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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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는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의 수록작 해무를 통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소용돌이해무모두 25년 전에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 시절 특별했던 연인 혹은 친구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불편한 심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큰 위기를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무가 제목 그대로 바다가 뿜어낸 안개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소용돌이는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극단적인 공포와 죽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닮은꼴로 읽히는 작품들입니다.

 

줄거리를 정리하기 전에 혹시나 하고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연쇄살인범(?)의 정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아서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급하자니 스포일러 같고, 안 하자니 두루뭉술한 이야기 외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론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에둘러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를 연상시키는 호러물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25년의 간격을 두고 현실로 소환되는가 하면,

어떤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연쇄살인을 일으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광기에 휩싸인 연쇄살인을 초래했던 광선리의 다섯 소년소녀는

25년이 지나 불혹을 눈앞에 둔 시점에 또다시 비현실적인 연쇄살인사건과 마주합니다.

일명 독수리 오형제라 자칭하던 그들 가운데 한 명의 부고로 인해 광선리에 모인 나머지 넷은

마을 노인들마저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귀기 어린 산속 저수지 솥뚜껑에서 시작됐던 악몽이

25년 만에 또다시 부활했음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헛소리라 치부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길 없기 때문에,

, 애초 이 참극을 초래한 것이 치기어린 13살 시절의 자신들이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은 무력감만 남은 상태에서도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 희생자는 쉴 새 없이 발견되고,

역대급 태풍 예보 속에 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대규모 참극이 광선리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크게 보면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겠다는 다섯 소년소녀의 순수한 염원이 야기한 통제불능의 참극,

봉인됐던 참극의 25년만의 부활과 그것을 재봉인하려는 네 명의 중년남녀의 목숨을 건 도전,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참극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호러와 미스터리, 성장 스토리, 도로건설을 둘러싼 마을의 분란 등이 믹스된 서사는

심플한 구조를 무색하게 할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비현실과 현실, 즉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이 얼마나 매끄럽냐가 핵심인데,

그 점에 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를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려 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오히려 막판 몰입을 방해받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샤이닝이나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는 두 장르가 잘 결합된 작품이면서도

아무리 논리적인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결국 호러는 호러라는 점을 견지한데 반해,

소용돌이는 약간은 무리한 방식으로 현실적인 미스터리 해법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시작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호러인데,

엔딩은 영문을 알 수 없던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에 이르는 대목은 독자에 따라 평이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캐릭터의 매력이라든가 속도와 강약이 매끄럽게 조절된 문장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호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군더더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포와 참혹함 사이로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대목도 적절히 배치돼있어서

이쪽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불편하지 않은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편과 장편에 걸쳐 그만의 매력을 확인한데다,

앞으로도 계속 어두운 이야기에 매진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후기까지 보고나니

전건우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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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자살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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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한다미의 가출로 인해 삶의 의욕이 사라진 길영인은 자살을 꿈꾸며 그 방법을 찾던 도중

'정신을 파괴해서 육체의 생을 치유한다'는 정신자살연구소를 알게 된다.

호기심과 절박함으로 연구소에 찾아간 그는 이탁오 박사의 언변에 설득되어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정신자살을 시술받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시술 후에도 그의 불안은 그칠 줄 모르고, 급기야 아내의 행방을 추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한다.

 

4년 전, 이탁오 박사와 짧지만 강렬했던 악연을 맺은 고진은

우연히 말려든 살인사건에 이탁오 박사의 정신자살연구소가 연관돼있음을 확인하곤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은 물론 미모의 마담 류경아까지 끌어들여 적극적인 조사에 나선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유희삼아인간의 정신을 실험했던 이탁오 박사라면

길영인 주위에서 벌어진 참극들을 얼마든지 설계하고도 남았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고진의 모든 가설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인용, 편집했습니다)

 

● ● ●

 

(걸작선이나 단편선은 제외하고) 도진기 작가가 발표한 미스터리 작품이 모두 열 편인데,

그중 여덟 편을 읽었으니 어떻게 봐도 도진기 작가의 팬임에 분명한 1인입니다.

못 읽은 두 편은 고진 시리즈 중 정신자살’, 진구 시리즈 중 나를 아는 남자였는데,

최근 고진 시리즈의 개정판을 내고 있는 황금가지에서 정신자살을 보내준 덕분에

그동안 너무 궁금했던 변호사 고진과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의 대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신자살은 고진 시리즈 가운데 세 번째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작품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본격 추리)이 무색할 정도로

파격적인 반전과 엔딩을 통해 거의 호러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올해(2017) 출간된 단편집인 악마의 증명을 먼저 읽은 덕분에

도진기 작가의 숨겨진 진짜 취향(?)을 안 연후에 정신자살을 읽은 셈이 됐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꽤나 놀라고 당혹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한 작품입니다.

도진기 작가는 악마의 증명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했다.”

내가 괴기 환상물을 쓰게 된 건 DNA 수준의 필연인지 모른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이 진술이 더욱 놀랍게 들릴 것입니다.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를 막론하고 도진기 작가가 보여준 서사의 핵심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명백히 현실적인 사건과 매력적인 본격 추리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진 시리즈에서 도진기 작가의 이런 의외의 취향이 또다시 발휘된다면

그건 분명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와의 재대결 또는 마지막 대결을 다룬 작품이 되겠지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그 전까진 고진 시리즈가 본격의 틀을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신자살은 그만큼 도진기 작가의 팬인 저에게조차 충격적이고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자신이 세워놓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마지막 가설을 통해 진범을 밝히기 전까지는

고진은 여느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어둠의 변호사역할을 선보입니다.

자신의 추리가 틀려도 슬퍼하긴커녕 오히려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새 출구를 찾아나섭니다.

가끔 지나친 비약도 등장하지만, 그의 선명하고 빈틈없는 추리는 매번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 투덜대면서도 늘 고진과 파트너처럼 움직이는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도 귀엽고(?),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에서 연을 맺은 미모의 마담 류경아는

특유의 매력과 언변을 무기 삼아 고진이 설계한 실제 수사에 투입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정신자살에서 고진에 맞먹는 비중과 분량, 재미를 선보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좌지우지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입니다.

길영인 사건을 통해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벌이는 팽팽한 대결도 재미있지만,

4년 전, 고진과 이탁오 박사를 운명적으로 조우시켰던 미스터리한 살인사건 스토리나

그 영향으로 고진이 판사직을 버리고 어둠의 변호사를 택하는 과정도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특히 고진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이탁오 박사가 닮은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꽤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인물들의 관계도 복잡한데다 예상치 못한 엔딩의 충격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장르적 특징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 서평이 돼버렸는데,

아무래도 그 이상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정신자살은 직접 읽지 않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입니다.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혹시 정신자살로 도진기 작가와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를 예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서 구구절절 설명하긴 했지만, 도진기 작가의 성향은 (적어도 메이저는) 본격 추리입니다.

그 스스로 호러+오컬트+괴기 환상물의 취향을 갖고 있다고 고백했고

언젠가는 그에 걸맞는 주인공을 내세운 새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 그의 주력상품(?)은 고진과 진구인 만큼 꼭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자살에서 그다지 호감을 갖지 못한 독자가 도진기 작가의 진면목이 담긴 작품들을

통째로 외면하는 일이 있을까봐 괜한 오지랖까지 덧붙인 사족을 달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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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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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월 들녘에서 출간된 초판을 읽고 썼던 서평을 다시 업로드한 것입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붉은 집 살인사건이나 유다의 별에 비해 비교적 소소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독특한 구성과 연이은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경위를 듣는 것만으로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는 안락의자 탐정 고진

사소한 단서만으로 수사의 맥을 짚는 명탐정 고진의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도 합니다.

 

● ● ●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은 독신자 아파트에서 벌어진 남녀피살사건을 수사하며

조금은 무리한 방법으로 용의자를 특정하여 기소한 끝에 결국 쓴맛을 보게 됩니다.

사건에 끼어든 고진은 이유현 팀장으로부터 사건 개요를 듣는가 하면,

사건 현장을 찾아가 이런저런 단서를 확보한 끝에 나름 용의자를 특정합니다.

이유현 팀장은 고진의 충고대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과는 엉뚱하게만 나올 뿐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 가늠할 수 없는 범행수법, 모호할 뿐인 범행동기 등

수사를 할수록 진실은 더 멀어지고, 이유현 팀장은 조언해준 고진에게 오히려 화가 납니다.

결국 안락의자를 벗어나 현장을 탐문하고 관련자들을 만나본 고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충격적인 진실을 이유현 팀장 앞에 내놓습니다.

 

● ● ●

 

초반에 소개된 사건의 규모나 서론만 놓고 보면

혹시 이 작품이 단편집 또는 중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리 두꺼운 분량은 아니지만, 설마 이 사건만으로 장편을 끌고 간다고?”

 

사건은 단순하고, 관련자들도 한정되어 있지만

의외로 해결의 실마리는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합니다.

분명 단서가 될 만한 정황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지만,

도무지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진 탓에 수사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 뿐이고,

안락의자 탐정 고진의 추리마저 번번이 벽에 막히면서 이야기는 밀도를 높여갑니다.

 

사실 고진이 이유현 팀장에게 조언을 해줄 때마다

독자는 이번에는...”하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닐까, 기대하게 됩니다.

그만큼 추리도 완벽하고, 범행동기도 그럴듯하게 설명되기 때문인데,

남은 분량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고,

결국 예상대로 용의자는 고진과 이유현 팀장을 보기 좋게 넉다운 시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독자는 마치 고진 또는 용의자와 두뇌싸움을 벌이는 듯한

색다른 긴장감과 재미를 만끽하게 됩니다.

 

치열한 논리의 싸움, 알리바이 깨기, 사소한 단서들 속에 꼭꼭 숨은 진실 찾기 등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작은 사건 속에서 미스터리의 미덕을 실컷 맛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거만해 보이기도, 얄미울 정도로 똑똑해 보이기도 한 고진의 캐릭터도 맛깔나고,

욱하는 성질과 돌직구 같은 추진력을 보여준 이유현 팀장의 캐릭터도 재미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의 진상은 충격적이고,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범행수법과 곳곳에 매복된 사소한 단서들은

도진기 작가가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도를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 좀 애매한 서평이 됐지만,

부담 없는 분량에 알찬 미스터리를 맛보려는 독자들에겐 더없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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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온도 -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명희 지음 / 북로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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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타고난 사랑의 온도는 전부 제각각일 것입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사랑의 온도도 누구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겪느냐에 따라 늘 변할 것입니다.

90년대 중반이라는, 아날로그에도 디지털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운명처럼 엇갈리는 사랑을 나누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사랑의 온도의 편차는 무척 큽니다.

누군가는 소극적이고 신중한 반면, 누군가는 적극적이고 정열적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바뀌어도 타고난 온도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오르락내리락 하는 법이지만,

자신이 먼저 시작한 사랑의 온도와 남이 먼저 걸어온 사랑의 온도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작품은 몇 년에 걸쳐 불안하게 오르내렸던 네 명의 사랑의 온도의 변화를 담담히 그립니다.

 

사랑 자체에 꽤나 회의적이었지만 어느 날 불쑥 찾아든 미묘한 감정에 휘말린 이후

몇 년에 걸친 지독한 기다림 또는 체념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녀, 현수.

현수와는 180도 다른, 붙임성 있고, 활달하고, 항상 주위에 따르는 남자가 가득했던,

그래서 지극히 안정적인 현실과 결혼한 뒤에도 위험한 사랑을 꿈꾸는 그녀, 홍아.

지극히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 듯한,

그래서 순수하고 착한 사랑만 할뿐, 누구에게도 상처 줄 것 같지 않은 바보 같은 남자, 정선.

소위 스펙으로 치면 남부러울 것 없으면서도 그답지 않은 섬세한 사랑을 추구하는,

그래서 늘 현수 주위를 조용히 공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남자, 정우.

 

이야기는 여느 멜로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고, 파격적인 설정이나 사건도 없습니다.

대신 작가는 엇갈린 사랑의 방향과 깊이, 서로 다른 눈금을 가리키는 사랑의 온도 때문에

아주 잠시의 행복밖에 허락받지 못한 안쓰럽고 애틋한 주인공들에게 애정을 쏟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재미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기대한 독자들에겐 좀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90년대라는 모호한 경계의 시대에 아날로그 냄새가 감도는 잔잔한 멜로를 기대한다면

한나절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의외의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애초 멀티로 기획된 것 같긴 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방송 중입니다.

원작 속 인물들의 캐릭터와 사랑의 온도가 드라마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출판사 북로드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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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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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뉴스 앵커이자 여대생의 롤모델인 최선우가 교외 외딴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가 강간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히고,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게 된다.

강주희는 외딴 집의 소유자인 미술교사 서인하를 용의자로 검거하지만,

서인하는 자신과 최선우는 섹스파트너였고, 최선우가 세간에 알려진 고고한 이미지와는 달리

변태적 성향의 여자였다는 충격적인 진술을 한다.

서인하는 사건 당일 점차 과도해지는 최선우의 요구 때문에 다툰 뒤 먼저 집에서 나왔고,

그 후 그녀가 2층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고백하자면, 어지간한 서평 이벤트에는 죄다 응모하는 1인이지만,

올해 초 이곳저곳에서 열린 소실점의 이벤트에는 응모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장르물을 응원하는 독자로서 참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였지만,

진짜 누가 쓴 거냐?’라는 논란이 많은 영화 시나리오 집필 이력을 앞세운 작가 소개와

강간이냐 화간이냐?”라는 왠지 값싸 보이고 불편하게 읽히는 한 줄 카피를 보곤

이벤트 응모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실점을 읽게 된 계기는

읽을까 말까 고민하던 책들을 상대로 신속하고 단호한 구조조정을(?) 결심한 덕분이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초반 50페이지까지 읽어보고,

읽고 싶어진 책은 그 자리에서 구매, 아닌 책은 과감히 독서목록에서 삭제하기로 했던 건데,

생각지도 않았던 소실점이 장바구니에 실린 것입니다.

 

아무튼...

소실점은 꽤 다양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점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이코패스와 다중인격을 연상시키는 용의자 캐릭터,

지독하거나 순수하거나 치명적인 멜로 스토리,

다분히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설정임에도 서사의 균형을 잡아준 디테일한 심리 묘사,

그리고 단 하나의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검사가 펼치는 쫀쫀한 미스터리까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이 꽉 들어찬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입니다.

 

분명 외양은 검사가 이끄는 미스터리 구조지만,

독자의 관심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냐, 에 쏠리게 됩니다.

진선미를 모두 갖춘 메인뉴스의 앵커이자 명문가의 며느리인 최선우의 실체는 무엇일까?

용의자로 체포된 서인하는 진짜 변태 사이코패스인가, 애틋한 멜로의 주인공인가?

최선우와 서인하는 연인이었나, 섹스파트너였나,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상극의 관계인가?

 

일부는 검사 강주희의 집요한 조사에 의해, 일부는 서인하의 진술에 의해 밝혀지지만,

작가는 시종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독자의 의문을 무한대로 증폭시켜 갑니다.

당연히 검사 강주희 역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수차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피해자가 유명인이란 이유만으로 정해진 결과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가해자의 교묘한 진술에 홀라당 넘어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명확한 물증과 단서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기준으로 구형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대략의 엔딩이 눈에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지막 반전을 통해 무난한 마무리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킵니다.

동시에, 앞서 전개해온 다양한 코드들을 한 곳으로 깔끔하게 수렴시킵니다.

독자에 따라 엔딩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충분히 담긴 엔딩이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분법적이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엔딩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읽는 동안 인상적인 구절을 몇 개 뽑아놓긴 했는데,

뭘 소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제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소실점의 매력은 사건이나 엔딩 자체보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서평을 참고한 뒤에 읽더라도 큰 무리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에 대한 편견, 책 소개글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자칫 수작을 놓칠 뻔 했던 셈인데,

뒤늦게나마 소실점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당연히 이미 집필 중이라는작가의 후속작도 기대감을 갖고 기다리게 됐습니다.

이왕이면 여검사 강주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라면 더욱 반가울 것 같은데,

작가가 어떤 이야기, 어떤 캐릭터를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벌써부터 궁금함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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