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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평점 :
전건우는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의 수록작 ‘해무’를 통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소용돌이’와 ‘해무’ 모두 25년 전에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 시절 특별했던 연인 혹은 친구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불편한 심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큰 위기를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무’가 제목 그대로 바다가 뿜어낸 안개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소용돌이’는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극단적인 공포와 죽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닮은꼴로 읽히는 작품들입니다.
줄거리를 정리하기 전에 혹시나 하고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연쇄살인범(?)의 정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아서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급하자니 스포일러 같고, 안 하자니 두루뭉술한 이야기 외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론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에둘러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를 연상시키는 호러물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25년의 간격을 두고 현실로 소환되는가 하면,
어떤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연쇄살인을 일으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광기에 휩싸인 연쇄살인을 초래했던 광선리의 다섯 소년소녀는
25년이 지나 불혹을 눈앞에 둔 시점에 또다시 비현실적인 연쇄살인사건과 마주합니다.
일명 독수리 오형제라 자칭하던 그들 가운데 한 명의 부고로 인해 광선리에 모인 나머지 넷은
마을 노인들마저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귀기 어린 산속 저수지 ‘솥뚜껑’에서 시작됐던 악몽이
25년 만에 또다시 부활했음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헛소리라 치부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길 없기 때문에,
또, 애초 이 참극을 초래한 것이 치기어린 13살 시절의 자신들이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은 무력감만 남은 상태에서도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 희생자는 쉴 새 없이 발견되고,
역대급 태풍 예보 속에 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대규모 참극이 광선리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크게 보면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겠다는 다섯 소년소녀의 순수한 염원이 야기한 통제불능의 참극,
봉인됐던 참극의 25년만의 부활과 그것을 재봉인하려는 네 명의 중년남녀의 목숨을 건 도전,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참극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호러와 미스터리, 성장 스토리, 도로건설을 둘러싼 마을의 분란 등이 믹스된 서사는
심플한 구조를 무색하게 할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비현실과 현실, 즉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이 얼마나 매끄럽냐가 핵심인데,
그 점에 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를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려 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오히려 막판 몰입을 방해받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샤이닝’이나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는 두 장르가 잘 결합된 작품이면서도
‘아무리 논리적인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결국 호러는 호러’라는 점을 견지한데 반해,
‘소용돌이’는 약간은 무리한 방식으로 현실적인 미스터리 해법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시작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호러’인데,
엔딩은 ‘영문을 알 수 없던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에 이르는 대목은 독자에 따라 평이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캐릭터의 매력이라든가 속도와 강약이 매끄럽게 조절된 문장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호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군더더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포와 참혹함 사이로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대목도 적절히 배치돼있어서
이쪽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불편하지 않은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편과 장편에 걸쳐 그만의 매력을 확인한데다,
“앞으로도 계속 어두운 이야기에 매진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후기까지 보고나니
전건우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