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형태
홍정기 지음 / 서랍의날씨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삼은 엽기적이고 잔혹한 미스터리 단편집 전래 미스터리와 트릭에 반전의 묘미까지 갖춘 호러 단편집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으로 주목받은 홍정기의 세 번째 단독 작품입니다. 그동안 수상작품집이나 계간지, 앤솔로지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해왔지만 아무래도 단독 작품에 대한 기대가 더 크기도 했고, 무엇보다 살의의 형태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 때문에 이번 새 작품은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계간지 등을 통해 이미 소개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각각 무구한 살의’, ‘합리적 살의’, ‘보이지 않는 살의’, ‘백색 살의’, ‘영광의 살의’, ‘시기의 살의라는 제목대로 다양한 종류의 살의와 살인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범인이 설계한 정교한 트릭, 그 트릭을 부수는 주인공의 활약, 그리고 단편이지만 마지막 한 페이지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반전이 매 수록작마다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제목에서 풍기는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는 여러 작품에 다양한 형태로 배어있습니다. 사건 현장을 완벽한 밀실로 설정한 경우도 있고, 교과서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나름 새로움을 부여한 트릭과 반전도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역대급 소시오패스의 싹이 엿보이는 초등학교 3학년생이 등장한 무구한 살의와 너무나도 참혹한 사건이지만 막판에 드러난 진실이 웃지 못 할 블랙 코미디 혹은 무자비한 희비극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던 영광의 살의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또 작가의 분신인 작가 홍은기가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살의는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살짝 작위적인 트릭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세 작품 모두 비주얼도 좋아서 B급 정서가 충만한 단편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섯 편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주인공은 천안 동남경찰서에 근무하는 10년 차 형사 오영섭입니다. 아내와 두 딸이 있는 30대 중반인 그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가장이자 형사로서 무척 현실감 있는 캐릭터입니다. 좀더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예리한 추리를 통해 범인들의 트릭을 부수는 대단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섯 편 가운데 한 편을 제외하곤 범인의 범행동기를 모두 개인적인 차원으로 설정했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장편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두 편의 전작을 읽고 쓴 서평에 공통적으로 다소 가벼워 보인 문장과 서사가 아쉬웠다.”라고 평한 적 있는데, 이번 작품은 묵직한 장편 서사를 기대해도 좋을 만큼 탄탄해 보였고, 몇몇 수록작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가능성도 충분히 엿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홍정기 특유의 호러 코드가 곁들여진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더욱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누군가에게 강력추천하기에는 조금씩 모자란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매력, 트릭의 완성도, 좀더 무게감이 필요한 서사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주인공도, 트릭도, 서사도 실은 각 수록작의 내용에 걸맞게 잘 설정돼있긴 합니다. 오히려 가벼운 이야기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제 취향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으로 누군가에게 강력추천을 하려면 뭔가 하나는 특별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 특별함을 더욱 기대한다는 의미에서 만점을 주지 못한 것이니 별 4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성과 개성을 갖춘 일본 미스터리나 스케일과 무게감이 남다른 영미권 스릴러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한국의 장르물이 종종 성에 차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개성과 매력을 갖춘 한국의 장르작가도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간이 나오는지 늘 관심 있게 지켜보는 한국 장르작가가 꽤 있는데 홍정기 역시 그 중 한 명입니다. 여러 편의 단편을 통해 필력을 인정받은 그가 이제는 자신만의 장기를 쏟아 부은 장편으로 독자와 만나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의관 서세현은 소도시 용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피해자를 부검하던 중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죽은 피해자를 해부한 뒤 실로 꿰맨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서세현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범행수법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바로 오래 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연쇄살인마이자 친아빠인 윤조균입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만일 그가 경찰의 손에 잡히고 자신의 친아빠임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미래는 완전히 파멸될 것이라고 여긴 서세현은 경찰보다 먼저 윤조균을 찾아내 죽이기로 합니다. 일부러 용천경찰서 인근에 거처를 삼은 서세현은 담당 형사인 정정현에게 접근하여 수사 정보를 빼내려 합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서세현은 윤조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머물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독특한 인물들을 앞세운 연쇄살인 스릴러입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의관 서세현, 소년이던 21년 전 연쇄살인마 윤조균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적 있으며 경찰이 돼서도 미제살인사건에 집착하는 신참 강력팀장 정정현, 그리고 20여 년에 걸쳐 연쇄살인을 저질러 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윤조균이 그들입니다.

 

법의관 서세현이 아버지이자 연쇄살인마인 윤조균을 쫓는 이유는 정의감도 사명감도 아닙니다. 그가 체포되어 과거 연쇄살인행각이 폭로될 경우 미성년자 시절 자신의 공범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법의관 딸과 연쇄살인마 아버지의 대결이라는 구도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일으키는 설정인데, 거기에 가세한 형사 정정현은 베테랑도 아니고 마초 기질도 전혀 없는, 오히려 숙맥 같은 인물이라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어차피 광역수사대가 사건을 접수할 거라는 생각에 용천경찰서 내 누구도 사건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긴 하지만 그는 경험도, 추리력도 딸리는 초짜 팀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에겐 미제사건에 대한 특별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연쇄살인사건이 과거의 미제사건들과 접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수사 자료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정현의 미제사건에 대한 집착은 그와 공조수사를 벌이던 서세현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큰 그림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법의관과 형사로 시작되지만 곧바로 형사가 쫓는 연쇄살인마와 그 공범이라는 구도가 동시에 전개되면서 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핸디맨이나 깜빡이는 소녀들같은 영미권 스릴러에서도 종종 차용하는 연쇄살인마의 자식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흡입력이 있는데 메스를 든 사냥꾼의 경우 연쇄살인마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이라는 설정까지 더해져서 그 구도가 더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큰 그림에 비해 디테일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쉴 틈도 없이 바쁜 법의관이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의 경찰서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형사보다 더 형사처럼 활약한다.’는 설정은 읽는 내내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또 특별할 것도 없는 법의관의 현장 진술을 마치 대단한 추리력의 산물인 양 감탄하며 추종하는 형사팀장 정정현의 캐릭터도 작위적이었고, 방송국 차량이 진을 칠 정도로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됐는데도 불구하고 (정정현 홀로 고군분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사를 기피하는 듯한 용천경찰서 수사진들의 태도도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초반부터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설정들이 뇌리에 박힌 탓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도 당초 기대했던 스릴감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디테일이 좀더 자연스러웠더라면 잘 짜인 큰 그림이 더 빛을 발했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한국의 스릴러 작가를 만난 일은 무척 반가웠지만 그만큼의 아쉬움도 남긴 작품입니다. 다음에는 그 아쉬움들을 모두 잊게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만나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은 자신이 소유한 땅과 맞붙어있는 미혼모 쉽터 사랑의 집의 부지를 탐내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를 섭외하여 사랑의 집운영자인 오유라의 비리를 파헤치도록 하고, 젊고 강직해 보이는 변호사 하나연을 자신이 급조한 시민단체의 대표로 영입한 것입니다. 시민운동가로서 명망을 얻고 있었지만 실은 오유라는 비리덩어리 그 자체였고, 이진수와 하나연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낸 한병진은 무난한 성공을 기대했지만, 시장을 비롯하여 권력자들과 단단하게 이어진 오유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습니다. ‘땅 빼앗기로 시작된 작은 싸움은 어느 새 폭로전은 물론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2018년에 출간된 신원섭의 짐승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선택과 행동은 하나같이 짐승의 그것과 닮아있는 여섯 명의 인물을 등장시킨 흥미로운 군상극이자 매력적인 스릴러였습니다. 이후 몇 편의 앤솔로지에서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신원섭이 5년 만에 새로운 장편을 펴내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요란한 아침의 나라40년간 위성도시 베드타운이었지만 지금은 쇠락의 기운이 더 강하게 감도는 가양시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주인공이 없는 속도감 넘치는 군상극이자 누아르의 기운이 짙게 밴 스릴러입니다. 이야기의 연속성은 전혀 없지만 전작에 등장했던 두 인물 -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 재력가이자 시장의 최측근인 도미애 5년 만에 악연을 거듭하는 대목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땅의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바로 옆 미혼모 쉼터의 부지가 필요했던 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의 탐욕에서 시작된 땅 빼앗기 싸움은 그 상대가 시장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유대 관계가 깊은 사악한 시민운동가 오유라인 탓에 쉽사리 마무리되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커져갑니다. 오유라 죽이기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그녀의 동지들인 시장과 권력자들을 아군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싸움의 주체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비열한 인물들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깡패 이진수와 변호사 하나연 역시 악당은 아니더라도 정의나 선()과는 거리가 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이라 독자 입장에서 딱히 이입하며 쫓아갈 인물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군상극은 오히려 독자에게 상황 전체를 골고루 조망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탐욕, 오만, 증오, 시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맞이하는 파멸의 전 과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라고 할까요?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면 여성 누아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패와 비리를 일삼는 사랑의 집대표 오유라,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않는 시장 김주미, 시장의 귀찮은 일들을 은밀히 처리해주는 실력자 도미애, 인권변호사를 표방하지만 실은 부와 명예를 탐내는 현실주의자 하나연,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나약한 미혼모에서 끝내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마는 고영희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의 주요 서사는 대부분 여성이 끌고 갑니다. 누아르의 별미인 폭력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그저 말 그대로 별미일 뿐 실제로 가양시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이끄는 것은 모두 여성입니다. 정작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던 점인데,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이기도 하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사랑의 집이슈가 너무 쉽게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된다는 점(요즘 흉악한 뉴스가 워낙 많다 보니 가양시 정도에서 벌어진 흔하디흔한 비리에 전국적인 관심이 몰린다는 게 영 어색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 막판에 너무 서둘러 마무리한 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후속작 한 편 정도는 더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갑작스레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서 을 보게 된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한국의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이 신원섭입니다. 앤솔로지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해왔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더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새로운 군상극도 괜찮고, 확실한 주인공이 끌고 가는 누아르도 괜찮으니 머잖아 그의 새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그니처 나비사냥 2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남 영광경찰서에서 희대의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한 공으로 광주 광역수사대로 발령받은 하태석 형사는 어느 날 옛 연인인 최지선이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정치인이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불행한 이별을 겪어야만 했던 하태석은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관할서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수사에 참여하려 애씁니다. 그러던 중 범인이 체포되고 최지선 뿐 아니라 1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태석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최지선을 공격했다고 자백한 범인에게 의심을 품습니다. , 최지선을 공격한 진범은 따로 있으며 그 진범과 이미 체포된 범인 사이엔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태석 시리즈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나비사냥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현직 형사가 집필한 범죄 스릴러로 소문이 났지만 워낙 묘사가 사실적이고 잔혹해서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허약한 서사에 묘사만 잔혹한 이야기라고 예단하곤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우연히 읽은 시리즈 첫 편 나비사냥에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맛본 덕분에 내쳐 두 번째 작품까지 읽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좌천돼 고향인 전남 영광경찰서로 돌아온 하태석이 동료들의 무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하는 이야기가 나비사냥이라면, ‘시그니처는 범인을 체포하고 기자회견까지 연 관할서의 수사결과에 반발한 하태석이 1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진범을 찾아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태석은 범인뿐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직()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비사냥에서 막판에 하태석을 폭발시킨 게 사랑하는 가족이 범인의 목표물이 된 점이라면, ‘시그니처에선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불행하게 헤어져야만 했던 옛 연인이 연쇄살인마에게 공격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점입니다. 가공할 연쇄살인마와의 대결, 자신을 짓누르는 내부의 적과의 충돌,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범죄 피해자가 된 점 등 두 작품은 큰 얼개에서 무척 닮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태석은 일반인이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 형사입니다.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의 방식은 무척이나 아날로그적입니다. 예리한 촉을 갖고 있긴 하지만 수시로 단순무식한 스타일로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관할서나 상부와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독불장군이지만 심성 하나는 아주 따뜻한 인물입니다. 그래선지 명탐정이나 대단한 형사가 주인공인 스릴러와 비교할 때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리얼리티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막판에 진범을 체포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약간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슈퍼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한국 형사의 사실감 넘치는 진면목을 보여준 것 같아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희대의 살인마와 그의 범행 시그니처를 따라하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 엑스. 두 명의 사이코패스가 살인경쟁을 시작한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이 작품엔 두 명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합니다. 먼저 체포된 범인이 최지선 살해미수까지 자백하지만 하태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몇몇 단서 때문에 진범이 따로 있음을 확신합니다. 사실 관할서에서 기자회견까지 연 마당에 광역수사대 형사가 진범은 따로 있다.”라고 주장하는 건 경찰 입장에서 보통 난감한 상황이 아닙니다. 결국 하태석에게 허락된 건 이미 체포된 범인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까지의 단 1주일. 하지만 범행수법을 수시로 바꾸는데다 흔적 하나 안 남기는 진범을 찾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에 다름 아닙니다. 옛 연인을 잔인하게 공격한 진범을 쫓는 동시에 관할서와 경찰 상부의 지독한 견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하태석의 행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작에 비해 서사와 갈등 구조는 훨씬 더 풍부해졌고, 두 명의 연쇄살인마의 행각을 꽤나 잔혹하게 묘사한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긴 건 의식불명에 빠진 옛 연인 최지선과 하태석 사이의 애틋한 사연이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한 점입니다. 아무래도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슷한 장면을 거듭 배치한 것 같은데, 그런 탓에 전작인 나비사냥보다 무려 120여 페이지가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목마다 다소 느슨하고 지루함을 느낀 건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시그니처이후 5년만인 올해(2022),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소녀가 사라지던 밤이 출간됐습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어 1~2권으로 분권됐는데, 늘어난 분량만큼 캐릭터나 사건 등 모든 것이 풍성해졌겠지만 본론 외의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매력적인 한국 형사하태석의 이야기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 사냥 나비사냥 1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녀납치사건을 맡은 형사 하태석은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고 살인혐의로 체포하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고 사체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과잉 수사라는 비난만 받은 끝에 고향인 전남 영광경찰서로 좌천됩니다. 여동생 미숙과 친구 근식 외에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상황에서 하태석은 영광경찰서 동료와 선후배들에게도 요주의 혹은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강력팀이긴 해도 단순 업무에 발목이 잡혀있던 하태석은 미심쩍은 실종사건과 교통사고를 들여다보던 중 그만의 특유의 을 발동시킵니다. 납치에 이은 연쇄살인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수상한 탑차 운전자를 체포하지만 이번에도 운은 그의 편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벌인 치명적인 실수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하태석은 직감만 믿는 어리석은 폭주형사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2013나비사냥이 출간됐을 무렵 현직 형사가 쓴 범죄소설이란 카피 때문에 흥미를 가졌지만 구토를 유발하는 잔혹함이 전부라는 몇몇 독자의 서평을 읽곤 관심목록에서 제외시켰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4년 후인 2017년 후속작 시그니처가 나왔을 때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는데, 2022년 들어 세 번째 작품인 소녀가 사라지던 밤까지 출간되고 여기저기서 호평을 발견한 덕분에 더는 이 시리즈를 외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90년대 지존파 사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목격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나비사냥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는 바로 그 지존파를 차용하여 만든 캐릭터로 납치, 고문, 폭행, 살해를 태연히 자행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범인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사회의 냉대와 무시로 인해 세상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그리고 멍청한 신을 대신해 배부른 돼지들을 모조리 살해하려는 야망을 가진 사이코패스입니다. 외진 곳에 살인과 고문을 위한 아지트를 마련하고, 특별한 기준도 없이 닥치는 대로 피해자를 납치하는가 하면, 미래에 저지를 살인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행태까지 보입니다.

 

이런 사이코패스를 상대하는 주인공 하태석은 왠지 영화 살인의 추억에 어울릴 것 같은 아날로그 스타일의 형사입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추리를 통해 범인을 특정하긴 하지만 결국 그가 가장 의지하는 것은 직감 또는 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물증도, 피해자의 사체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찍은 범인을 오로지 강압적인 방법으로 다룰 뿐입니다. 외모 역시 조폭인지 형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다 한번 꽂힌 사건에는 물불도, 낮밤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 하는 그는 과학수사가 발전한 21세기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서장이며 과장이며 처음 보는 선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 파트너였지만 지금은 팀장이 돼있는 인물조차 자신을 꺼리는 상황에서 하태석은 또다시 물증도, 사체도 없는 사건을 연쇄납치살인이 확실하다고 여기며 단독수사를 감행합니다. 경찰 내부에서 갖은 방법으로 압박을 가해오지만 여동생마저 실종되자 하태석은 눈이 뒤집힌 채 폭주하기 시작하고, 끝내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희대의 사이코패스와 마주하게 됩니다.

 

잔혹한 묘사가 거북한 독자라면 아마 범인의 첫 시퀀스를 절반도 채 마무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토를 유발하는 잔혹함이 전부라는 서평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형 형사 캐릭터인 하태석의 매력과 범죄스릴러로서의 이 작품의 미덕까지 부정한 건 좀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익숙해지긴 했지만 현직 형사가 묘사한 한국 경찰의 현실과 민낯도 생생했고, 긴장감 가득한 추격전과 액션 장면도 기대 이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직감과 에 의지한 아날로그 방식의 수사라든가 경찰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하태석의 처지에 대한 묘사가 다소 지루하고 느슨했던 점은 아쉬웠지만, 후속작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기대감을 자아낸 걸 보면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아쉬움으로 보입니다. 모르긴 해도 조만간 후속작인 시그니처가 제 장바구니에 담기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