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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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토대학 미식축구부 출신인 니시와키 데쓰로는 13년 만에 팀 매니저였던 히우라 미쓰키와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두 가지 놀라운 고백을 듣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몸은 여자지만 어려서부터 남자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 또 하나는 자신이 일하던 바의 호스티스를 스토킹해온 남자를 살해하고 도망치는 중이란 점입니다. 데쓰로와 그의 아내이자 역시 미식축구부 매니저였던 리사코는 신의 실수를 바로잡아 남자가 되려는미쓰키를 자신들의 집에 감춰주기로 합니다. 경찰에 체포된다면 미쓰키의 바람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식축구부 동료였던 사회부 기자 하야타가 스토커 살해사건을 취재하며 데쓰로를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미쓰키마저 행방을 감추자 데쓰로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릅니다.

 

2003짝사랑’, 2006아내를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됐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1년 작품입니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달달한 멜로처럼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무척이나 민감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젠더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매체와 장르를 불문하고 지금도 여전히 다루기 조심스러운 소재라서 그런지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 작품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미쓰키를 통해 젠더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거기에 스토커 살해사건이라는 미스터리를 접목시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두텁게 만듭니다. 자신의 성정체성 문제를 고백한 뒤 홀연히 사라진 미쓰키의 행방을 쫓는 과정에서 데쓰로는 미쓰키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적잖이 만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정체성이 달라 고민하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탈출구를 마련하는지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스토커 살해사건의 진실 - 혹시 범인은 따로 있는가? 그를 죽인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 까지 추적하게 되는데, 거기에 냉정한 사회부 기자가 된 미식축구부 동료 하야타가 끼어들면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힙니다. 한편으론 지금껏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젠더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미쓰키를 찾아 살인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데쓰로의 행보는 그저 무거울 수밖에 없고, 그 무게감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당사자만의 내밀한 고민이자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공유돼온 젠더의 문제가 스토커 살해사건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에 만천하에 공개될 위기에 처하고, 거기에 휘말린 여러 인물들이 숱한 고민과 갈등, 위기와 충돌을 겪는 이야기가 700여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 실려 있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역시 젠더의 문제입니다. 꼼꼼하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역력한 가운데 몸과 마음의 정체성이 달라 삶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사실적이면서도 절실하게 그려져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남자인 미쓰키가 호르몬주사를 맞고 성대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몸을 바꿔보려 몸부림치는 모습도, 대학시절 미쓰키와 성관계를 가진 적 있는 데쓰로가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도, 미쓰키가 남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주변 인물들의 분투도 모두 100%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성정체성 문제를 겪는 미쓰키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따갑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지 못합니다. 음지에서 같은 취향의 사람들과만 어울리거나 미쓰키의 동료들처럼 은밀하고 불법적인, 하지만 그래서 평생 두려움을 감당해야 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미쓰키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누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젠더의 문제가 좀더 자주, 폭넓게 논의돼야 할 것입니다. ‘외사랑은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런 논의의 장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충분한 텍스트입니다. 좀더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젠더에 관해 고민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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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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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소노코는 고향 나고야에서 교통경찰로 근무 중인 오빠 야스마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독한 배신으로 인한 절망감을 호소합니다. 유일한 혈육인 동생의 상황이 심각해 보인 야스마사는 급히 도쿄로 달려오지만 소노코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입니다. 언뜻 보면 자살 같았지만 야스마사는 집안 곳곳에서 타살의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경찰에게 연락하기 전에 그 흔적들을 수거합니다. 경찰로 하여금 자살로 믿게 만든 뒤 자신이 직접 범인을 찾아 응징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스마사의 계획은 네리마 경찰서 소속 가가 형사 때문에 난관에 부딪힙니다. 가가는 소노코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고, 시신의 첫 발견자이자 오빠인 야스마사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네 번째 작품으로 가가가 도쿄 네리마 경찰서 소속으로 처음 등장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이 작품은 초반부터 용의자를 단 두 명으로 압축시킵니다. 동생 소노코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 개인적으로 복수할 다짐을 한 야스마사가 찾아낸 용의자는 그녀의 오랜 절친인 가요코, 그리고 최근까지 연인이었던 준이치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두 명의 추격자와 두 명의 용의자 등 단 네 명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뒤늦게 엉뚱한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할 리는 없을 테니 독자 입장에선 두 용의자의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 평범하고 단순한 문장들조차 쉽게 흘려보내기 어려운, 그야말로 꼼꼼한 정독을 요구받게 됩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진범을 찾아내려는 야스마사와 그의 계획을 간파하고 한 발 앞서 범인을 찾아내 사적 복수를 저지하려는 가가는 여러 차례 충돌하긴 해도 적대적인 관계를 맺진 않습니다. 야스마사 입장에선 가가의 노골적인 방해가 당혹스럽지만 가가는 사람 좋은 태도로 야스마사를 대하는 것은 물론 가끔 유용한 정보를 조금씩 흘려주기도 합니다. 서로의 속내를 파악한 시점에서, 또 막판 두 용의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장면에선 가벼운 충돌을 벌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파트너 같은 협업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가는 잊을 만하면 가끔씩 등장해서 이야기의 방향을 전환하는 역할을 할 뿐 실질적인 추리는 오롯이 야스마사의 몫입니다. 사고현장에서 작은 단서를 통해 사고 경위를 파악하던 교통경찰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야스마사의 조사는 어지간한 강력계 형사보다 유능해보입니다. 또 자신의 인생을 유보시키면서까지 끔찍이 아껴온 동생 소코노에 대한 애정은 그가 경찰을 속이면서까지 감행하려는 사적 복수의 무게감을 훨씬 더 묵직하게 만들어줍니다.

 

10여 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납니다. 마지막에 작가가 범인이 둘 중 누군지를 특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어떤 단서가 결정타였는지 등을 담은 봉인 해설서가 실려 있긴 하지만, 난감하게도 제가 구매한 책은 인쇄과정의 오류로 인해 후속작인 내가 그를 죽였다봉인 해설서가 실려 있어서 결국 여기저기 스포일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반부터 두 용의자의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꼼꼼하게 정독해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스포일러를 통해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고도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이걸 어떻게 눈치 채나?”라는 탄식이 나올 만큼 결정적인 단서들은 교묘하고 은밀하게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히가시고 게이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느낌이라고 할까요?

 

다만, 모든 진실을 알아낸 뒤에도 다소 개운치 못한 느낌이 남았던 건 사실입니다. 야스마사가 조금만 눈썰미가 있었더라면 두 용의자를 처음 만난 순간 누가 범인인지 알아챘을 것 같다는 위화감, 그리고 왜 가가는 이토록 단순한 트릭을 진작 간파하지 못했나,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이긴 하지만 두 번째로 읽으면서도 이 위화감과 의문이 여전히 느껴진 걸 보면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작품인 게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후속작인 내가 그를 죽였다역시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인데, 희미한 기억이긴 해도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거부감이 덜 했던 것 같긴 합니다. 부디 아무런 위화감이나 의문 없이 가가 형사의 순도 높은 매력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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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차가운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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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와카타케 나나미는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이치노세 다에코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화려하고 거침없는 인상의 다에코는 와카타케에게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하지만, 정작 얼마 후 자살을 시도한 끝에 의식불명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날, 와카타케는 다에코가 우편으로 보낸 수기를 받습니다. 거기엔 마음속에 차가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한 독살범의 고백과 함께 다에코가 기록한 충격적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단 하루, 그것도 몇 시간 만난 게 전부지만 다에코의 수기를 읽은 와카타케는 그녀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탐정역할에 뛰어듭니다.

 

나의 차가운 일상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로 유명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세 번째 개정판으로 나온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19913,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나의 차가운 일상이 그해 10월에 출간됐으니 불과 7개월 만에 연이어 나온 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 이름이 작가와 동명인 와카타케 나나미인데, 그래선지 한국에선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로 명명됐습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12편의 단편을 통해 사보 편집자인 와카타케 나나미와 익명의 작가 사이에 벌어지는 추리의 향연을 그리고 있다면, ‘나의 차가운 일상은 직장을 그만둔 와카타케 나나미가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미지의 여인 때문에 탐정 역할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지금까지 읽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그 어느 작품과도 뚜렷이 차별될 정도로 형식과 내용 모두 독특한 작품입니다. 23중의 서술트릭과 밀실트릭이 등장하고, ‘진범 찾기자체보다 수기를 남긴 채 의식불명에 빠진 다에코의 삶을 역추적하는 이야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와카타케 나나미 특유의 냉소적이거나 돌발적인 서사는 여전한데, 특히 오지랖 넓은 좌충우돌 탐정 하무라 아키라를 꼭 닮은 아마추어 탐정 와카타케의 캐릭터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도 수시로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다에코는 왜 이 수기를 쓴 것일까? 왜 나에게 이 수기를 보낸 것일까? ‘수기속 무자비한 독살범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까? 수기는 다에코의 유서일까, 아니면 그녀를 살해될 운명에 빠뜨린 흉기일까?

 

여러 의문에 휩싸인 가운데 누가 다에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하려 했나?”, “수기에 등장하는 독살범은 누군가?”가 와카타케의 1차 미션이지만, 정작 그녀의 집요한 탐문이 얻어낸 결과는 팩트보다는 다에코의 삶 이면을 지배해온 어둡고 차가운 그 무엇이 대부분입니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다에코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그녀가 정말 살해된 건 맞는지, 만일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이 와카타케를 괴롭힙니다.

또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일그러진 가족, 바보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한 독살범의 증오와 살의, 진심인지 허언인지조차 모호한 왜곡된 사랑, ‘제대로이어진 거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관계 등 다에코를 둘러싼 심리적인 요인들이 워낙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와카타케는 명쾌한 탐정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복잡 미묘한 심리 미스터리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막판에 와카타케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긴 하지만 이런 설정들 때문에 독자로서는 개운함과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씁쓸한 여운을 맛보게 됩니다. 마치 여러 사람의 심연을 한꺼번에 들여다보다가 스스로 괴물이 될 뻔한 순간에 가까스로 발을 뺀 느낌이랄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무척이나 복잡하고 산만한 구성을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복잡함과 산만함을 해독하고 해석하는 게 와카타케 나나미 읽기의 진짜 매력이긴 하지만 때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독자의 호불호를 가르는 경계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의 차가운 일상은 팩트나 단서보다 심리적 요인들이 많이 개입돼서 그런지 같은 페이지를 두세 번씩 되읽은 경우가 더 많았는데, 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뒤에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좀더 확실히 맛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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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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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사보 편집자가 된 와카타케 나나미는 딱딱한 훈계성 기사보다는 재미있는 단편소설을!”이라는 상부의 요구를 받고 작가인 선배에게 의뢰하지만 그는 사양하며 대신 단편 미스터리를 잘 쓰는 후배를 소개해줍니다. 창작보다는 자신이 겪은 일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그 후배의 유일한 요구조건은 자신의 이름과 신상을 철저히 감춰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익명의 작가의 단편 미스터리 연재는 1년에 걸쳐 이어집니다. 미스터리, 호러, 괴담, 유머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가까운 사람의 하소연이나 부탁을 받은 주인공 가 추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들입니다. 1년의 연재가 종료된 뒤 와카타케 나나미는 12개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눈치 챕니다.

 

개정판 덕분에 세 번째 읽게 된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본에서 1991년에 발표된 와카타케 나나미의 데뷔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본 딴 주인공을 사보 편집자로 등장시킨 점도 재미있고, ‘익명의 작가가 기고한 12편의 단편 속에 그려진 크고 작은 일상 미스터리도 흥미롭지만,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연재가 끝난 뒤 익명의 작가와 와카타케 나나미가 벌이는 추리의 향연입니다.

단편집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아무래도 “‘익명의 작가가 기고한 독특한 단편 모음집으로만 여기기 쉬운데, 혹시라도 설렁설렁(?) 읽는다면 추리 대결이 펼쳐지는 조금 긴 듯한 편집후기라는 후반부 챕터에서 꽤나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12편의 단편을 꼼꼼히 읽으며 그 안에 숨겨진 작은 단서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담아두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반드시 두 번은 읽어야 제대로 진가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막판의 거듭된 반전에 감탄하고도 두 번 읽는 걸 내켜하지 않는 독자 역시 꽤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12편의 단편 가운데 다소 모호하거나 비약이 심하거나 그래서 뭐?”라는 반문이 들게 만드는 수록작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사보 편집자인 와카타케 나나미가 12편의 단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낸다는 설정은 너무나도 흥미롭지만, 정작 12편의 단편 자체의 매력이 조금은 미약하다고 할까요? 고백하자면, 서평을 쓰지 않던 10여 년 전에 처음 이 작품을 읽었고, 그때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지만 실은 다시 읽는 동안 내가 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다 읽은 뒤에 그 좋은 기억의 근거가 막판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 때문이란 걸 깨닫긴 했지만 말입니다.

 

10여 년 전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이후 와카타케 나나미와는 단편집 어두운 범람외엔 만날 일이 없었는데, 2020년 출간된 이별의 수법덕분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시리즈 주인공인 하무라 아키라의 캐릭터에 홀딱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루 48시간도 부족한 열혈 탐정 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은 읽는 사람조차 숨을 헐떡이게 만들 만큼 초고속 폭주 미스터리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같은 매력적인 주인공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린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독자에 따라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면 데뷔작부터 심상치 않아 보이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저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껴 읽겠다는 핑계로 책장에 방치해놓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문득 떠오른 건 세 번째 책읽기에도 불구하고 데뷔작의 저력에 다시 한 번 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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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
하야미 카즈마사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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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살 다니하라 교코는 중간급 규모인 도쿄 무사시노서점의 6년차 계약직 직원입니다. 오래 전부터 서점직원을 꿈꿨던 그녀는 7에 불과한 자취방의 네 면 중 세 면을 책으로 채울 정도로 소설을 좋아하고, 박봉인 탓에 월급날 직전이면 지갑이 텅텅 비는데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소설을 사들이지 않곤 배기지 못하는 마니아 독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점 환경도 불만스럽고, 서른이 코앞인 계약직이라 미래도 불안하고, 무엇보다 하나같이 이기적이기만 한 소설가, 출판사, 영업사원에다 책에 대한 애정 하나 없으면서 진상만 부리는 고객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나도 바보 같아 수시로 분노를 유발시키는 서점의 사장, 점장, 동료들 때문에 속을 끓이는 가운데 다니하라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둔다계속 다닌다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일본 역시 출판계가 불황이라곤 하지만 가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읽고 나면 여러 가지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꿈의 사전(事典)을 제작하는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의 분투를 그린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와 인쇄업계를 무대로 인쇄는 책을 만드는 이라고 믿는 이상주의자와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 이라고 단언하는 합리주의자의 이야기를 그린 책의 엔딩 크레딧’(안도 유스케)입니다. 이 두 작품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진심을 진지하고 묵직하게 그린 정극이라면 계약직 서점직원을 주인공으로 앞세운 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는 경쾌하고 코믹하면서도 서점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상과 애환을 코끝 찡하게 그려낸 밝은 톤의 작품입니다.

 

6년째 1엔도 오르지 않은 박봉에 암울한 미래가 걱정되는 주인공 다니하라는 이딴 직장, 진짜 정말로 그만둘 테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하면서도 끝내 서점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저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 좋아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작가에게서 받아 애정 어린 고객에게 고이 전달한다.”는 서점직원으로서의 사명감과 행복을 차마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만큼 책 혹은 책과 관련된 사람들 때문에 느끼는 절망과 좌절도 깊습니다. 다니하라가 보기에 너무나도 바보 같은 존재들 점장, 소설가, 서점 사장, 출판사 영업사원, 손님 - 은 진정 책을 사랑한다기보다 젯밥이나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계약직 서점직원에 불과한 다니하라는 수시로 돌직구 같은 직언을 날립니다. 오로지 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믿고 말입니다.

 

일본에서 개최되는 여러 문학상 가운데 미스터리 분야를 제외하고 가장 관심을 갖는 건 서점대상입니다. 소설가나 편집자가 아닌 전국의 서점직원들이 그해 신간들을 대상으로 가장 팔고 싶은 책을 뽑는데, 덕분에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이 상을 받곤 합니다. (이 작품도 ‘2020년 서점대상에서 9위를 차지했습니다.) 관심도 관심이지만 가장 궁금했던 건 과연 서점직원들이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요즘은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한국의 서점에서 직원이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독자에게 추천하는 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책을 독자에게 전해주려 애쓰는 서점직원 다니하라는 제겐 무척이나 신기해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직원이 있는 서점이라면 온라인서점이 아무리 할인을 해준다고 해도 일부러 발품을 팔아서라도 찾아가고 싶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르물 편식이 심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서 한 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바보 같던 주변사람들과 부딪히고 교류하면서 그들의 진심과 속내를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자신도 바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다니하라의 이야기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또 다른 면모를 만끽하게 해줬습니다.

일본 서점의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니하라의 이야기가 예쁘게 포장된 판타지인지, 현실을 잘 반영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리얼리티의 수준이 50%뿐이라 하더라도 그저 부럽기만 할뿐입니다. 언젠가 한국의 서점에서도 다니하라 같은 직원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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