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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 ㅣ 아르테 오리지널 29
벤저민 스티븐슨 지음, 이수이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평점 :
눈 덮인 휴양원에서 열리는 가족모임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은 어니스트 커닝햄(이하 어니)의 심경은 복잡해집니다. 단순한 가족모임이 아니라 살인죄로 3년을 복역하고 출소하는 형 마이클을 맞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어니는 마이클을 경찰에 고발한 것은 물론 법정에서도 그의 죄를 증언했고, 그 일로 인해 가족들과 갈라선 채 살아왔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휴양원에 도착한 뒤 가족들의 냉대 속에 하룻밤을 보낸 어니는 곧 재회할 형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워지는데, 그때 휴양원 인근에서 시신이 발견되면서 가족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더 큰 문제는 경찰이 휴양원에 막 도착한 마이클을 다짜고짜 용의자로 체포한 일입니다. 이후 거센 눈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휴양원에선 연이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라는 제목은 얼핏 블랙코미디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실은 지독한 사실을 적시하는 제목입니다. 35년 전 어니와 마이클의 아버지가 경찰을 살해하고 사살 당한 일을 시작으로 현재 휴양원에서 벌어진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이 제목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100%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증오, 질투, 연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커닝햄 일가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기괴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 미스터리가 접목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어니를 비롯하여 새아버지와 어머니와 의붓동생, 고모 부부, 형수와 아내 등 마이클을 맞이하기 위해 휴양원에 모인 커닝햄 가족은 서로를 향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이클이 출소하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수법이 최근 화제가 된 ‘블랙 텅 연쇄살인’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커닝햄 가족은 자신들을 향한 정체불명의 악의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연이어 참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커닝햄 가족은 35년 전 시작된 비극에서부터 3년 전 마이클이 일으킨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과거를 되짚으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합니다.
제목만큼 눈길을 끄는 건 1인칭 화자인 어니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소설은 모든 사건이 종료된 뒤 범죄소설 애호가이자 작법서 작가인 어니가 휴양원에서 벌어진 일들과 커닝햄 가족의 비극을 회고하듯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중간중간 ‘독자에게 알림’ 같은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와 픽션에 몰입해있던 독자를 놀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또 사람이 죽기까지 이제 87쪽 남았다.”라든가 “121쪽 뒤에야 내가 나체인 상태에서 그녀와 입을 맞붙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처럼 마치 낭독회 도중 청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상황들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또 첫 페이지부터 추리소설가이자 신부였던 로널드 녹스가 1929년에 발표한 ‘탐정소설 십계명’을 거론하며 자신이 이 십계명에 충실하게 기록을 남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종종 알려주기도 합니다. 비극의 무게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서술방식이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여러 인물이 얽힌 가족사에다 35년 전 어니와 마이클의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3년 전 마이클의 살인, 그리고 현재 휴양원의 사건까지 섞여 있어서 구도 자체가 꽤 복잡한 작품입니다. 메모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큰 그림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한데,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많은 사건이 동원된 탓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꼬인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꼬인 지점을 풀기 위해 자꾸만 덧칠을 하거나 무리수를 두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화자인 어니가 ‘한순간에 모든 걸 깨닫는 비약’을 통해 갑작스런 결론을 내리는 장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에서 그 모든 깨달음을 얻은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다 낯설지만 재미있는 서술방식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중반까지의 빠르고 팽팽했던 미스터리가 너무나도 복잡한 설계도 때문에 후반까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선지 (출간된 지 얼마 안 돼서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이 별로 없지만) 다른 독자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크게 호불호가 갈릴 작품은 아니지만 제가 못 알아본 미덕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분들의 서평을 꼭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