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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밀수꾼들' 을 쓴 발따사르 뽀르셀 은 스페인 작가로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이미 16편의 장편소설을 쓴 그에게 이 '밀수꾼들'은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사실은 1968년에 세상으로 나왔다. 책 뒷 표지에 실린 소개글을 빌려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 보자면, '한 무리의 밀수꾼 사내들이 '보따폭호'라는 배에 밀수품을 가득 싣고' 지중해를 건너가는 이야기다. 그 일련의 여정을 담은 것으로 이야기 자체는 좀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엔 흔히 있으리라 기대되는 주인공 같은 것이 없다. 배에 있는 모두가 다 이 소설에서 아예 비중까지도 동등한 주연들이다. 이러한 일종의 주인공의 '민주화(?)' 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당신이 이 소설이 가진 이야기적 단순함에 좀 실망했다면 이 소설이 가지는 구성상의 특이성은 당신의 흥미를 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소설 자체는 항해 이야기의 원본격이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배가 다다른 하나의 공간들로 이야기가 분할되어 있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를 얼른 상상하기 어렵다면 어릴 때 본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연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소설은 그 '은하철도 999'와 정확히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은하철도 999'와 닮은 꼴은 그것 뿐이다. 거기엔 철이와 메텔이라는 뚜렷하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지만 '밀수꾼들'에게는 그런 주인공들이 없기 때문이다. 여정이 다다른 곳마다 분할되는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 역시도 돌림노래를 하듯 돌아가면서 맡는다. 하나의 주인공이 오로지 하나의 장소에만 군림하는 것이다. 발따사르 뽀르셀은 그런 구성을 취하면서 그 배에 올라탄 모두가 어떻게 밀수꾼이 되어 '보따폭호'에 올라타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러준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장소로 분할된 이야기들은 그 분할된 이야기 토막마저 현재와 과거로 분할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마치 '인수분해' 와도 같은 소설이다. 절대 나눠지지 않는 소수 같은 것을 찾아 끊임없이 나누고 나누는 소설. 그것이 바로 '밀수꾼들'이다.

 

  앞서 오디세우스를 슬쩍 인용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그걸 살짝 비튼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오디세우스도 지브롤터 해협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누비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건 이 소설의 여정과 그대로 닮아있다. 더구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늘 바다의 어떤 지점이나 하나의 섬을 중심에 놓고 진행되는데 '밀수꾼들'은 그 역시도 닮아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오디세우스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오디세우스가 이 소설에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부하의 의견 따위는 가볍게 묵살한 채, 자기 계획만 관철시키는 여지없이 몰인정하고 독선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그 원본이 되는 오디세우스에게 늘 따라다니는 비난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랄까, 이 소설을 '영웅없는 오디세우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여정의 중심이 되는 배를 밀수꾼들의 배로 설정한 것도 오디세우스를 슬쩍 비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발따싸르 뽀르셀이 왜 이렇게 구성을 취했는가도 이해는 간다.

 

  오디세우스는 지금 우리들에게 소설의 원형과 같은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설의 아르케. 그것이 오디세우스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모습은 모두 그로부터 발원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하나의 주인공이 세계를 쑥 빨아 삼키는 것과 같은 구성도 알고보면 오디세우스로 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뽀르셀은 어쩌면 지금 헤게모니를 거머 쥔 그러한 이야기적 구성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뭐, 근거는 빈약한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이 소설이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외양을 취하면서도 어떤 식의 뚜렷한 변별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왠지 그 상상이 그렇게 근거가 빈약한 것만은 아님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상상은 더욱 신빙성을 띄게 된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이념적 헤게모니를 차지해 가고 있던 사회주의와 그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보수주의가 정면으로 맞붙은 첫 이념의 대결이었다. 물론 나쁜 것은 보수주의였다. 당시 민중들이 지배층만의 이익 추구와 수구에 진절머리가 나서 합법적 선거로써 '사회주의' 정권에다 주권을 양위해 주었는데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지배층들이 프랑코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발발하게 된 것이 스페인 내전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이 지루하다고 생각된다면 동시대를 다룬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있다.)

 

  내전의 악인은 너무나 분명했고 민간인들의 학살마저 잇달아 일어났으나 바깥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헤밍웨이 같은 지식인들을 비롯한 민간인 개개인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시 공격받고 있던 '인민전선'을 위해 나서게 되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된 이념 안에서 범 민중들의 연대가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의 구성은 그같은 역사적 경험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 '밀수꾼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따라가보면 거기엔 반드시 '스페인 내전'이 있음을 보게 된다. 모두가 각자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참여했고 결국 그게 시발점에 되어 지금의 배에 이르게 되었음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소설과 스페인 내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된다. 이 소설이 나왔던 68년은 여전히 프랑코 정권이 득세를 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유럽은 '68혁명'이라는 새로운 자유의 물결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었지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마지막 파시스트 정권이라는 세간의 평가답게 그 물결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밀수꾼들'은 사실 그와 같은 스페인의 상황을 은유한 소설이다.

  왜 소설이 굳이 '밀수꾼의 배'를 가져왔는가? 그 때의 스페인이 밀수하는 자들의 마음과 똑같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내내 경찰의 수색과 추적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을 나타낸다. 점점 넓어지는 경찰 수색을 피해 아예 '죽은자들의 섬'으로 달아나 숨기도 한다. 뽀르셀은 그 시기 스페인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에 올라탄 모든 등장인물들은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극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마음의 현재와 과거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 '밀수꾼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은 내게 하나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바로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이란 그림이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 제리코는 뗏목에 올라탄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구조를 위한 수건을 흔들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실의에 빠져 낙담만 하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보내는 자가 있는 반면 더없이 무덤덤한 자들도 있다. 그렇게 상황은 하나지만 그 반응은 이토록 다양하며 또한 개별적이다. '밀수꾼들'이 취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이와 같다. 그런데 좀 더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더욱 닮은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소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혹시 뽀르셀이 정말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쓴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1816년,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보트에 메달린 뗏목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해서 모두 400명의 승선 인원 중 146명이 살아남았다. 그 뗏목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끌고 있던 보트에는 메두사호의 선장이 타고 있었는데 뗏목이 보트가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자 선장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뗏목은 오래도록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엔 살기 위해 인육을 먹게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형법을 공부하다보면 '긴급피난'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그 중요한 사례로서 지금도 형법학 교과서에 꼭 인용되는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선장 말인데, 여기 '밀수꾼들'에서도 똑같은 선장이 나온다. 동료 하나가 다쳐서 얼른 육지로 보내 치료를 해야 할 형편이지만 그 선장은 어디까지나 밀수를 성공시켜 자신의 이익을 취할 생각에 그렇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메두사호의 선장과 똑같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이 있어 제리코의 그림이 이 소설에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 선원들의 반응 역시 제각각이다. 어떤 이들은 선장이 말이 옳다면서 따르지만 또 어떤 이들은 선장의 행위가 몰인정하다면서 반박한다. 거기에 가장 많이 반박하는 이가 2등 기관사 쁘루덴시이다. 그는 배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에 대한 선장의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항해 도중 그의 고향 섬에 다다르게 되니 거기서 육지로 보내주자고 요구한다. 이 소설이 당시의 스페인을 담아내고 있으므로 그 환자란 아무래도 당시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박해와 탄압을 받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선장과 쁘루덴시는 그 사람들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무시해 버리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익 따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그렇게 이 소설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만큼이나 인간 군상에 대한 파노라마이다.

 그런 식으로 그 아픔 앞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나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소설이다.

 

 더하여 오디세우스와 연결해 보면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이 그저 순수하지만은 않고 어떤 특정의 정치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뽀르셀이 이 소설에서 오디세우스 이래로 이어져 온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을 탈피하는 것은 그 소설적 장치들이 세계가 하나를 중심으로 위계적으로 재편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프랑코 독재 정권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므로 의도적으로 그것을 허물고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도록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소설적 저항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러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사유의 지점들을 던져주므로 좋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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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저께 예스24의 퀴즈를 풀다가, 어떤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지문에 인육을 먹는다가 답이었는데, 제가 틀려서, 이게 무슨 책이고 무슨 문제지 했었는데, (책을 읽느라고 읽는데 맞힌 수준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ㅋㅋ) 어쩌면 리뷰에 쓰신 저 배의 일이었는지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배 얘기도 있고, 파이 이야기에도 있도, 뭐 여럿 있긴 하지만요. 이 책은 정말..평이 여럿이네요. 헤르메스님은 별 다섯인데.. 스페인 내전이나 스페인 역사를 알고있다면 좀 더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오락가락해요!

ICE-9 2013-04-27 23:22   좋아요 0 | URL
앗 아이리시스님 언제 또 이렇게 다녀가셨나요? 얼른 환영의 인사를 해드려야 하는데 늘 이렇게 늦네요^ ^; 큭큭, 저도 그거 풀어봤어요. 예선 점수가 정말 잘 나와서 어, 이러다 천만원 상금도 턱하니 타는 거 아냐 했는데... 본선 문제는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서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못 풀겠던데요^ ^;
전 솔직히 별점이 후한 편입니다. 후해도 너무 후한 편이에요. 처음 알라딘 서재할 때는 이렇게 많이 노출될지 몰라서 그냥 무조건 다섯개주고 했는데 그게 지금은 타성이 된 탓인지 조금만 만족해도 그냥 다 줘 버리곤 합니다. 그러니 제 별은 너무 믿지 마세요. 앞으로는 별을 줄 때 좀 신중해져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보단 다른 분들을 믿으세요.^ ^

희선 2013-04-27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서는 한두 사람이 돋보이지만,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않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안에서 빛나보이고 싶어하지만...
그런데 책을 볼 때는 한두 사람만 따라다니며 보는 게 편하기도 해요^^

스페인 내전을 알고 있다면 소설을 좀더 잘 볼 수도 있겠군요
거기에 헤르메스 님은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그림도 알고 계시는군요


희선

ICE-9 2013-04-27 23:25   좋아요 0 | URL
제 말이 그말이에요. 우리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위계 질서를 만들곤 하는 건 어쩌면 소설적 경험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중세만 해도 귀족과 평민 그리고 성직자의 구분이 있을지언정 평민간에는 그렇게 쉽사리 위계를 나누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어쩌다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서로 높고 나눔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것도 이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거기에 어떤 근대의 동학이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 망상도 해 봅니다^ ^
줄리언 반스의 소설 중에 10과 1/2장으로 된 세게사란 소설이 있는데 거기에 이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그 때 제대로 알게 되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