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제국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27살의 야엘 말랑은 파리의 박제 가게에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와 그것이 보낸 메시지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우연히 알게 된 프리랜서 기자 토마스와 함께 메시지를 해석하며 그 안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 야엘은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구성하는 숨은 권력자, 그림자들의 존재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런 자들이 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수수께끼를 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은 물론 자신과 토마스마저 거듭 살해될 위기에 처하자 야엘은 그림자들의 정체와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0년도 훌쩍 넘어 줄거리는 거의 가물가물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이 작품이 처음에(2008) ‘악의 유희라는 제목으로 출간돼서 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산 점입니다.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또는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여겼던 독자들은 뒤늦게야 출판사가 원제와 전혀 관련 없는 번역제목을 붙였음을, 악의 3부작의 후광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을 부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3년 후인 2011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그림자의 제국이라는 새 제목이 붙었는데, ‘Les Arcanes du Chaos’(직역하면 카오스의 비밀’)라는 원제와 거리가 있긴 해도 그나마 수긍할 만한 번역제목이었습니다.

 

서평에 앞서 결론부터 말하면 그림자의 제국은 제가 갖다 붙인 명품재독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입니다. “인상 깊게 읽었다는 기억 자체가 오류였다는 뜻인데, 아마도 악의 3부작직후에 읽은 작품이라 그런 오류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악의 3부작이 조슈아 브롤린이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앞세운 잔혹한 연쇄살인 스릴러였던 반면 그림자의 제국은 이른바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운 진실 찾기 추격 스릴러입니다. 야엘이라는 평범한 여성이 그림자들이라는 가공할 집단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하게 망가지는 가운데 진실을 찾아 위험천만한 여정을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 집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들, 누군가 자신의 집에 몰래 침입한 것이 분명한 흔적들...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되돌릴 방법은 난해한 문구와 성경 구절이 뒤섞인 그림자들의 메시지와 수수께끼를 푸는 것밖에 없다고 여긴 야엘은 토마스의 도움을 받아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끊임없이 추격당하자 그림자들의 진의를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혹평의 대부분은 식상한 음모론에 관한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관한 장황한 설명에서부터 1달러 지폐의 상징들, 케네디 암살, 쿠바 공습, 베트남 전쟁, 9.11 테러 등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음모론에 대한 강의식 서사가 독자들을 질리게 한 탓입니다. 또한 주인공 야엘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점 왜 하필 나야?” - 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이 충격이나 반전과는 거리가 먼,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허술했던 점도 혹평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제 입맛대로 구성하는 자들이 평범한 여성 하나를 놓고 이토록 공을 들여 잔혹한 게임을 벌인 이유가 겨우 이거였어?”라는 한탄이 저절로 튀어나왔는데, 말하자면 5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 전체를 허망하게 만든 엔딩이라고 할까요?

 

애초 막심 샤탕은 기승전결을 갖춘 액션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음모론에 관한 일장연설, 특히 미국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조작하고 사익을 위해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설명한 한 블로거의 포스트에 온힘을 쏟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모론에 관한 강의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익숙한 내용들이라 어느 지점부터는 저절로 건너뛰게 할 정도로 지루하기만 했고, 안 그래도 비슷한 상황만 반복하고 있는 추격전의 긴장감마저 훅 떨어뜨리는 부작용까지 자아내고 말았습니다.

 

명품재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기억의 오류 때문에 주말 하루를 꼬박 소진한 것도 그저 아깝기만 할뿐입니다. 다만, 야엘과 토마스가 그림자를 상대로 벌이는 진실 찾기 이야기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지만 음모론 자체가 낯설거나 궁금한 독자라면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구판인 악의 유희로 검색하면 좀더 많은 서평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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