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레베카 하디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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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가족 3대가 펼치는 전대미문의 애정 활극이란 카피가 눈에 쏙 들어온 작품입니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중국 작가 디안의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였는데, 한국형 막장드라마를 지독하게 확장시킨 듯한 다소 거칠고 요란한, 하지만 진저리 칠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다소 시니컬하고 다혈질이며 배타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가족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무척 궁금해졌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83세의 할머니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더 일었습니다.

 

밀리 고가티는 남편과 사별한 83세의 할머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순간의 스릴을 위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슬쩍하는 좀도둑 기질과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짜증나는 버릇이 있고, 그 어떤 가벼운 대화든 최소한 40~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하는 등 여전히 질풍노도 한복판을 사는 인물입니다. 아무에게나 거침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가족이든 아니든 무례할 정도로 이것저것 요구하며,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이고 상황이 불리할 땐 치매노인으로 즉각 변신하는 악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밀리보다 무려 67년이나 어리지만 악동 기질에 관한 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은 16살 소녀 에이딘입니다.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밀리의 손녀인 그녀는 모든 부모의 악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사춘기 여자아이입니다. 미모와 능력에서 너무나도 뛰어난데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쌍둥이 언니 누알라를 원수로 여기는 에이딘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든 가족에게 거침없이 퍼붓습니다. 특히 아빠 케빈은 에이딘의 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춘기를 뛰어넘는 극한의 트러블메이커라고 할까요?

 

세상에 못마땅한 것투성이고 속칭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불필요한 재앙을 자초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밀리와 에이딘이지만, 두 사람 모두 실은 무척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밀리는 첫 아기를 잃어버린 상심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고, 에이딘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사방팔방에 분노를 터뜨리며 위악을 떨긴 해도 딱 그 또래의 소녀일 뿐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는 양로원에서, 또 하나는 기숙학교에서 본인들이 원치 않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각각의 유배지를 벗어나 기막힌 모험을 감행하면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고 예전과는 다른 할머니-손녀 관계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입니다.

 

밀리와 에이딘의 공동의 적은 바로 밀리의 아들이자 에이딘의 아버지인 케빈입니다. 평생 해오던 잡지 일에서 해고당한 뒤 전업주부가 된 그는 여행업계에서 승승장구하며 야근과 출장을 거듭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말문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어머니와 말썽쟁이 딸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건 그런 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딸을 기숙학교로 유배 보내긴 했어도 결코 비열하거나 못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자기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여학교 행정직원과의 불륜 로망으로 풀어볼까, 궁리하는 소심한 악당인 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어 F로 시작하는 욕을 번역한 ㅆㅂ이란 단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욕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진짜 욕 하고 싶겠다, 라는 공감 때문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유일한 수식어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단어가 이 작품의 제목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언제 어느 부위가 찢어질지 모르는 누더기로 만든 옷처럼 위태로운고가티 가족은 일대 소동을 거쳐 다시 한자리에 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포장되진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처음보다는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마음도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찢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누더기를 봉합해낸 83살 밀리와 16살 에이딘의 분투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유머와 유려하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은 주인공들의 분투를 빛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특히 한없이 길게 늘어져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읽혔던 문장들은 작가의 힘이자 번역자의 공이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레베카 하디먼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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