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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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에게 중형을 구형하기로 소문난 서울 남부지검 검사 정해심은 어느 날 충격적인 연락을 받습니다. 치매로 인해 요양원에 입원중인 아버지 정만선이 파킨슨병 환자인 할머니 고해심을 욕조 안에서 성폭행하려다가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의 터무니없는 합의금 요구도 황당했지만, 아무리 치매라고 해도 평생 식물처럼 살아온 아버지가 성욕을 발산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던 정해심은 요양원의 CCTV를 살피던 중 아버지와 할머니 고해심이 예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두 사람의 관계가 수십 년 전 남해도 앵강만()의 한 어촌에서 시작됐으며, 두 사람이 같은 요양원에 머물게 된 것도, 자신과 할머니의 이름이 똑같은 점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아냅니다.

 

네 번째 여름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무고함을 입증하려는 딸 정해심의 진실 찾기가 핵심인 미스터리지만, 실은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나 탐욕과 오해와 질투가 빚어낸 겹겹의 악의들로 인해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만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그 사랑은 나는 물귀신 같은 그녀에게로 빠져들고 또 빠져들고 매일매일 그녀 속에서 죽었다 깨어난다. 그 여자, 내 무덤.”이라는 절절한 시어를 낳기도 했지만, “첫 번째 여름에 내 아버지가 죽었고, 두 번째 여름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고, 세 번째 여름에는 내 남편이 죽었고...”라는 프롤로그대로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그 비극적인 사랑의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깊숙이 봉인해놓은 비밀들이 50년이란 시간을 건너뛴 현재 하나둘씩 해제되는 과정을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내밀하고 담담한 문장들을 통해 그려냅니다.

 

애초 정해심의 목적은 아버지 정만선과 할머니 고해심이 과거부터 알던 관계였으며 욕조 안에서 벌어진 일은 성폭행이 아니라 일종의 합의된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해심은 고해심의 가족들의 진술과 검찰 수사관이 챙겨온 정보를 통해 짧게는 50년 전, 길게는 70년도 넘은 과거에 벌어진 앵강만에서의 피할 수 없었던 참혹한 사건들과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탐욕이 어떻게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와 질투를 심었는지, 또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몇 사람의 목숨을 거두거나 몇 사람의 인생항로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는지를 하나둘씩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구도 덕분에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사랑과 운명이란 주제는 또 그 나름대로의 힘을 탄탄하게 발휘했고, 그 결과 짧은 분량임에도 몰입감과 속도감이 한껏 고조됐다는 생각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조금씩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은 조바심을 나게 할 정도로 긴장감 넘쳤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몰고 온 사랑의 파국은 어떤 멜로 스토리보다 애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덧붙여 남해도 앵강만 어촌마을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이고 매력적인 묘사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살아 움직이는 검은 뻘과 바다, 코끝을 찌르는 달큰한 무화과 향기, 펄떡거리는 병어 비린내, 그리고 백중사리 때맞춰 올라오는 늦태풍등 시각과 후각을 맹렬히 자극하는 문장들이 실제로 남해로 귀어한 작가의 산물이란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칫 단순한 미스터리 멜로가 될 수도 있었던 소재를 복잡하지만 빈틈없이 정교하게 설계한 작가의 힘은 최근 읽은 그 어떤 한국 장르물보다 빼어났는데, 그래선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되는 나머지 작품들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한 편은 블랙코미디이고 또 다른 한 편은 사건성이 곁들여진 풍자극으로 보이는데 네 번째 여름만큼의 필력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기분과 여운을 전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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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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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할머니 영빈마마의 위패를 모신 의열궁의 기와 수십 장이 사라지는 변고가 일어납니다. 좌우포도대장은 평소 맹렬한 견원지간이지만 왕의 불벼락이 더 두려운 탓에 협력수사를 결심하곤 각각 군관 한 명씩을 추천하여 비밀수사를 맡깁니다. 바로 좌포청의 쇠도리깨이종원과 우포청의 육모방망이육중창이 그들입니다. 정반대의 성격과 외모를 지닌 그들은 의열궁 기와 사건은 물론 백주대낮에 발견된 20대 여성 시신 사건까지 맡게 됩니다.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는 현대물과는 사뭇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CCTVDNA 감식기술도 없이 오로지 물증과 목격자와 탐문에 의존해야 하다 보니 눈높이가 한없이 높아진 요즘 독자들에게는 다소 유치하거나 어리숙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만 바로 그 점이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의 매력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선의 형사들은 팩션, 즉 실존했던 인물들과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입니다. 관할권과 포상을 두고 서로 으르렁대던 좌우포청에서 차출된 명콤비 이종원과 육중창은 추안급국안(조선 후기 중죄인의 공초를 기록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그 외에 형조참의 정약용과 정조 등도 가세하여 팩션의 맛을 더 깊게 만들어줍니다.

 

크게 두 개의 사건 의열궁의 사라진 기와, 20대 여인의 변사 사건 이 등장하는데, 전자의 경우 궁궐에서 사용하는 기와를 훔쳐간 범인의 동기를 파악하기 힘든는 난제였고, 후자는 일찌감치 범인을 특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권력자들의 농간이 이종원과 육중창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20대 여인 변사 사건이 물증과 단서, 탐문과 자백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탐정 미스터리라면 사라진 기와 사건은 좀더 큰 규모의 궁중 액션사극의 풍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형조참의인 정약용과 정조가 카메오 이상의 역할로 두 사건에 모두 개입하면서 이종원과 육중창은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맹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얻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두 주인공 이종원과 육중창의 콤비 플레이가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는데, 체구나 성격 모두 정반대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합을 맞춰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캐릭터 플레이를 볼 수 없었던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사건이 너무 빠른 속도로 전개되다 보니 둘만의 케미라든가 각각의 개인사, 그리고 크고 작은 갈등이 언급될 틈 자체가 없었던 탓인데 어쩌면 후속편을 염두에 둔 작가의 포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약용과의 협업 과정을 보면 아무래도 이종원과 육중창의 활약이 이 한 편으로 끝날 것 같진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사극 미스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받은 점도 아쉬웠는데, 기름기 하나 없이 살코기로만 이뤄진 듯한 이야기는 긴장감과 속도감은 뛰어날지 몰라도 묵직함을 만끽하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주인공도, 악당도, 조연들도 딱 자기가 할 말과 역할만 하고 있었고 사건을 둘러싼 분위기나 정황 묘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할까요?

 

추안급국안에 이종원과 육중창의 활약이 더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없더라도 픽션을 통해 그들의 다음 활약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높아진 눈높이와는 별개로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만의 매력은 특별한 간식 같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두 주인공의 개인사도 무척 궁금한데 후속편이 나온다면 그 부분도 상세히 그려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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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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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 이후 학교를 그만둔 17살 장민준이 몸을 의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채 때문에 엄마를 압박했던 조폭 보스 백기입니다. 엄마를 죽인 게 백기라고 의심했지만 뒤늦게 엄마가 자살한 걸로 밝혀지자 자신의 싸움꾼 재능을 알아본 백기의 스카웃 제의에 응한 것입니다. 백기의 카리스마에 빠진 민준은 이후 그를 추종하며 뛰어난 싸움꾼 기질을 발휘했고 2년 만에 2인자 자리에 오릅니다.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절대 살인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민준은 죠스라 이름 붙인 공업용 줄, 일명 야스리하나만으로 그 바닥에서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VVIP들만 드나드는 강남 클럽을 관리하던 어느 날, 민준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리고 선한 누나 영선에게 빠져듭니다. 하지만 민준은 하루아침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잃습니다. 그것도 백기가 영선을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끔찍한 소식과 함께 말입니다.

 

읽는 동안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 김언수의 뜨거운 피’, 그리고 청부살인을 다룬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의 고전적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란 얘긴데, 하지만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이 야스리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조폭 액션을 펼친다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설정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또 그 또래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와 혼란도 그려지는데, 덕분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성장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구축했다는 생각입니다.

 

민준의 주위엔 그의 성장을 부추기거나 성장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고도비만으로 인해 왕따를 당하다가 민준의 도움을 받았던 같은 반 여학생 수빈, 보스이자 친형과도 같은 존재인 백기, 족히 열 살 이상은 더 많은데도 꼬박꼬박 민준을 형님으로 모시는 조직원 땅콩,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비참하게 살해된 첫사랑 영선이 그들입니다. 무엇보다 교복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제 또래들과 달리 야스리하나에 의지한 채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성장 환경이다 보니 민준의 10대 후반은 롤러코스터마냥 하루에도 몇 번씩 큰 낙차를 그리면서 위태롭게 흘러갑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민준이 악전고투하며 영선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과정입니다. 형사들은 양아치가 창녀를 죽였어. 세상에서 제일 흔한 살인이야.”라며 백기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영선이 살해당한 VVIP 5번방에 머물던 또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준은 양지의 재벌과 음지의 재벌, 라이벌 폭력조직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 등 숱한 위험천만한 추격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지난한 진범 찾기는 몇 차례의 배신과 반전을 통해 성공하고 민준을 위협하던 자들은 나름대로 응징을 받게 되지만, 멘토와 첫사랑을 잃은 민준의 상처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습니다.

 

(민준)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이젠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

(수빈) “당연히 세상은 그대로야. 그냥 네가 처음부터 몰랐던 것뿐이지.” (p423)

 

이전까지 자기계발 서적만 집필했다는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누아르는 물론이고 풍경과 심리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어서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달콤한 인생’, ‘뜨거운 피’, ‘방의강 시리즈에 비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라는 점은 아쉬웠지만(0.5개가 빠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조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생생하게 빛나서 혹시라도 장민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더 반가울 것 같기도 합니다. 후반에 그 가능성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던져지긴 했는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는다면 떡밥 이상의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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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주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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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동과 영주 부근의 소도시 섭주의 초등학교 교사 강서경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성격 탓에 왕따에 가까운 처지지만 그저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느 날 인근 붕평마을의 정자에 가면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꾼 그녀는 폭우 속에서 붕평마을로 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보자기에 싸인 특이한 방울과 거울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손에 넣은 이후로 강서경은 끔찍한 악몽과 환상은 물론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독한 몸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점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뱀이 나타나는가 하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처음 읽는 박해로의 장편소설입니다. 실은 2018년에 출간된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를 접했지만 초반부에 책을 덮은 탓에 인연을 맺지 못했고,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작품 역시 계속 관심 밖에 뒀던 게 사실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를 무척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로의 호러는 제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끝까지 읽은 박해로의 작품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2014년에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에 실린 단편 무당아들이 그것인데, 메모해놓은 줄거리를 보니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특히 앞선 작품들의 공통된 무대였던 소도시 섭주를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 중도 포기했던 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흉가에 방치돼있던 특이한 방울과 거울, 그것을 손댄 자들에게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과 지독한 몸살, 사방에서 뱀이 출몰하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그리고 소도시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과 전설 등 매력적인 호러 코드들이 잔뜩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다채로운데, 이기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는 소도시 초등학교 교사들, 꽤 깊은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무당들, 무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목사, 무속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30년 넘게 실종상태인 삼촌을 둔 경찰 등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일게 하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속도감도 빠르고 지루할 틈 없이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다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사파왕과 우녀라는 기이한 괴담까지 가미돼서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개인적인 호러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공포 자체를 서서히 느끼고 만끽하도록 이끄는 게 아니라 조금은 강요하듯 설명하는 점이 거슬렸는데, 그 방법 역시 대부분 이나 환각이라는 편리한 장치에 의존한 점이 안이하게 느껴졌습니다.

, 이야기를 이끌던 주인공 강서경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감을 잃어버렸는데, 반면 할리우드 모험극을 떠올리게 하는 전설 속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의 방향 자체가 산만해진 점도 아쉬웠습니다. 긴장감 넘치고 소름 돋는 호러가 다소 생뚱맞은 액션극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섬뜩한 죽음의 의례를 소재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불쾌한 공포심을 안겨줬던 미쓰다 신조의 사관장’(蛇棺葬)백사당’(百蛇堂)을 닮은 호러물을 기대했던 탓에 섭주의 막판 전개가 더 아쉽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웠던 건 표지입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사악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귀여운(?) 다섯 마리의 뱀 이미지는 이 작품을 아동용 호러처럼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다 읽은 뒤에 다시 표지를 봤을 땐 그 귀여움이 더더욱 아쉽게만 여겨졌습니다.

 

이 작품 덕분에 섭주라는 공간을 무대로 이어져온 박해로의 호러물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섭주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전 작품들에서 채워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개척하고 꾸준히 이야기를 자아낸 박해로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감을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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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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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광기와 욕망이 뒤섞인 ‘7년의 밤’, 악의 민낯을 확실히 보여준 ‘28’. 이 두 작품에 빠져 정유정의 팬이 됐지만 이른바 악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했던 종의 기원은 전작보다 을 심오하게 다뤄야 한다는 작가의 중압감이 역력했던 탓에 실망감이 컸던 작품이었습니다.

그 뒤에 나온 진이, 지니다정한 정유정이라는 카피 때문에 외면했는데, ‘완전한 행복은 그 제목만으로도 기대감이 생겼고, 다시 정유정!”이란 카피가 붙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유정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완전한 행복이라면 분명 타인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야기의 몸체는 ‘7년의 밤이나 ‘28’에 못잖은 서늘한 공포로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 딸 지유를 둔 신유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물론 그에 저항하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은 사이코패스이자 나르시시스트입니다. 타고난 그녀의 악마성에 기름을 부은 건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할머니의 시골집과 인근의 반달늪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 지유를 낳았지만 그녀의 지독한 자기애는 전혀 무뎌지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한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태연히 타인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이끌어내곤 합니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는 지론대로 그녀 앞의 불행의 가능성들은 하나하나 뺄셈에 의해 소멸되고 맙니다.

 

예상했던대로 첫 페이지부터 온몸을 짓누르는 불편함과 불쾌감이 찾아들었습니다. 중반쯤 지날 쯤엔 몸은 중노동의 뒤끝처럼 천근만근이었고 머릿속은 급성 스트레스의 공격에 넉 다운되고 말았습니다. ‘7년의 밤이 그랬고 ‘28’은 훨씬 더 가혹했지만 완전한 행복역시 만만치 않은 정유정다움을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 뺄셈에 뺄셈을 거듭하는 신유나의 행보는 평범한 긴장감이나 공포심과는 레벨이 달랐고, 오래 전에 본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저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숨을 턱턱 조이는 마성까지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신유나 본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챕터는 없다는 점입니다. 신유나의 심리나 감정이 모두 타인의 입, 표정, 행동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안 그래도 읽던 도중에 좀 의아하다 여겼는데, 정유정은 작가의 말을 통해 악인의 내면이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의 행복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스스로도 화자 가운데 주인공이 없는 서사에 대한 첫 도전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보다는 어떻게?”를 더 디테일하게 그림으로써 뺄셈의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묘사했다고 할까요?

 

캐릭터만큼 눈길을 끈 건 공간입니다. 공간은 장르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인데, 특히 정유정의 작품은 공간 자체가 배후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7년의 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이 댐으로 둘러싸인 불길하고 음산한 호수 세령호였고, ‘28’의 주 무대가 정체불명의 빨간 눈 괴질때문에 봉쇄된 뒤 피범벅의 아수라장이 돼버린 화양시였다면, ‘완전한 행복은 폐가나 다름없는 시골집과 그 일대의 습지, 그리고 그 습지 끝에 있는 반달늪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 장소들은 사이코패스이자 나르시시스트인 신유나의 캐릭터와 일심동체처럼 느껴지는 악의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 가차 없이 뺄셈을 휘두르는 신유나에게 시골집과 반달늪은 말하자면 사악한 에너지를 무한충전 받는 성소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사족이지만 밤마다 기괴한 울음을 내지르는 되강오리의 존재는 반달늪의 공포를 더욱 배가시키는 소름 돋는 설정이었습니다.

 

분명 몇몇 곳에서 아쉬움을 느낀 대목들이 있긴 했는데,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든 건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불온하고 불편한 여운에 압도당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5개는 어렵고, 0.5개 정도는 빼자.”라고 생각했던 일만 떠오를 뿐입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김효선 MD에 따르면 완전한 행복은 정유정의 욕망 3부작중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매번 스트레스에 사로잡히면서도 정유정의 마력에 허우적대는 독자 입장에서 욕망 3부작이란 타이틀은 그저 반가운 소식일 뿐입니다. 다음 작품에선 과연 어떤 위험한 욕망이 그려질지 벌써부터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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