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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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에게 중형을 구형하기로 소문난 서울 남부지검 검사 정해심은 어느 날 충격적인 연락을 받습니다. 치매로 인해 요양원에 입원중인 아버지 정만선이 파킨슨병 환자인 할머니 고해심을 욕조 안에서 성폭행하려다가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의 터무니없는 합의금 요구도 황당했지만, 아무리 치매라고 해도 평생 식물처럼 살아온 아버지가 성욕을 발산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던 정해심은 요양원의 CCTV를 살피던 중 아버지와 할머니 고해심이 예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두 사람의 관계가 수십 년 전 남해도 앵강만()의 한 어촌에서 시작됐으며, 두 사람이 같은 요양원에 머물게 된 것도, 자신과 할머니의 이름이 똑같은 점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아냅니다.

 

네 번째 여름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무고함을 입증하려는 딸 정해심의 진실 찾기가 핵심인 미스터리지만, 실은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나 탐욕과 오해와 질투가 빚어낸 겹겹의 악의들로 인해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만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그 사랑은 나는 물귀신 같은 그녀에게로 빠져들고 또 빠져들고 매일매일 그녀 속에서 죽었다 깨어난다. 그 여자, 내 무덤.”이라는 절절한 시어를 낳기도 했지만, “첫 번째 여름에 내 아버지가 죽었고, 두 번째 여름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고, 세 번째 여름에는 내 남편이 죽었고...”라는 프롤로그대로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그 비극적인 사랑의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깊숙이 봉인해놓은 비밀들이 50년이란 시간을 건너뛴 현재 하나둘씩 해제되는 과정을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내밀하고 담담한 문장들을 통해 그려냅니다.

 

애초 정해심의 목적은 아버지 정만선과 할머니 고해심이 과거부터 알던 관계였으며 욕조 안에서 벌어진 일은 성폭행이 아니라 일종의 합의된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해심은 고해심의 가족들의 진술과 검찰 수사관이 챙겨온 정보를 통해 짧게는 50년 전, 길게는 70년도 넘은 과거에 벌어진 앵강만에서의 피할 수 없었던 참혹한 사건들과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탐욕이 어떻게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와 질투를 심었는지, 또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몇 사람의 목숨을 거두거나 몇 사람의 인생항로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는지를 하나둘씩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구도 덕분에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사랑과 운명이란 주제는 또 그 나름대로의 힘을 탄탄하게 발휘했고, 그 결과 짧은 분량임에도 몰입감과 속도감이 한껏 고조됐다는 생각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조금씩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은 조바심을 나게 할 정도로 긴장감 넘쳤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몰고 온 사랑의 파국은 어떤 멜로 스토리보다 애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덧붙여 남해도 앵강만 어촌마을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이고 매력적인 묘사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살아 움직이는 검은 뻘과 바다, 코끝을 찌르는 달큰한 무화과 향기, 펄떡거리는 병어 비린내, 그리고 백중사리 때맞춰 올라오는 늦태풍등 시각과 후각을 맹렬히 자극하는 문장들이 실제로 남해로 귀어한 작가의 산물이란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칫 단순한 미스터리 멜로가 될 수도 있었던 소재를 복잡하지만 빈틈없이 정교하게 설계한 작가의 힘은 최근 읽은 그 어떤 한국 장르물보다 빼어났는데, 그래선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되는 나머지 작품들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한 편은 블랙코미디이고 또 다른 한 편은 사건성이 곁들여진 풍자극으로 보이는데 네 번째 여름만큼의 필력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기분과 여운을 전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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