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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평점 :
엄마의 죽음 이후 학교를 그만둔 17살 장민준이 몸을 의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채 때문에 엄마를 압박했던 조폭 보스 백기입니다. 엄마를 죽인 게 백기라고 의심했지만 뒤늦게 엄마가 자살한 걸로 밝혀지자 자신의 싸움꾼 재능을 알아본 백기의 스카웃 제의에 응한 것입니다. 백기의 카리스마에 빠진 민준은 이후 그를 추종하며 뛰어난 싸움꾼 기질을 발휘했고 2년 만에 2인자 자리에 오릅니다.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절대 살인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민준은 죠스라 이름 붙인 공업용 줄, 일명 ‘야스리’ 하나만으로 그 바닥에서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VVIP들만 드나드는 강남 클럽을 관리하던 어느 날, 민준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리고 선한 누나 영선에게 빠져듭니다. 하지만 민준은 하루아침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잃습니다. 그것도 백기가 영선을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끔찍한 소식과 함께 말입니다.
읽는 동안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 김언수의 ‘뜨거운 피’, 그리고 청부살인을 다룬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의 고전적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란 얘긴데, 하지만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이 ‘야스리’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조폭 액션을 펼친다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설정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또 그 또래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와 혼란도 그려지는데, 덕분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성장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구축했다는 생각입니다.
민준의 주위엔 그의 성장을 부추기거나 성장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고도비만으로 인해 왕따를 당하다가 민준의 도움을 받았던 같은 반 여학생 수빈, 보스이자 친형과도 같은 존재인 백기, 족히 열 살 이상은 더 많은데도 꼬박꼬박 민준을 형님으로 모시는 조직원 땅콩,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비참하게 살해된 첫사랑 영선이 그들입니다. 무엇보다 교복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제 또래들과 달리 ‘야스리’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성장 환경이다 보니 민준의 10대 후반은 롤러코스터마냥 하루에도 몇 번씩 큰 낙차를 그리면서 위태롭게 흘러갑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민준이 악전고투하며 영선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과정입니다. 형사들은 “양아치가 창녀를 죽였어. 세상에서 제일 흔한 살인이야.”라며 백기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영선이 살해당한 VVIP 5번방에 머물던 또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준은 양지의 재벌과 음지의 재벌, 라이벌 폭력조직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 등 숱한 위험천만한 추격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지난한 진범 찾기는 몇 차례의 배신과 반전을 통해 성공하고 민준을 위협하던 자들은 나름대로 응징을 받게 되지만, 멘토와 첫사랑을 잃은 민준의 상처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습니다.
(민준)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이젠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
(수빈) “당연히 세상은 그대로야. 그냥 네가 처음부터 몰랐던 것뿐이지.” (p423)
이전까지 자기계발 서적만 집필했다는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누아르는 물론이고 풍경과 심리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어서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달콤한 인생’, ‘뜨거운 피’, ‘방의강 시리즈’에 비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라는 점은 아쉬웠지만(별 0.5개가 빠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조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생생하게 빛나서 혹시라도 ‘장민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더 반가울 것 같기도 합니다. 후반에 그 가능성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던져지긴 했는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는다면 떡밥 이상의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