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
벤저민 스티븐슨 지음, 이수이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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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휴양원에서 열리는 가족모임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은 어니스트 커닝햄(이하 어니)의 심경은 복잡해집니다. 단순한 가족모임이 아니라 살인죄로 3년을 복역하고 출소하는 형 마이클을 맞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어니는 마이클을 경찰에 고발한 것은 물론 법정에서도 그의 죄를 증언했고, 그 일로 인해 가족들과 갈라선 채 살아왔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휴양원에 도착한 뒤 가족들의 냉대 속에 하룻밤을 보낸 어니는 곧 재회할 형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워지는데, 그때 휴양원 인근에서 시신이 발견되면서 가족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더 큰 문제는 경찰이 휴양원에 막 도착한 마이클을 다짜고짜 용의자로 체포한 일입니다. 이후 거센 눈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휴양원에선 연이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라는 제목은 얼핏 블랙코미디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실은 지독한 사실을 적시하는 제목입니다. 35년 전 어니와 마이클의 아버지가 경찰을 살해하고 사살 당한 일을 시작으로 현재 휴양원에서 벌어진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이 제목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100%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증오, 질투, 연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커닝햄 일가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기괴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 미스터리가 접목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어니를 비롯하여 새아버지와 어머니와 의붓동생, 고모 부부, 형수와 아내 등 마이클을 맞이하기 위해 휴양원에 모인 커닝햄 가족은 서로를 향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이클이 출소하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수법이 최근 화제가 된 블랙 텅 연쇄살인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커닝햄 가족은 자신들을 향한 정체불명의 악의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연이어 참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커닝햄 가족은 35년 전 시작된 비극에서부터 3년 전 마이클이 일으킨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과거를 되짚으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합니다.

 

제목만큼 눈길을 끄는 건 1인칭 화자인 어니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소설은 모든 사건이 종료된 뒤 범죄소설 애호가이자 작법서 작가인 어니가 휴양원에서 벌어진 일들과 커닝햄 가족의 비극을 회고하듯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중간중간 독자에게 알림같은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와 픽션에 몰입해있던 독자를 놀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또 사람이 죽기까지 이제 87쪽 남았다.”라든가 “121쪽 뒤에야 내가 나체인 상태에서 그녀와 입을 맞붙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처럼 마치 낭독회 도중 청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상황들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또 첫 페이지부터 추리소설가이자 신부였던 로널드 녹스가 1929년에 발표한 탐정소설 십계명을 거론하며 자신이 이 십계명에 충실하게 기록을 남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종종 알려주기도 합니다. 비극의 무게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서술방식이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여러 인물이 얽힌 가족사에다 35년 전 어니와 마이클의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3년 전 마이클의 살인, 그리고 현재 휴양원의 사건까지 섞여 있어서 구도 자체가 꽤 복잡한 작품입니다. 메모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큰 그림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한데,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많은 사건이 동원된 탓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꼬인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꼬인 지점을 풀기 위해 자꾸만 덧칠을 하거나 무리수를 두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화자인 어니가 한순간에 모든 걸 깨닫는 비약을 통해 갑작스런 결론을 내리는 장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에서 그 모든 깨달음을 얻은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다 낯설지만 재미있는 서술방식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중반까지의 빠르고 팽팽했던 미스터리가 너무나도 복잡한 설계도 때문에 후반까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선지 (출간된 지 얼마 안 돼서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이 별로 없지만) 다른 독자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크게 호불호가 갈릴 작품은 아니지만 제가 못 알아본 미덕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분들의 서평을 꼭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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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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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아일랜드 시골의 어린 소녀인 는 여름방학을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엄마가 또 다른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좀더 편히 지내도록 맡겨진것이지만, 실은 이리저리 손이 가는데다 없는 살림에 밥만 축내는 는 부모에 의해 떠맡겨진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짧은 여름은 에게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줬습니다.

 

자극적인 장르물 편식이 지독한 제가 순수문학, 그것도 아일랜드의 한 소녀가 겪은 특별한 여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터넷서점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과 여러 매체 및 작가들의 찬사이고, 또 하나는 본 내용이 100페이지도 채 안 되기에 그 수많은 찬사의 정체가 뭔지 금세 알 수 있겠다는, 또 여차하면 바로 접을 수 있겠다는 그리 건전치 못한 호기심입니다.

 

10살도 채 안 된 소녀의 인생은 킨셀라 부부의 집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전의 인생이 가난과 무관심과 냉대의 잿빛이었다면 이후의 인생은 아주 천천히 밝고 따뜻한 색으로 충만해집니다. 처음엔 낯설고 두려운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소녀는 날이 바뀔 때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지 천천히,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하나둘씩 체득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상처와 상실에 공감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표지 뒷면에 실린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이라는 문구는 킨셀라 부부 집에 살게 된 소녀의 첫 불안감과 함께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한 짧은 여름 동안 훌쩍 성장한 소녀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그녀 앞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전율’, ‘완벽한 정수’,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진짜 보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저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든 한번쯤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지만 이 작품이 발산하는 특별한 에너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 힐링, 계몽 같은 건 아니고, 뭐랄까... 소녀의 여름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 것 같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지만 암시와 여백과 행간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의 의도 덕분인지 늘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다고 할까요?

 

소녀의 여름을 지켜본 모든 독자의 바람은 비슷할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그래서 킨셀라 부부처럼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를 전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듯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이 소녀의 삶에 행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그런 근거 없는 불안감이 불쑥 솟아났는데, 어쩌면 이런 해석조차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려고 합니다. 담담함 그 자체인 원작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그러니까 너무 영화적인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는 소문이 맞다면 나름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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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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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메신저로 알게 된 남자에게 지독한 스토킹을 당했던 탓에 26살이 된 지금도 스마트폰 없이 살고 있는 레이건 카슨은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꽃집에서 은둔자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두 동강이 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한 그날 아침 이후로 레이건의 삶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레이건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건 살해당한 여자가 자신과 쌍둥이마냥 닮았다는 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스런 사연 때문에 시신을 발견하고도 경찰에 알리지 못한 레이건은 5년 전부터 종적을 감춘 스토커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실제로 그날부터 스토커가 과거에 했던 짓과 똑같은 흔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자신을 꼭 닮은 두 번째 시신까지 나타나자 레이건은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도플갱어 살인사건2017년의 호주 시드니를 무대로 SNS, 다크웹, 스토킹, 여성혐오, 연쇄 토막살인 등 다양한 소재를 흥미롭게 버무린 살인미스터리이자 심리스릴러입니다.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중간에 살짝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사건 자체도 특이한데다 누가 범인인지, 목적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좀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아 심리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대 시절 불장난처럼 시작한 메신저 때문에 스토킹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레이건은 지금도 늘 주변을 경계하며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인물입니다. 한국계 호주인이자 범죄전문기자인 민 외에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 레이건이 한꺼번에 두 개의 사건 하나는 과거 스토커가 했던 짓과 똑같은 일들이 5년 만에 다시 반복되기 시작한 일이고, 또 하나는 자신과 꼭 닮은, 그것도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을 하필이면 자신이 발견한 일 - 에 휘말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경찰에 알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레이건은 과거의 악몽 때문에 경찰과 엮이기를 결단코 거부합니다. 하지만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자신과 꼭 닮은 시신들이 연이어 발견되고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이메일까지 받게 되자 레이건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레이건의 입장에서는 등장인물 중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수상해 보입니다. 스토커와 살인범이 동일인 같기도 하고, 두 명의 범인이 함께 모의하여 레이건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연관 없는 두 명의 범인이 우연히도 동시에 레이건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에게마저 선을 그어버린 탓에 레이건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맥없이 공포를 견디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대목이 심리스릴러의 몫인데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긴 해도 레이건의 공포가 워낙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경찰도 등장하고 범죄전문기자인 민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단서를 붙잡는 건 레이건 본인입니다. 문제는 그 단서 자체가 스토킹이나 살인사건의 진실로 바로 이끌어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장면 뒤로 100여 페이지의 긴 분량이 남아있다는 점, 그래서 레이건의 혼란과 공포가 더욱 극심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엽기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살해하며 레이건을 위협하는 범인이 70년 전에 벌어진(하지만 지금도 미제상태로 남아있는) ‘블랙 달리아 사건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47년 미국 L.A에서 벌어진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은 영화와 소설로 제작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범인은 허리를 경계로 피해자를 두 동강 낸 것은 물론 가슴까지 끔찍하게 훼손했으면서도 현장에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아 경찰의 수사를 막다른 벽에 부딪히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현재 호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물론 70년 전 블랙 달리아 사건의 피해자마저 자신과 꼭 닮았다는 사실에 더욱 극렬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 만나 작가인데다 살짝 고전의 냄새도 풍겼고 심리스릴러에 대한 선입관까지 가세한 탓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스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일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개의 사건이 긴장감을 적절하게 유지시켰고 소소한 반전들도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다른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은 없는 듯 한데 나중에라도 신작 소식이 들리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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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술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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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포틀랜드의 숲에서 여자들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죽기 직전 거대한 공포와 직면한 듯 온몸을 오그린 채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굳어있는 시신의 상태도 놀라웠지만 거미줄로 보이는 하얀 고치에 시신이 싸여있는 점, 또 피와 내장이 몽땅 비워진 점 때문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때 프틀랜드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사립탐정이 된 조슈아 브롤린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날아온 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함께 포틀랜드 경찰을 도와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연쇄살인마와도 다른 패턴을 보이는 범행수법 탓에 좀처럼 수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더구나 범인이 남긴 거짓증거 때문에 거듭 혼란에 빠지던 브롤린과 애너벨은 급기야 범인으로부터 끔찍한 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악의 영혼악의 심연에 이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혹은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막심 샤탕은 인간의 이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어느 정도까지 그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인공 브롤린을 통해 스스로 살인자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그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해결하는 프로파일러의 진면목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악의 영혼에서 최악의 상처를 입은 브롤린은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실종사건 전문 사립탐정이 되어 많은 사건을 해결해왔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최대한 거부한 채 고독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처음으로 건드린 건 악의 심연에서 만난 뉴욕경찰청의 형사 애너벨이었습니다. 사건 해결 후 5개월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포틀랜드에서 벌어진 거미와 독소를 이용한 끔찍한 연쇄살인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 번 심연과도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전작들의 범인들도 그 엽기성과 잔혹함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악의 주술속 범인은 거미와 독소라는 독특한 범행도구는 물론 미라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시신 처리방식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를 보여줍니다. 또 여느 연쇄살인마와 달리 일관성 없는 패턴을 보여 브롤린과 애너벨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피해자가 단지 여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살인 외에도 독거미를 이용하여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등 도무지 그 동기와 목적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유독 이 작품에서 브롤린과 애너벨은 여러 번 헛발질을 합니다. 범인이 거미 전문가이며 독소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 외에 거의 모든 프로파일링이 번번이 빗나가고, 유력한 용의자는 어이없는 방식으로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누구보다 브롤린의 프로파일링을 신뢰하던 애너벨마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범인은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향한 공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브롤린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평범한 스릴러가 아니라 인간의 에 대한 탐구까지 중요한 서사로 다루고 있다 보니 가끔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대목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틈날 때마다 살인자의 내면에 침잠하곤 하는 브롤린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 밖의 악의와 동기를 엽기적인 살해방식으로 구현하는 연쇄살인마들은 수시로 자신만의 세계관과 철학을 토해내곤 하는데, 때론 100% 공감할 때도 있지만 때론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혹은 결과론적으로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도가 지나칠 때면 과연 사람의 내면과 심리가 저토록 복잡할까?” “심오하고 철학적인 악의를 품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점이 악의 3부작의 진짜 매력이자 미덕일 수도 있습니다.

 

워낙 이야기가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많아서 구체적인 줄거리를 거의 언급하지 못했는데,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어쩔 수 없었던 탓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너무 많은 탓도 있습니다. 읽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보가 필요한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막심 샤탕의 작품은 이후 그림자의 제국’, ‘가이아 이론’, ‘약탈자등이 한국에 소개됐는데, ‘그림자의 제국을 제외하곤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名品再讀이라는 계획에 악의 3부작그림자의 제국만 포함시킨 건 그런 이유 때문인데, 개인적으론 조슈아 브롤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단 세 편으로 끝난 게 무척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다시 읽을 그림자의 제국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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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연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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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머리 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벌거벗은 채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다가 가까스로 구출됩니다. 뉴욕 경찰청의 애너벨 오도넬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이 사건이 피해자가 67명에 이르는 대규모 실종사건과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단서는 최소 두 명 이상의 공범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집니다. 한편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포틀랜드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은 애너벨과의 거래를 통해 비공식적인 협업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범 중 한 명의 정체를 파악해냄으로써 애너벨을 크게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공범 체포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협업은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악의 영혼에 이은 악의 3부작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이며 악의 영혼에서는 FBI 프로파일러 출신의 포틀랜드 경찰서 수사관이던 조슈아 브롤린은 이제 사립탐정으로 변신하여 뉴욕에서 벌어진 희대의 실종사건에 참여합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8년에 읽긴 했지만 인생 스릴러로 여기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악의 3부작의 가장 큰 특징은 역대급으로 잔혹한 범죄 묘사입니다. ‘악의 심연의 범인들은 전작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난도질하며 살해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궁극의 범행 동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품고 있어서 어지간히 비위가 강한 독자도 한두 번쯤은 속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가 단지 잔혹한 묘사에만 기대어 독자를 유인하는 건 아닙니다. 카리스마와 트라우마를 겸비하고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된 스릴러 서사, 그리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꼼꼼한 디테일 등 연쇄살인 스릴러의 필수 미덕들을 골고루 갖췄기에 출간 당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악의 영혼이 조슈아 브롤린의 원맨쇼였다면 악의 심연은 뉴욕 경찰청의 혼혈 여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의 버디 스릴러입니다. 브롤린은 포틀랜드 출신의 실종 여성 레이첼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왔고, 애너벨이 수사하는 실종사건 피해자 67명 중 한 명이 레이첼임을 확인하곤 과감하게 애너벨에게 협업을 제안합니다. 경찰이라면 사립탐정의 협업 제안 따윈 받아들일 리 없지만 애너벨은 브롤린이 포틀랜드 유령 사건을 해결한 유명한 전직 수사관이며 무엇보다 실종사건 전문 탐정이란 점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공범의 정체까지 파악해내는 브롤린의 뛰어난 수사능력에 크게 놀랍니다. 다만 브롤린의 존재는 뉴욕 경찰청의 동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의 수사가 이뤄지는 와중에 간간이 범인들에게 납치된 피해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감금된 상황들이 묘사됩니다. 말하자면 범인들이 모든 피해자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때문에 독자는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 역시 첫 번째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사진들 때문에 피해자들이 실종 이후 길게는 몇 달 가까이 생존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할 따름입니다.

 

악의 3부작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작가가 이야기의 무대를 미국의 대도시로 삼은 점입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스릴러 가운데 범인의 의도와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난해하거나 철학적인 배경, 심지어 신화까지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그런 서사는 (이해력이 딸리거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한눈에 쏙 들어오지도 않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차라리 단순하더라도 확실하고 명료한 범행 동기가 더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막심 샤탕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 서사를 구사함으로써 이런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불식시킵니다.

다만 악의 심연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현학적이고 난해한 범행 동기를 설정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브롤린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설명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은 앞서 잘 쌓여온 스릴러 서사를 갑자기 모호하게 만들어 오히려 역효과를 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 역시 뭔가 있어 보이게작위적으로 포장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스릴러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악의 심연의 뒤를 잇는 작품은 악의 주술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쯤에 후속작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남겨져있는데, 읽은 지 너무 오래 돼서 그 떡밥을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억도 없어서 난생 처음 읽는 새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조슈아 브롤린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게 너무 아쉽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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