 몰락하게 된 사연을 그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덧없는 양들의 만찬등 이야기마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장르가 혼합된 선물세트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냥 미뤄뒀던 작품인데 14년 만에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오래된 밀린 숙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근대와 현대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인사이트 밀’, ‘추상오단장등 아직 못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대로 그의 팔색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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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제국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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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7살의 야엘 말랑은 파리의 박제 가게에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와 그것이 보낸 메시지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우연히 알게 된 프리랜서 기자 토마스와 함께 메시지를 해석하며 그 안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 야엘은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구성하는 숨은 권력자, 그림자들의 존재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런 자들이 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수수께끼를 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은 물론 자신과 토마스마저 거듭 살해될 위기에 처하자 야엘은 그림자들의 정체와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0년도 훌쩍 넘어 줄거리는 거의 가물가물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이 작품이 처음에(2008) ‘악의 유희라는 제목으로 출간돼서 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산 점입니다.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또는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여겼던 독자들은 뒤늦게야 출판사가 원제와 전혀 관련 없는 번역제목을 붙였음을, 악의 3부작의 후광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을 부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3년 후인 2011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그림자의 제국이라는 새 제목이 붙었는데, ‘Les Arcanes du Chaos’(직역하면 카오스의 비밀’)라는 원제와 거리가 있긴 해도 그나마 수긍할 만한 번역제목이었습니다.

 

서평에 앞서 결론부터 말하면 그림자의 제국은 제가 갖다 붙인 명품재독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입니다. “인상 깊게 읽었다는 기억 자체가 오류였다는 뜻인데, 아마도 악의 3부작직후에 읽은 작품이라 그런 오류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악의 3부작이 조슈아 브롤린이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앞세운 잔혹한 연쇄살인 스릴러였던 반면 그림자의 제국은 이른바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운 진실 찾기 추격 스릴러입니다. 야엘이라는 평범한 여성이 그림자들이라는 가공할 집단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하게 망가지는 가운데 진실을 찾아 위험천만한 여정을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 집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들, 누군가 자신의 집에 몰래 침입한 것이 분명한 흔적들...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되돌릴 방법은 난해한 문구와 성경 구절이 뒤섞인 그림자들의 메시지와 수수께끼를 푸는 것밖에 없다고 여긴 야엘은 토마스의 도움을 받아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끊임없이 추격당하자 그림자들의 진의를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혹평의 대부분은 식상한 음모론에 관한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관한 장황한 설명에서부터 1달러 지폐의 상징들, 케네디 암살, 쿠바 공습, 베트남 전쟁, 9.11 테러 등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음모론에 대한 강의식 서사가 독자들을 질리게 한 탓입니다. 또한 주인공 야엘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점 왜 하필 나야?” - 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이 충격이나 반전과는 거리가 먼,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허술했던 점도 혹평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제 입맛대로 구성하는 자들이 평범한 여성 하나를 놓고 이토록 공을 들여 잔혹한 게임을 벌인 이유가 겨우 이거였어?”라는 한탄이 저절로 튀어나왔는데, 말하자면 5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 전체를 허망하게 만든 엔딩이라고 할까요?

 

애초 막심 샤탕은 기승전결을 갖춘 액션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음모론에 관한 일장연설, 특히 미국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조작하고 사익을 위해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설명한 한 블로거의 포스트에 온힘을 쏟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모론에 관한 강의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익숙한 내용들이라 어느 지점부터는 저절로 건너뛰게 할 정도로 지루하기만 했고, 안 그래도 비슷한 상황만 반복하고 있는 추격전의 긴장감마저 훅 떨어뜨리는 부작용까지 자아내고 말았습니다.

 

명품재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기억의 오류 때문에 주말 하루를 꼬박 소진한 것도 그저 아깝기만 할뿐입니다. 다만, 야엘과 토마스가 그림자를 상대로 벌이는 진실 찾기 이야기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지만 음모론 자체가 낯설거나 궁금한 독자라면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구판인 악의 유희로 검색하면 좀더 많은 서평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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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클로버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다인 옮김 / 허밍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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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를 이용하여 여러 사상자를 낸 도요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과 언론은 12년 전 훗카이도의 하이토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가족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에 주목합니다. 두 사건 모두 똑같은 성분의 비소가 범행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포된 도요스 사건 범인에겐 12년 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이후 경찰은 그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용의선상에 올랐던 장녀 아카이 미쓰바가 현재의 사건에 연관된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한편 신문사에서 정년퇴직 후 계열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가쓰키 쓰요시는 12년 전 하이토 마을에서 취재했던 일을 회상하며 가족들이 살해된 테이블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던 미쓰바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도요스 사건과 미쓰바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확신하곤 하이토 마을로 향합니다.

 

마사키 도시카는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등 두 작품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후속작을 기다리게 될 정도로 팬이 됐고 그래서 레드 클로버의 출간소식은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앞선 두 작품은 각각 자식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크게 뒤틀어진 여러 어머니’, ‘불의의 사고 혹은 사건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여러 부부를 등장시켜 정교하고 농밀한 미스터리와 서사를 선보인 수작들인데, ‘레드 클로버는 마사키 도시카의 진가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입니다.

 

잡지사 기자인 가쓰키가 화자이자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추적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수많은 화자가 번갈아가며 사건 이면의 지독한 사연들과 일그러진 감정들을 설명합니다. 서로를 혐오하는 작은 마을 내의 두 세력, 누군가를 저주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흉흉한 분위기의 낡은 신사, 가족 혹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이라 여기며 혐오와 살의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악연과 애증과 분노가 20년도 넘게 층층이 쌓여왔는지를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때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지거나 더러운 것에 오염된 듯한 불편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누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린다. 누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인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자 살아남는 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p320)

 

이 세상은 인간의 추악함으로 만들어져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어둡고 더러운 사념이 복잡하게 뒤섞여 이 세상의 공기가 된 것이다.” (p388)

 

가쓰키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진 미쓰바를 찾기로 결심한 건 단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12년 전 오직 자신만이 목격했던 가족이 죽은 현장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위화감 이상의 특별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죽인 게 맞다면 왜? 12년이 지나 도요스 사건의 범인에게 비소를 건넸다면 왜? 어느 날 갑자기 하이토 마을을 떠난 이유는?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쓰키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미쓰바와 마주하고 싶다는 열망에 여전히 미쓰바 가족을 벌레처럼 기억하고 있는 하이토 마을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취재합니다. 동시에 자신 외에 미쓰바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감지하곤 기자로서의 위기감과 함께 어떻게든 한발 앞서 미쓰바를 찾아내야 한다는 초조감에 휩싸입니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관계도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작품 내용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주, 분노, 혐오 등 인물들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던 갖가지 감정들이 폭로되고, 엉킨 실타래 같던 과거사와 사건들이 거듭된 반전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는 등 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채 도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분명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과 오염된 듯한 불편함을 피할 길은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페이지터너라는 생각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전작을 뛰어넘는 그녀의 진가를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이 작품으로 그녀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에 대한 사심 가득한 서평이긴 하지만 비슷한 취향의 독자라면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제 서평에 충분히 공감해줄 거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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