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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끈적한 광기와 욕망이 뒤섞인 ‘7년의 밤’, 악의 민낯을 확실히 보여준 ‘28’. 이 두 작품에 빠져 정유정의 팬이 됐지만 이른바 ‘악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했던 ‘종의 기원’은 전작보다 ‘악’을 심오하게 다뤄야 한다는 작가의 중압감이 역력했던 탓에 실망감이 컸던 작품이었습니다.
그 뒤에 나온 ‘진이, 지니’는 “다정한 정유정”이라는 카피 때문에 외면했는데, ‘완전한 행복’은 그 제목만으로도 기대감이 생겼고, 왜 “다시 정유정!”이란 카피가 붙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유정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완전한 행복이라면 분명 타인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야기의 몸체는 ‘7년의 밤’이나 ‘28’에 못잖은 서늘한 공포로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 딸 지유를 둔 신유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물론 그에 저항하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은 사이코패스이자 나르시시스트입니다. 타고난 그녀의 악마성에 기름을 부은 건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할머니의 시골집과 인근의 반달늪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 지유를 낳았지만 그녀의 지독한 자기애는 전혀 무뎌지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한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태연히 타인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이끌어내곤 합니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는 지론대로 그녀 앞의 ‘불행의 가능성들’은 하나하나 뺄셈에 의해 소멸되고 맙니다.
예상했던대로 첫 페이지부터 온몸을 짓누르는 불편함과 불쾌감이 찾아들었습니다. 중반쯤 지날 쯤엔 몸은 중노동의 뒤끝처럼 천근만근이었고 머릿속은 급성 스트레스의 공격에 넉 다운되고 말았습니다. ‘7년의 밤’이 그랬고 ‘28’은 훨씬 더 가혹했지만 ‘완전한 행복’ 역시 만만치 않은 ‘정유정다움’을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 뺄셈에 뺄셈을 거듭하는 신유나의 행보는 평범한 긴장감이나 공포심과는 레벨이 달랐고, 오래 전에 본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저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숨을 턱턱 조이는 마성까지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신유나 본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챕터는 없다는 점입니다. 신유나의 심리나 감정이 모두 타인의 입, 표정, 행동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안 그래도 읽던 도중에 좀 의아하다 여겼는데, 정유정은 ‘작가의 말’을 통해 “악인의 내면이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의 행복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스스로도 ‘화자 가운데 주인공이 없는 서사’에 대한 첫 도전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왜?”보다는 “어떻게?”를 더 디테일하게 그림으로써 ‘뺄셈의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묘사했다고 할까요?
캐릭터만큼 눈길을 끈 건 ‘공간’입니다. 공간은 장르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인데, 특히 정유정의 작품은 공간 자체가 ‘배후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7년의 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이 댐으로 둘러싸인 불길하고 음산한 호수 세령호였고, ‘28’의 주 무대가 정체불명의 ‘빨간 눈 괴질’ 때문에 봉쇄된 뒤 피범벅의 아수라장이 돼버린 화양시였다면, ‘완전한 행복’은 폐가나 다름없는 시골집과 그 일대의 습지, 그리고 그 습지 끝에 있는 반달늪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 장소들은 사이코패스이자 나르시시스트인 신유나의 캐릭터와 일심동체처럼 느껴지는 악의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 가차 없이 ‘뺄셈’을 휘두르는 신유나에게 시골집과 반달늪은 말하자면 사악한 에너지를 무한충전 받는 성소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사족이지만 밤마다 기괴한 울음을 내지르는 되강오리의 존재는 반달늪의 공포를 더욱 배가시키는 소름 돋는 설정이었습니다.
분명 몇몇 곳에서 아쉬움을 느낀 대목들이 있긴 했는데,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든 건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불온하고 불편한 여운에 압도당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별 5개는 어렵고, 0.5개 정도는 빼자.”라고 생각했던 일만 떠오를 뿐입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김효선 MD에 따르면 ‘완전한 행복’은 정유정의 ‘욕망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매번 스트레스에 사로잡히면서도 정유정의 마력에 허우적대는 독자 입장에서 ‘욕망 3부작’이란 타이틀은 그저 반가운 소식일 뿐입니다. 다음 작품에선 과연 어떤 위험한 욕망이 그려질지 벌써부터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