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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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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가 1981년에 발표한 '10만분의 1의 우연'은 한 아마추어 작가가 찍은 보도사진에 얽힌 미스터리이다. A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뽑혀 유명해진 '격돌'이란 제목의 그 작품은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6중 추돌 사고를 찍은 것으로 그 사고는 사망자만 무려 6명이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이 사진이 그 해의 최고 작품에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충돌하여 화염에 휩싸이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여 현장의 생동감과 처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왜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카메라 셔터부터 눌렀냐는 그것이다. 찍은 이가 프로 사진 기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더욱 불궈진 논쟁이었다. 보도의 사명도 없는 이가 그토록 현장 포착에만 집중한 것은 공명심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찍은 이를 잘아는 동호회의 한 고참 사진 작가는 실제로 그가 그런 공명심이 아주 많았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10만 분의 1의 우연'으로 포착한 행운'이라고 말했던 그 사진에 의혹을 품는 이가 나타난다. 그는 너무나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던 지라 과연 그것이 정말로 우연히 얻어 걸린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계산된 흑막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한다. 더구나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운전자가 증언한 충돌하기 직전에 언뜻 보았다는 빨간 불빛의 존재도 수상하다. 그는 모두가 우연으로 치부해버린 사건을 추적하고 아래에 드리워 있었던 어두운 흑막은 서서히 드러난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이런 이야기인데 읽어보면 얼른 두 작품이 떠오른다. 설정이 비슷해서 어쩌면 세이초가 영향을 받지도 않았을까 생각되는 작품들이다. 윌리엄 데안드리아의 호그 연속 살인(THE HOG MURDERS)와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RENDEZVOUS IN BLACK)가 바로 그 장본인들인데, 바로 호그 연속 살인은 1979년에 나왔고 상복의 랑데뷰는 1948년에 나왔으니 10만 분의 1의 우연이 나온 1981년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는 지라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 두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라도 먼저 두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말하는 게 낫겠다. '호그 연속 살인'의 시작은 도로로 구조물이 떨어져 지나가는 차가 사고를 당하여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다. 사고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뜻밗에 나타난 문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막는다. 누군가 그 현장에 'HOG'라는 서명을 남긴 것이다. 마치 이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임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그 때문에 이 사건을 살인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수사하게 된다. 하지만 도저히 범행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조사해도 이 사건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만 보인다. 누군가 친 장난이겠거니 여길 무렵 제2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역시도 아무리 보아도 사고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떡하니 또 HOG라는 서명이 있다. 뒤이어 또다시 HOG의 서명이 된 천재지변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이제 수사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속적으로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범행 수법을 도저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정말 HOG의 짓이라면 그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이것이 호그 연속 살인의 주된 줄거리다.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는 소형 경비행기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집요한 복수의 드라마다. 일부러 '집요한'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은 이 남자가 그 때 비행기에 탄 여섯 명중 누가 병을 떨어뜨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모두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여 아무리 경찰이 지키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복수하기 때문에 '집요한'이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읽다보면 복수의 대상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이나 그 대상을 살해하기 위하여 오래도록 철저하게 공을 들이는 것 때문에 제목 그대로 사신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정말로 코넬 울리치는 느와르판 '제7의 봉인'을 만들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상복의 랑데뷰'는 처절한 복수의 드라마인데 '10만 분의 1의 우연'은 '호그 연속 살인'과 이 '상복의 랑데뷰'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호그 연속 살인'처럼 우연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미스터리에다 '상복의 랑데뷰'처럼 뜻밗의 사고로 잃어버린 연인의 처절한 복수가 결합되어 있다. 세이초가 실제로 이 두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설정과 이야기의 얼개가 비슷하기 때문에(물론 호그 연속 살인은 '10만 분의 1의 우연'과 정반대의 진실로 치닫지만) 과연 순전히 세이초만의 독립적인 창조의 산물인지에 대한 의심은 좀 거두기가 어렵다.


  후기의 미야베 미유키에 따르면 이 작품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이처럼 이야기의 독창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실은 이 작품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약점이 있다. 바로 세이초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페이소스'가 여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점과 선'이든 '제로의 초점'이든 세이초의 전기 작품들은 비록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지만 애오라지 그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 보다는 해결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그 인간적 노력이나 밝혀지는 관련 인물들의 과거를 통해 삶의 어떤 어둠을 조명하는 것도 같이 녹여내려 주력했다. 하지만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상복의 랑데뷰'처럼 복수의 드라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복수자의 아픔은 몇 줄의 문장 정도로 간략하게 제시될 뿐이고 그가 어떤 심정으로 복수에 임하는 지 같은 건 잘 보여주지 않는다. 드러내는 것은 트릭의 풀이나 복수의 과정이 전부이다. 그래서 독자는 복수자에게 잘 공감하기가 어렵고 전혀 등장인물의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평면적이 되어 버린다. 소설과 신문 기사와 같은 저널이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눈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생생함은 성격이나 갈등, 분위기가 현실감 넘치는 묘사로 이루어질 때 느껴진다. 하지만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선 모든 게 밋밋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미리 깔아놓은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러니 트릭이 아무리 절묘하다한들 이야기가 심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 상당한 분량의 신문 기사 인용으로 시작한다. 후기의 세이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많이 경도되었는데(그건 후기에 주력했던 역사 소설 집필과도 관련 있는 것 같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그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자신, 너무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물든 나머지 문학조차 저널리즘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앞서도 소설과 저널을 비교했지만 사실 이 소설의 인물 묘사나 사건 진행이 소설 보다는 저널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일례로 사고에서 죽은 한 여인의 언니가 경찰서로 직접 찾아와 동생이 죽은 곳에 가서 참배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언니는 자신이 뒤늦게 비보를 들은 이유를 경찰에게 말해주는데 개인적으론 좀 많이 의아했다. 언니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작년 9월 하순부터 업무차 스위스 로잔에 있었습니다. 동생의 소식은 아버지가 국제전화로 알려주셨습니다. 업무라고 한 일은 영어 통역이에요. 평소에는 통역 일을 하지 않지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 기업 임원 가운데 한 분이 국제 경제 회의에 참석하시면서, 꼭 부탁한다고 해서 동행했죠. 때문에 동생 소식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P.34)


 하하, 원 이렇게나 시시콜콜하게 말하다니. 과연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스위스에 있어서 늦게 알았다고만 말하면 그 뿐 아닌가? 아마도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이유를 읊듯이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오고가는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차례로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죽 나열하듯이 이유를 단번에 말하는 건 주로 저널에서다. 그래서 세이초가 너무 저널적으로 소설을(어쩌면 저널 스타일에 너무 물들어버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쓴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계가 좀 보이는 작품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띄는 걸 두고 어찌할 수는 없다. 어쩌면 미야베 미유키도 그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소설이 가진 가치에 집중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왜 현대에도 이 소설이 계속 읽혀져야 하는지 그 의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실은 그것도 소설에서 주된 이야기는 아니다. 미유키가 천착하는 의의는 어디까지나 소설 속 가해자의 동기에만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복수자는 어떠한가? 그는 훨씬 더 많은 비중으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곁다리의 캐릭터일 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평면적인 캐릭터라고 하지만 세이초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해결을 위해서만 가져다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복수자의 것까지 고려해야 우리는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선으로 나타내면 수평과 수직이다.

 사고는 고속도로에서 일어난다. 수평의 흐름이다. 소설에서 가해자와 복수자를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욕망이다. 가해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복수자는 연인을 죽게 만든 이들을 응징하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그들의 눈에 오로지 한 곳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욕망 역시 수평의 흐름인 것이다. 소설의 주된 소재가 되는 카메라 역시 그렇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포착하는 것 역시도 수평의 흐름이다. 그렇게 이 소설엔 수평의 흐름이 지배한다.


 왜 이 소설은 이토록 수평의 제국일까?

 그건 이 소설이 나온 시대와 연관이 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일본은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이 경제적 풍요의 시대였다. 고민도 없이, 혼돈도 없이 일본은 그저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풍요의 열매를 섭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해외여행이 활발해졌고 일본인들은 세계 각지로 뻗어가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맹렬하게 달려나가는 스포츠카처럼 거센 수평적 확장의 시대였다. 풍유로움에 도취된 그들에게는 오로지 더한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보일 뿐 과연 이대로 옳은 것일까 하고 되돌아보는 눈은 없었다. 그들의 시야는, 움직임은 오로지 한 곳으로만 뻗어갔다. 이 소설의 가해자와 복수자처럼.


 그런 그들에게 세이초는 수직을 가져다 준다. 그건 추락의 선이다.

 오로지 하나의 욕망만 보고 달리던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추락을 경험한다. 가해자도 복수자도. 세이초는 오로지 단일한 수직적 추락의 운명만 허용한다. 사실은 이 수직이야말로 세이초의 주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두가 풍요에 취해 그들의 현상황을 모를 때 홀로 광야에서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선지자와 같다. 그는 경고한다. 일본이 오로지 욕망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뻗어나가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분명 파멸적 추락이 도래할 것이라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추락은 바로 그것을 위한 예언의 문장들이다.


 그는 왜 이런 경고를 하는가?

 그 이유는 앞부분의 인용된 기사들에서 나타난다. 보도사진 수상작들이 발표되고 대상을 받은 작품과 관련된 사고 기사가 나오며 대상 작품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모두 소개되는 그 곳에는 딱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사고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이다.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셔터 누르는 것에만 신경썼다고 비판하는 이들조차 그런 사진에게 대상 준것만을 나무랄 뿐 사고에서 죽은 이들에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무관심은 뒤늦게 언니가 경찰서로 찾아와 직접 그 현장으로 갈 때 담당 경찰관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사고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떠올리기는 커녕 언니와 같이 온 남자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그녀의 남편인지 아니면 연인인지. 머리에 떠올리는 건 그 뿐이다.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당한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실제 현장에서 통곡하는 남자를 볼 때조차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생각할 뿐이다. 희생당한 이들은 깨끗이 잊혀졌다. 분명 여섯 명의 무고한 죽음이 있었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마치 그 죽음이 아예 없었던 것인양 치부해 버린다. 세이초가 현재의 일본에게 파멸적 추락이라는 수직적 운명이 도래할 것이라 예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욕망의 한없는 충족이라는 수평적 정복에 골몰하느라 그 바람에 속절없이 희생된 이들을, 혹은 희생 가능한 이들을 돌아다 보거나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죽음을 돌이켜 봄의 소중함, 무한히 뻗는 욕망의 선 때문에 밀려나거나 버려질지도 모를 희생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의 소중함을 말하기 위해 세이초는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쓴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이 소설이 '소름이 돋을만큼 현대적'이라면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의 현대란 늘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하여 보다 약한 자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아예 없는 듯 무시해 버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약한 자들은 오로지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표적이 되고 밖으로, 저 어둠 속으로 밀려난다. 하나가 밀려나면 또 다음이 표적이 된다. 우리의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오로지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경마장의 말처럼 바라보는 한, 소설 속 사고의 희생자들처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늘어만 갈 것이다. 세이초는 그 하나, 하나의 죽음과 삶을 소중히 하라고 말한다. 복수자의 서러운 울음과 한 죽음의 책임을 묻기 위한 집요한 응징은 바로 그 때문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또한 그 어떤 삶과 죽음이든 소홀히 할 경우 반드시 심판이 떨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것은 직접 실행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방관한 이들까지 다 포함된다. 누구였더라? 시대가 행동을 요구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한 자들을 위하여 지옥은 가장 뜨거운 형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던 이는. 세이초도 그와 같다.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대사대로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록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품은 뜻만큼은 어느 소설보다도 더 뜨거운 소설. 그것이 바로 '10만 분의 1의 우연'이 아닐까 한다. 약하다는 이유로 쉽게 버려지고 무시되고 핍박이 가해지는 요즘같은 때엔 더욱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소름 돋게 다가올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부디 파멸적 추락의 수직적 운명이 피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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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고, 삶의 선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소재인데
무엇인가 약한가 보네요. 아쉽네요...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과 새해 되셔요.

ICE-9 2013-12-29 04:5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세이초가 그런 주제를 잘 살리려 했다면 범인이나 복수자의 내면을 좀 많이 묘사해주었어야 할 것 같아요. 지나치게 복수의 과정만 핵심 트릭을 숨긴 채 집중하다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갈등 부분이 다 휘발된 게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 아닐까 싶어져요. 작품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제가 좋아하는 세이초 특유의 인간 묘사가 나오지 않으니 다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마녀고양이님도 이제 정말로 얼마남지 않은 연말 깔끔하게 마무리 잘 하시고
올해 보다 더 복된 새해 맞으시길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