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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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생일을 앞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저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다분히 변태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시신의 상태 때문에 철저한 보안 하에 보안정보국과 경찰이 비밀리에 내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일 방문객과 성의 직원들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만 좀처럼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사책임자인 보안정보국장이 러시아의 암살 음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여왕의 혼란은 더욱 깊어집니다. 여왕의 선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캐는 것. 여왕은 신참 보조비서 로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지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하나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올해 9월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인공인데다 그녀 자신이 왕관을 쓴 미스 마플’, 즉 미스터리 해결사로 등장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 작품입니다. 노인이나 주부 등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현직 여왕은 저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자칫 러시아 남자, 여왕의 파티에서 섹스에 탐닉하다 사망해!”라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철저한 보안이 이뤄진 가운데, 사건 전날부터 윈저성에 묵은 50여 명의 방문객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의 직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초반부터 난항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사의 두 주체는 명확히 다른 관점을 드러냅니다. 보안정보국의 수장 개빈 험프리스가 푸틴의 지시를 받은 내부 스파이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반면, 여왕의 직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입증하기 위해 측근들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측근들을 고르는 기준은 좀 독특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수족과 같은 자라 해도 자신을 그저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모르는 90살 할머니로만 여기는 자들은 일부러 배제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자, 자신과 소통이 되는 자들을 선택합니다. 왕실 기마포병대에서 복무한 뒤 여왕의 보조비서가 된 지 고작 6개월밖에 안 된 신참 로즈메리 그레이스 오쇼디(이하 로지)가 선발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과거 경호팀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리 매클라클런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왕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직접 수사에 뛰어들 수도, 관련자들을 탐문할 수도 없는 여왕을 위해 로지와 빌리는 분주하게 발품을 팝니다. 특히 로지는 여왕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직속상관인 사이먼 경마저 속여야 하는 것은 물론 비밀리에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스파이역할에 때론 당황하기도 때론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왕관을 쓴 미스 마플을 보좌하던 전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측근들을 활용하여 미스터리를 풀어내긴 하지만 정작 여왕 자신이 해결사란 점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측근들이 모아온 결정적인 단서와 자신이 직접 추리하여 얻어낸 사건의 진상을 티 안 나게 넌지시 던져주고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수사에 가담한 측근 1~2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발산하는 쾌감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도 지니는데, “윈저성에서 펼쳐지는 본격 탐정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여왕이 자기만의 방식 - 능청스럽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무위의 기술 - 으로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그린다.”(p389)라는 역자 후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못잖게 70년 가까이 왕위를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소한 일상들이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어쩌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가 서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필립 공과의 소박한 부부생활, 증손녀의 생일을 기다리는 작은 기쁨, 애마(愛馬)에 대한 무한하고도 따뜻한 애정, 그리고 윈저성의 모든 직원들에 대한 푸근한 배려 등 여왕의 일상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난이도나 그 결과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런 미덕들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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