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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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의 주인공은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 제이미 콘클린입니다.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기까지 며칠간만 대화가 가능하며 유령들은 제이미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한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론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독자의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미의 능력을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하곤 연이은 반전을 선사하여 마지막 장까지 흥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6살 소년 제이미의 능력을 아는 건 싱글맘이자 작가 에이전트인 티아뿐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눈으로 제이미의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거나 아들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가 죽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자 티아는 충격과 함께 아들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편 티아의 동성 연인이자 뉴욕 경찰인 리즈 역시 그 자리에서 제이미의 능력을 목격했는데, 이후 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이미를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뼈대만 추리면 짧은 중편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스티븐 킹은 금융위기, 마약, 테러, 동성애, 근친상간, 폰지 사기 등 현대 미국 사회가 안은 민감한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호러물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제이미가 목격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도 이웃의 노부인에서부터 엄마가 관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또래들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은 소년, 10년 넘게 폭탄테러를 자행해온 흉악범, 마약 중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서사 자체를 튼실하고 볼륨감 넘치게 만듭니다.

가장 큰 사건이자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제이미 납치극은 막판에 짧고 빠르게 전개될 뿐이지만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호러의 조각들이 하이라이트 못잖게 매력적이라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매번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이긴 하지만 나중에가 좀더 특별하게 읽힌 이유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도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 킹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여느 작품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인칭 화자인 제이미가 수시로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스티븐 킹과 마주 앉은 듯한 친밀감이 고조되곤 합니다. 그래선지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인 제이미의 캐릭터 역시 조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리얼해서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게 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까진 아니어도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만한 내용이 많아서 줄거리가 거의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소름 돋게 하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뜻밖의 호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중에를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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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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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은 개인적으로 일본 미스터리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첫 번째 소설집(1998년 일본 출간)이자 ‘D현경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애 작가로 꼽으면서도 그의 첫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좀 이상한이유 때문입니다. 2년 전쯤인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마당에 신간 소식은 너무나도 뜸하다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그렇게 아껴둔 작품들이 그늘의 계절’, ‘동기’, ‘루팡의 소식입니다. 이제 그늘의 계절을 읽어버렸으니 신간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 손에는 두 편밖에 남지 않게 됐고, 그마저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D현경 시리즈’(일본출간연도)그늘의 계절’(1998) - ‘동기’(2000) - ‘얼굴’(2002) - ‘64’(2012)로 구성돼있습니다. 장편인 ‘64’를 제외하곤 모두 D현경을 무대로 한 단편집인데, 기자 출신인 요코야마 히데오가 세밀하고도 냉정한 시각으로 경찰 조직을 바라보며 직조한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엄격한 조직의 룰이 적용될 것만 같은 경찰 조직이지만, 그 안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뿜어내는 부조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옮긴이의 말, p272)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그늘의 계절의 주인공들은 경무부 소속입니다. 인사담당 조사관 후타와타리 신지, 감찰관 신도 다카요시, 여경 담당계장 나나오 도모코, 비서과의 쓰게 마사키 등 현장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부가 아니라 조직 관리가 주 업무인 경무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이 기존의 경찰 미스터리와 확실히 다른 서사를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면 내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문제를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함으로써 어떻게든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자나 경쟁부서를 가차 없이 짓누르거나 치밀한 계획 하에 자신의 공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 야망에 무척이나 솔직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처럼 전형적인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할까요? 탐정 역할을 맡아 조직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걸 기회 삼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적인 속물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욕망과 야망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씁쓸한 엔딩을 맞이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지나친 욕망과 야망을 보기 좋게 꺾어놓으며 권선징악의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바로 이런 민낯 그대로의 인간들이 풍기는 다양한 욕망과 야망의 냄새가 독자의 구미를 더욱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편집이지만 수록작에 대한 소개 없이 거의 총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표지만 보고 코믹하거나 가벼운 미스터리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요코야마 히데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즈음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출간된 작품들('종신검시관', '동기’) 모두 표지 때문에 오해받기 쉬운 작품들인데, 실은 그 어느 경찰 미스터리보다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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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룰렛
오윤희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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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문회사 간판을 걸곤 일반인을 상대로 거액의 코인사기를 치던 정상구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자 경찰은 사기 피해자의 복수로 여기고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기 피해자 대부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을 맡은 강력반 팀장 이준현과 신참 김도윤의 탐문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대두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서 수사는 또다시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더구나 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그 역시 정상구처럼 사기 행각을 벌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이준현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 가능성을 떠올리며 사기 피해자들을 더욱 집요하게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누가 더 돈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 속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표현은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일까요?

 

금붕어 룰렛은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된 지독한 악의와 증오를 그린 살인사건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팩트를 기반으로 한 르포에 더 가깝습니다. 사기를 당한 자가 더 멍청하고 사악하다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기꾼들, 간절해서든 탐욕스러워서든 공짜로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사기꾼의 덫에 걸린 걸 깨달은 뒤에야 자탄에 빠지는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의 진술을 들으며 도대체 누가 더 나쁘고 탐욕스러운 건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수사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작가는 선한 피해자악한 가해자라는 이분법 대신 실은 그들이 품고 있는 욕망이란 게 알고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꼭 닮은꼴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즉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든 사기 피해자들이든 달콤한 말로 상대를 속여 피 같은 돈을 갈취하고도 조금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기꾼이든 노력 없이 돈을 벌고 싶어 한 죄는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양쪽 모두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 점입니다.

 

삼개주막 기담회 시리즈등 여러 작품을 내놓은 작가답게 문장과 구성은 무척 안정적이지만, 코인사기를 소재로 한 반전 충만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정직한 돌직구에 가까운 르포 스타일의 서사는 다소 아쉽게 읽혔습니다. 상당한 분량이 피해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사연을 갖고 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기꾼의 꾐에 그리 쉽게 넘어가게 됐던 건지에 할애됐는데, 실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뉴스를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익숙한 사연들이라 긴장감을 고조시키진 못했습니다. 미스터리를 위해 꼭 필요한 재료들이긴 했지만 조금은 과해 보였다고 할까요? 수사를 맡은 이현준과 김도윤 콤비의 역할이 비슷비슷한 탐문의 반복에 그치고 만 건 르포 스타일이라는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역시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사기 관련 뉴스를 보며 어떻게 저런 거에 속아 넘어가?”라며 혀를 끌끌 찬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붕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탐욕은 언제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위험천만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며 그 균열은 언제든 한 인간을 뉴스 속 멍청한 피해자로 돌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금붕어 룰렛의 가장 큰 미덕은 그런 상황에 대한 강력한 경고장이자 명확한 지침서라는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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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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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방범이후 9. 르포라이터로서의 삶을 접고 조용히 살아가던 마에하타 시게코는 중년부인 도시코의 방문 이후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2살에 사고로 죽은 아들 히토시가 사이코메트리였다고 짐작하는 도시코는 시게코에게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딸을 살해한 뒤 암매장했던 도이자키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었지만 시게코는 단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토시의 그림 가운데 모방범사건이 벌어진 산장의 그림과 기표들을 발견한 시게코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쩌면 히토시는 진짜 사이코메트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게코는 히토시의 사연과 함께 그가 그림으로 남긴 도이자키사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5년도 훌쩍 넘어서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를 읽다가 “‘낙원이 초능력자 이야기였다고?”라며 꽤나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도이자키사건이 설명되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는데, ‘낙원역시 모방범못잖게 씁쓸하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는 점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시게코의 경력은 9년 전 모방범으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범인의 정체를 직접 폭로하여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자괴감과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시게코는 자신이 취재한 것들을 책으로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30대 초였던 시게코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작은 규모의 무가지 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지금도 시게코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당시 시게코가 책을 내지 않은 사실에 놀라고, 그녀가 더는 르포라이터로서 일하지 않고 있음에 더 크게 놀랍니다. 그런 시게코가 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건 그만큼 죽은 소년 히토시가 남긴 그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이자키 부부는 16년 전 중학생 딸 아카네를 살해한 뒤 마루 밑에 매장을 했고, 최근 화재로 집이 불타버리자 경찰에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부부는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고, 아카네의 동생 세이코는 이혼이라는 후폭풍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게코는 죽은 소년 히토시가 아카네의 죽음에 연루된 누군가와 접촉한 탓에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발휘됐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가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히토시와 도이자키의 접점을 설명하는 정보제공자 역할 외에도 사건의 비극성과 그 이면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조연을 맡습니다.

 

1~2권을 합쳐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낙원은 주인공 시게코에게나 독자에게나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지독한 탐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토시와 도이자키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낱낱이 파고드는 시게코의 탐문은 나름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대한 수사일지처럼 읽히기도 해서 모방범을 통해 시게코의 전력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꽤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불행한 사건에는 360도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진실은 있을 수 없어요.”라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아서 시게코는 물론 독자 역시 그 지독하고 방대한 탐문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낙원은 참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타고난 사이코메트리 재능 때문에 괴로워했던 12살 소년 히토시도, 딸 아카네의 목을 졸라 죽이고 16년 동안 마루 밑에 방치했던 도이자키 부부도, 부모가 언니를 죽였다는 진상을 알게 된 뒤 격심한 혼란에 빠진 동생 세이코도 낙원이라는 안락하고 따뜻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그 누구의 낙원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망각한 후에,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성립되는 거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의 낙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인터넷서점의 한 서평처럼) “연인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낙원이지만, 연쇄살인마에게는 살인의 무대가 낙원이다.”라는 식의 좀더 심오한 의미의 낙원을 그려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만의 낙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역사와 감정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 자신 외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그리고 나의 낙원은 누군가의 악몽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나의 비극은 누군가의 낙원의 터전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암시한다고 할까요?

 

모방범역시 사건 못잖게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파고든 작품이지만 낙원은 후자의 비중이 훨씬 더 묵직하고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편하게 읽히지도 않고,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만큼 남는 여운은 깊고 무겁습니다. 신문에 연재됐던 작품인데다 지독한 탐문기에 가까워서 다소 늘어지고 지루한 대목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들을 견뎌낸다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린 낙원이 어떤 모양새를 지녔는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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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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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성에서 작은 다방 흑조를 경영하는 천연주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때론 그 답례로 자신이 추리한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들려줘서 손님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는데, 그 일이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커피보다 다른 볼일로 흑조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탐정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흥미롭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그 이면의 진상을 나름대로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런 그녀가 부산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수행원 두 명을 데리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구포, 동래, 부산에서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기이한 이야기들과 마주칩니다.



무경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출판사의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보니 계간 미스터리(2023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했고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으로 호평을 받은 작가라 급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그 진상을 추리한다는 설정이 제 최애작 중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야마 변조괴담 시리즈와 닮은꼴이란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부산이라는 무대가 먼저 눈길을 끌었지만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기대가 된 건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친일파 아버지 때문에 천연주와 센다 아카네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유의 촉을 발휘하여 그 이야기 이면의 진상을 추리하곤 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며 행동력까지 갖춘 천연주의 삶을 요동치게 만든 건 2년 전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힌 화마였습니다. 수행원의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약간의 충격에도 솟구쳐 오르는 고통에 절망했고, 그렇게 피폐해진 몸은 그녀에게서 표정과 감정마저 앗아갔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은 흑조를 찾은 손님들에게서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라는 옛 친구의 말을 가슴에 품은 채 그 이상함의 이면을 짐작하는 일에 몰두하곤 합니다. 셜록 홈즈처럼 눈에 보이는 단서만으로 상대의 신분이나 처지를 간파해내는 그녀를 사람들은 요괴 사토리’(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읽어내는 요괴)라고 부르기도 하고, 화상을 가리기 위한 검은 옷과 그에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의 조합 때문에 인간이 아닌, 그저 인간을 닮았을 뿐인 다른 존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연도 많고 캐릭터도 독특한 천연주가 아버지의 지시로 동래온천에서의 요양을 위해 경부선에 올라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개를 여우가 물고 갔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개의 주인인 일본인 지주는 여우 소탕령을 내립니다. 부산을 코앞에 두고 우연히 구포에 머물게 된 천연주는 그 소문에 의심을 품곤 개의 죽음과 그 이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래온천 스미레장()에 투숙한 천연주는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천연주의 추리로 가까스로 해결됩니다.

 

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산에서 고교 선배 채상미를 2년 만에 만난 천연주는 그녀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음을 감지합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게 분명하다고 호소하는 채상미를 위해 천연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계획을 세웁니다.

 

잔인하거나 복잡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천연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매 수록작마다 크고 작은 반전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을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은 대목들이나 당시 부산과 그 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장면들도 읽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덕분에 작가의 전작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후속작에서 그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보이는) 천연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 천연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과외선생, 천연주와 비슷한 감성을 지녔던 여고시절 친구 선화 - 의 과거와 현재도 궁금해졌는데, 그들이 등장할 사건은 무게감이나 밀도가 남달라서 천연주의 현재의 삶을 크게 뒤흔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4개에 그친 건 임팩트 있는 한 방이 부족해보였기 때문인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건이든 감정이든 조금은 더 세고 독한 전개가 펼쳐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런 기대를 하는 이유는 모처럼 롱런 시리즈를 이끌 만한 매력적인 주인공을 발견한 반가움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바람이지만 마담 흑조천연주의 이야기가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만큼 오래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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