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의 다이어리
리처드 폴 에번스 지음, 이현숙 옮김 / 씨큐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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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처처는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로맨스를 맛본 적도 없고 가족의 사랑조차 결핍된 인물입니다. 어릴 적 형의 죽음 이후 우울증이 극심해진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쫓기듯 집을 떠났고, 제이콥 자신도 16살 때 영문도 모른 채 한밤중에 어머니에게 내쫓겼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제이콥은 어머니의 부고와 함께 그녀가 살던 집을 상속받게 됐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호더(hoader, 저장강박증 환자)였던 어머니가 남긴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치우면서 제이콥은 평생을 품어 온 의문 왜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일까? - 을 떠올립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물건들을 치우던 제이콥에게 레이첼이란 여성이 찾아옵니다. 한때 이 집에서 살았던 자신의 생모를 찾으러 왔다는 레이첼에게 제이콥은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장르물 편식이 심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로맨스 소설이지만 크리스마스 소설의 제왕”, “고전적인 로맨스의 탁월한 재해석이란 외신의 평가를 보니 왠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연상시키는 설정인 것 같아 관심이 생긴 작품입니다. 자신을 내쫓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회한에 잠기는 베스트셀러 작가 제이콥과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뒤 뒤늦게 자신의 생모를 찾아 나선 레이첼의 조합은 로맨스 소설의 정석에 가까운데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여러 모로 러브 액츄얼리와 닮은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묶어준 건 레이첼의 생모 노엘이 남긴 다이어리입니다. 노엘은 피치 못할 이유로 임신한 상태에서 제이콥의 가족과 함께 지냈었고, 당시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절절하게 다이어리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노엘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은 제이콥의 아버지뿐입니다. 레이첼을 위해 오래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만나야만 하는 제이콥과 생모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빠진 레이첼은 서로 복잡한 심경으로 긴 여정에 나섭니다. 그 여정은 두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 기회를 선사하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당혹스런 상황과 마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해피엔딩은 절대 쉽게 그들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수년 전에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의 이야기를 쓰도록 내버려뒀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요.” (p288)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는 달달한 로맨스이자 가슴 아픈 상처 극복기이자 누군가에게 억눌리고 빼앗겼던 자신을 되찾는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끝내 화해의 손을 내미는 전통적인 가족 서사가 가미돼서 자칫 뻔한 로맨스가 될 뻔한 이야기를 한결 두텁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잘 만들어진다면 러브 액츄얼리못잖은 따뜻한 로맨스가 돼줄 것 같습니다. 또 이 작품은 노엘 4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제이콥과 레이첼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확장될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넘어선 새로운 로맨스 스토리가 기대되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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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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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 콤비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여덟 번째 작품으로 보덴슈타인의 개인사와 직결된 사건을 다룹니다. 50대 중반의 보덴슈타인은 경찰로서의 사명감도, 의욕과 열정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더는 참혹한 사건과 마주치기 싫어졌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평온한 삶을 위해 안식년 휴가를 신청합니다. 다만 그의 진짜 속내는 피아에게 반장직을 물려준 뒤 영원히 경찰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명이라 여긴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덴슈타인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유년기를 보냈던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 곳곳에서 일주일동안 하루 한 건 꼴로 벌어진 살인사건들이 42년 전 11살이던 자신이 겪은 악몽과 직결돼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보덴슈타인은 러시아 출신의 소중한 친구와 자신이 직접 기르던 새끼 여우를 잃었는데, 그것이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 못잖게 잔인하고 비열했던 루퍼츠하인의 10대 패거리의 소행임을 짐작하긴 했어도 11살의 보덴슈타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경찰마저 부실한 수사 끝에 유력 용의자의 자살 시도를 끝으로 유야무야 마무리하고 말았는데, 42년이 지난 현재 그 사건의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끔찍하게 살해당하자 보덴슈타인으로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깃든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객관성을 잃은 그의 수사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만 흘러가고, 과거의 악몽에 깊이 사로잡히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결국 피아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에야 보덴슈타인은 사건의 윤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고, 현재의 참극의 근원이 된 42년 전의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무척 많은 인물과 복잡하게 꼬인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제 기억에 따르면) 이번 작품처럼 본문 앞에 인물표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보덴슈타인이 의심하는 42년 전 10대 패거리만 9명인데, 당시 그들의 부모는 물론 현재 그들의 자식들까지 3대에 걸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복잡한 결혼 관계까지 맺어진 탓에 독자 입장에선 인물별 족보라도 메모해놓지 않으면 읽는 내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많은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 것은 독자뿐 아니라 피아를 비롯한 강력11반 모두에게도 곤혹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비밀을 공유한 채 서로 연대하고 비호하면서도 뒤로는 경계와 의심, 비난과 질투를 숨기지 않는데다 혈연과 결혼으로 엮인 폐쇄적인 소도시 루퍼츠하인의 수많은 토박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42년 전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직감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잖은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막판 반전과 함께 진범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단 한 순간만 바꿔놓는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루퍼츠하인에서의 수십 년에 걸친 여러 참극들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악마적이기까지 했던 10대들의 잔학성과 추악하고 더러운 어른들의 욕망에서 비롯됐고, 마치 신이 짜놓은 듯한 거짓말 같은 우연이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었는데, 이런 방식의 결론은 타우누스 시리즈를 통해 꽤 익숙해진 서사이긴 하지만, ‘여우가 잠든 숲은 보덴슈타인 개인의 삶이 직접 투영됐기 때문인지 여느 작품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았습니다.

 

이 모든 의도치 않은 불행의 시발점에 그 자신이 있었다. 쓰디쓴 진실이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보덴슈타인은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2p250)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폭발하고 오열하는 보덴슈타인을 보면서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큰 짐을 안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독자로선 갖가지 감정을 느끼며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인물과 방대한 서사를 정교하게 구성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막판의 비약때문이었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마지막 난관에서 발휘한 힘은 증거나 단서나 논리적 추리가 아니라 갑자기 하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전깃불처럼 번쩍 켜진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작 의심했어야 할 단서, 진작 캐물었어야 할 질문, 진작 고려했어야 할 인간관계를 다 놓친 후에야 갑작스런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진범을 외곽에 감춰놓았다가 느닷없이 무대 중심으로 끌어들인 느낌이랄까요? 차라리 쉽게 예상되더라도 좀더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 진범이었다면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막판의 비약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을 이미 읽긴 했지만, 경찰 옷을 벗으려던 보덴슈타인이 어떤 경위로 계속 강력11반에 남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루퍼츠하인을 떠나 연인의 품으로 날아간 보덴슈타인의 이후 행보도 궁금하고, 그의 후임으로 반장직을 임명받은 피아의 처지도 역시 궁금할 뿐입니다. 이제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잔혹한 어머니의 날한 편만 남았는데, 두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서라도 하루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2019년에 출간된 시리즈 9잔혹한 어머니의 날이후 2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무척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202111월에 독일에서 시리즈 10‘In ewiger Freundschaft’(네이버 번역에 따르면 영원한 우정정도?)가 출간됐습니다. 전작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됐던 점을 감안하면 반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째든 올해 안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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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테러
힐러리 로댐 클린턴.루이즈 페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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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인 50대 후반의 엘런 애덤스가 새 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자 모두 놀랍니다. 경선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공격했던 엘런을 임명한 신임 대통령 윌리엄스의 결정도, 그 임명을 수락한 엘런의 결정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둘 사이는 견원지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모종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장관직을 받아들인 엘런은 어떻게든 난국을 헤쳐 나가려 하지만 유럽에서 잇달아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거기에 중동의 테러리스트와 러시아 마피아는 물론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내 극우조직까지 관련된 게 밝혀지자 혼란에 휩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유럽, 중동, 러시아를 날아다니며 테러의 배후와 궁극적인 목표를 조사하던 엘런은 미국을 향한 끔찍하고 명백한 공격 계획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에 빠집니다.

 

대통령이 될 뻔한 베테랑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과 캐나다의 조용한 마을을 무대로 한 서정적인 미스터리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작가 루이즈 페니가 함께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 소설이 테러를 소재로 한 정치 스릴러라는 걸 알곤 놀람과 함께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입니다.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한 힐러리가 재임 중에 겪었던 일을 자서전으로 펴낸 거라면 몰라도, 루이즈 페니와 함께 미치 랩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테러-액션-정치 스릴러를 썼다는 건 만우절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테이트 오브 테러는 제목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테러의 위협에 처한 미국의 상황을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엘런 애덤스는 누가 봐도 힐러리 클린턴의 분신입니다. 거대 미디어 제국의 수장이었다는 이력만 빼면 거침없이 폭주하던 열혈 국무장관 힐러리의 모습이 수시로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테러 현장은 물론 관련 국가들의 수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가 하면, 다소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충고와 독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완급을 조절한 외교술과 능란한 정치적 판단, 그리고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능력까지 겸비한 엘런은 미국을 향한 테러 계획을 밝혀내고 배후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며 마치 중년여성으로 환생한 미치 랩을 보는 듯한 인상까지 뿜어냅니다.

 

엘런 외에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국의 수장들은 누구라도 그 모델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노골적으로 묘사됩니다. 막가파 식 정치와 외교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린 전직 대통령 트럼프, 러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세계적 문제아 푸틴, 그리고 이란의 전설적 지도자 호메이니 등이 그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 외에도 힐러리의 오랜 친구와 그 가족이 중요한 인물로 소설에 등장한다는 점, 또 루이즈 페니가 창조한 캐나다 스리 파인스의 유쾌한 경감 아르망 가마슈가 막판에 카메오로 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입니다.

 

세계를 무대로 삼을 만큼 스케일도 크고, 미국 본토를 향한 어마어마한 테러 계획이나 백악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점은 힐러리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테러-액션-정치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가운데 부드럽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루이즈 페니의 공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의 협업이 적잖은 분량임에도 단번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맞지만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아쉬운 점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판을 너무 크고 복잡하게 펼치느라 정작 단순하고 확실해야 할 요소들이 불분명하거나 모호해졌다는 점입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전용기를 타고 바삐 날아다니는 엘런을 쫓아가다가도 지금 엘런의 목표는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고, 중동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가 얽힌 테러 계획의 전체적인 그림이 문득문득 흐릿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디테일이 스케일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할까요? ‘스테이트 오브 테러못잖은 서사 속에서도 주인공과 악당, 동기와 목표, 계획과 실행이 선명하게 그려진 미치 랩 시리즈가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 덕분에 한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던 점과 확연히 비교되는 대목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이 불분명함과 모호함 탓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해소된 뒤 엘런은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테러의 위협을 피부로 절감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엘런 애덤스 시리즈의 예고편으로 여기는 건 지나친 기대감이겠지만, 혹시라도 후속작이 나온다면 스케일과 복잡함보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설정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거침없는 국무장관 엘런의 매력도 훨씬 더 강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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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레베카 하디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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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가족 3대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애정 활극이란 카피가 눈에 쏙 들어온 작품입니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중국 작가 디안의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였는데,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지독하게 확장시킨 듯한 다소 거칠고 요란한, 하지만 진저리 칠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다소 시니컬하고 다혈질이며 배타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가족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무척 궁금해졌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83세의 할머니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더 일었습니다.

 

밀리 고가티는 남편과 사별한 83세의 할머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순간의 스릴을 위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슬쩍하는 좀도둑 기질과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짜증나는 버릇이 있고, 그 어떤 가벼운 대화든 최소한 40~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하는 등 여전히 질풍노도 한복판을 사는 인물입니다. 아무에게나 거침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가족이든 아니든 무례할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하며,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이고 상황이 불리할 땐 치매노인으로 즉각 변신하는 악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밀리보다 무려 67년이나 어리지만 악동 기질에 관한 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16살 소녀 에이딘입니다.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밀리의 손녀인 그녀는 모든 부모의 악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사춘기 여자아이입니다. 미모와 능력에서 너무나도 뛰어난데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쌍둥이 언니 누알라를 원수로 여기는 에이딘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든 가족에게 거침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아빠 케빈은 에이딘의 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춘기를 뛰어넘는 극한의 트러블메이커라고 할까요?

 

세상에 못마땅한 것투성이고 속칭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불필요한 재앙을 자초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밀리와 에이딘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실은 무척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밀리는 첫 아기를 잃어버린 상심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고, 에이딘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사방팔방에 분노를 터뜨리며 위악을 떨긴 해도 딱 그 또래의 소녀일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는 양로원에서, 또 하나는 기숙학교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각각의 유배지를 벗어나 기막힌 모험을 감행하면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고 예전과는 다른 할머니-손녀 관계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입니다.

 

밀리와 에이딘의 공동의 적은 바로 밀리의 아들이자 에이딘의 아버지인 케빈입니다. 평생 해오던 잡지 일에서 해고당한 뒤 전업주부가 된 그는 여행업계에서 승승장구하며 야근과 출장을 거듭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말문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어머니와 말썽쟁이 딸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그런 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딸을 기숙학교로 유배 보내긴 했어도 결코 비열하거나 못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여학교 행정직원과의 불륜 로망으로 풀어볼까, 궁리하는 소심한 악당인 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어 F로 시작하는 욕을 번역한 ㅆㅂ이란 단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욕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진짜 욕 하고 싶겠다, 라는 공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유일한 수식어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언제 어느 부위가 찢어질지 모르는 누더기로 만든 옷처럼 위태로운고가티 가족은 일대 소동을 거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포장되진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처음보다는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마음도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찢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누더기를 봉합해낸 83살 밀리와 16살 에이딘의 분투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유머와 유려하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은 주인공들의 분투를 빛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특히 한없이 길게 늘어져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읽혔던 문장들은 작가의 힘이자 번역자의 공이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레베카 하디먼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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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 마이크 해머 시리즈 3 밀리언셀러 클럽 32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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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마이크 해머와 함께 호텔방에 묵었던 친구가 밤사이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문제는 해머는 만취하여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는 점, 또 사용된 총기가 하필 해머의 것이란 점입니다. 평소 해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검사는 그를 용의선상에 올린 것은 물론 탐정 면허까지 취소시키지만 최종적으론 자살로 결론짓습니다. 해머는 친구의 죽음이 결코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는데, 친구의 행적과 근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른 관광지이자 불법 도박과 매춘이 은밀히 이뤄지는 구역, 그리고 한 파티에서 친구와 동행했던 모델과 그녀가 속한 에이전시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사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사이, 해머에 대한 살해 시도가 연이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예기치 못한 시체들이 발견되면서 해머는 오히려 용의자로 쫓기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복수는 나의 것’(원제 ‘Vengeance Is Mine’)은 한국에 출간된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20년 가까이 후속작 소식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남은 시리즈를 만나긴 어려울 것 같지만, 희대의 폭주탐정 마이크 해머의 이야기를 세 편이나마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마이크 해머 시리즈1947~1996년에 걸쳐 모두 13편이 출간됐습니다.)

 

난 살인자들을 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살인자를 쏘아 그 피가 바닥에 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다. 살인을 하고도 빠져나가는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p263)

 

이 시리즈의 첫 편 제목인 내가 심판한다’(원제 ‘I, The Jury’)는 탐정 마이크 해머의 캐릭터를 한눈에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신과 함께 살인자에겐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내가 직접 응징하고 처단한다.”는 행동원칙을 가진 해머는 매번 45구경 권총을 거침없이 쏘아대며 폭주탐정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경찰과의 트러블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라도 그가 삐끗하기만을 기다리는 검찰과의 신경전도 해머의 폭주를 전혀 막지 못합니다.

 

그런 해머가 이번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대로 앞선 두 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를 장착합니다. 피살자가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란 점, 살인용의자로 지목당해 탐정 면허까지 빼앗긴 점, 수사 도중 연이어 피습을 당한 점, 그리고 사건관련자들이 줄줄이 살해되는 점 등 해머에게 복수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재료들은 그야말로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약간의 우연과 행운, 생각지 못했던 정보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해머의 추리 역시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몇 차례의 반전 끝에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해머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작가는 해머가 단지 거침없이 총만 쏴대는 무력꾼이 아니라 나름의 혜안과 추리력을 겸비한 명탐정임을 여러 차례 입증해보입니다.

 

해머에게는 두 명의 중요한 조연이 있는데, 하나는 절친이자 뉴욕경찰 강력반 반장인 패트릭 체임버스(일명 팻)이고, 또 하나는 밀당의 로맨스를 주고받는 비서 벨다 스탈링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인 해머를 경찰에 영입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가 거절만 당해온 팻은 매번 해머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잘 해야 본전도 못 찾는 캐릭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직을 걸고 해머를 돕는 강수를 두기도 합니다. 탐정면허까지 가진 매력적인 비서 벨다 역시 그동안 다소 애매한 수준에 머물던 해머와의 밀당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가 하면, 모처럼 사무실을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 해머의 수사를 도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만, 앞선 두 편과 마찬가지로 해머의 수사는 간혹 뜬금없는 비약과 개연성 부족한 급진전 때문에 몇몇 대목에서 위화감을 자아내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설계해놓은 경로대로 인물과 사건이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은 전작들에 비해 그런 경향이 좀더 노골적이어서 초반부터 좀 헤맨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매력과는 무관하게 미스터리 서사 자체가 살짝 허술해 보인 건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1950년에 출간된 작품이라 과학수사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오로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싸워야하는 해머의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곤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해머의 카리스마와 매력이 더 빛났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해머가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어떻게 성장해나갔는지 알 길은 요원하지만, 그래도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라 불리는 마이크 해머 시리즈가 언젠가는 한국에서 재조명받을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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