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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평점 :
‘고전부 시리즈’를 비롯하여 독특한 미스터리를 선보여온 요네자와 호노부가 역사미스터리, 그것도 440여 년 전인 1578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냈다고 해서 놀람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출간을 기다렸습니다. 읽기 전에 검색해보니 100% 픽션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팩션(Faction)인데다 주인공인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와 지략가 구로다 간베에는 전혀 낯선 이름들이라 궁금증이 더해졌습니다.
1578년, 오다 노부나가의 무장이던 아라키 무라시게가 근거지인 아리오카 성(城)에서 모반을 일으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개조한 성에서 오다의 총공세에 맞설 준비를 마친 무라시게 앞에 오다의 군사(軍師) 구로다 간베에가 나타납니다. 무라시게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목숨을 걸고 설득하려던 간베에는 뜻밖에도 목이 달아나지도, 살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지하감옥 흑뢰성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간 아리오카성에는 폭풍전야 같은 전운이 흐르는 가운데 크고 작은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들은 미궁에 빠지면서 성내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고 무라시게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결국 무라시게는 지하감옥의 간베에 외엔 누구도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없음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네 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매 챕터마다 아리오카 성에서 벌어진 기이하거나 불길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완벽한 밀실상태에서 암살이 벌어지고, 전쟁에서 베어온 적군의 머리가 하루아침에 표정이 달라져있는가 하면, 적과 내통하던 자가 거짓말처럼 번개에 맞아 죽는 등 상식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때문에 무라시게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단순히 범인을 찾고 못 찾고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백성을 동요하게 만들어 전쟁의 승패까지 뒤바꿀 수 있는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 무라시게가 지하감옥의 간베에에게 조언을 구하고, 간베에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바탕으로 무라시게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홈즈와 왓슨처럼 사이좋게 미스터리를 푼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과거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현재 적장과 포로가 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애증을 넘어 무척이나 복잡 미묘하게 꼬여있는데다 엔딩에서 거대한 반전을 이끌어낼 만큼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어찌 보면 의뢰인과 안락의자 탐정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에 휘말린 집단과 개인을 상징한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장르는 팩션 미스터리지만, 실은 이 작품의 화두는 ‘전쟁의 민낯’입니다. 패권을 쥐기 위해 동맹과 배신을 밥 먹듯 저지르는 무인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누가 주군이든 상관없는 휘하장수들, 전쟁의 참화 속에 벌레만도 못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 백성 등 “약육강식이 시대정신이고, 살육이 일상인 날들”이 미스터리의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특히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구호만 믿고 전쟁터에 내몰렸던 백성들이 단지 적장의 기분 때문에 대량학살을 당하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중 하나입니다. 극락에 가기 위해 전진하자니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살아남기 위해 후퇴하자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딜레마는 내세를 확신하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와는 다른 지도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반역을 꾀했지만, 어느새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초심을 잃어버린 무라시게는 전쟁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또한 지하감옥에 갇힌 간베에는 전쟁에 관한 한 가담자이면서 동시에 희생자로 그려지는데, 무라시게의 미스터리 해결사인 그의 진짜 속내가 밝혀지는 엔딩은 전쟁이 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깊고 고통스런 화인(火印)을 남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막부 말기 한 사무라이의 처절하면서도 애틋한 삶을 그린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무척 좋아하는데, ‘흑뢰성’은 전쟁의 민낯과 미스터리를 잘 결합함으로써 역사소설의 또 다른 참맛을 만끽하게 해준 작품입니다. 다 읽고도 “정말 요네자와 호노부가 썼다고?”라는 의문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작가라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데뷔 20주년 대작을 마무리한 요네자와 호노부가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