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동안 세 종류의 나무들을 모두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혼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빨갛고 조그만 열매가 열리는 보리수,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나그네에 나오는 보리수,

그리고 부처님이 그 나무 아래에서 해탈하였다는 보리수,

어떤 때는 보리차를 끓이는 그 보리까지 이 보리로 혼동할 때가 있을 만큼...

백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도 타성에 젖어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낀 예가 없었다.

 

먼저 슈베르트의 가곡에 나오는 나무는 원어로 Lindenbaum이고 해석이 보리수로 되어있지만 오역으로 보인다.

Lindenbaum은 피나무류이지만, 보리수나무가 됐을때는 밑에서 단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Lindenbaum정도 되어야 그래도, 가지마다 많은 추억이 걸려 있는 우물가 나무 곁을 지나 마을을 떠나는 한 실연한 젊은이의 심정이 될 수 있다.

샘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스쳐가는 나뭇잎들의 수런거림 등이 묘사된 이 노래를 수없이 부르고 들었지만,

결국 절실하게 부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해탈하였다는 나무는 보리수가 아니라, 인도 보리수라고도 불리우는 '반얀나무'이다.

멀리서보면 수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룬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숲은 단 한 그루의 반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반얀나무 가지들은 위로 올라가다 구부러지는데, 그 구부러진 가지가 땅에 닿으면 다시 뿌리가 되어 번져 나간다고 한다.

단 한그루로 숲을 이루는 나무.

그런 나무 밑에서 부처님은 해탈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곽재구의 이 시집 '와온바다'를 만났다. 

 

 

 

 

 와온 바다
 곽재구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2년 4월

 

 

 

 

와온바다가 먼저였는지, 선암사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님, 그 둘다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 둘 모두 였을 수도 있다.

 

나무

 

인간인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모르는 이들은

만행 중인 바람이

나무의 심연을 헤적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무는 제 앞에 선 인간에게

더덕꽃 향기 짙은 제 몸의 음악을

고요히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춤을 출때

잎사귀 하나하나

다른 춤의 스텝을 밟는다

인간인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다가 홀연 당신 또한

온몸에 푸른 실핏줄이 퍼져나간 은빛 이파리가 된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

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

눈보라가 되거나

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먹기와집 마당을 뒤덮는 채송화 꽃밭이 된다

 

 

이 시를 읽다가 선암사 와송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주체할 수 없어 어쩌지 못할 무렵,

시인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간 듯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이란 시를 '짜잔~'들고 나타난다.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예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 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난 '와송'하면 꼬리를 물고 생각나는 나무가 있는데, 그게 이 페이퍼를 시작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은 '반얀나무'이다.

 

나는 일찍이 사람이 나무뿌리 같은 걸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무뿌리 또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한심한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 밤 나는 사람이 나무를

사람이 밤 열차의 쓸쓸한 뿌리를

사람이 먼 밤하늘의 별과 별들의 노래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노인의 빛나는 뿌리를

누운 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반얀나무' 중 일부


참, 이상하게도 난 시인이 '와온바다'를 노래하는 그 순간에도 선암사와 그 곳을 버티고 섰을 (이름을 아는 와송과 이름을 모르는 그 밖의...) 나무들이 생각났다.

 

근데 또 참 이상하게도 시인은 어떤 이유에선지, '반얀나무'를 '벵골보리수'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러가며 시를 쓴다.

ㆍㆍㆍㆍㆍㆍ

나무의 긴 팔 하나가 나를 붙든다

나무 이파리들이 한숨처럼 가벼이 흔들린다

작은 벌레들이 나무 이파리의 가장자리를 고요히 갉고 있다

우리는 떠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한몸으로 바람 앞에 뒹구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인연의 눈이 있다

ㆍㆍㆍㆍㆍㆍ

서로 연결된 끈은 지니지 못해도

시체를 하루 세 끼 먹을 열정은 지니지 못해도

너는 가난한 내 시를 기억하고

너는 나와 함께 떠나지 못하는

세상의 어느 곳이든 함께 있는 마음 안에 머물 것이다

                    '구근이 가게 앞 벵골보리수에게' 중 일부

 

시인에게 나무는 엄마 대신의 위안일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는 시도 있다.

ㆍㆍㆍㆍㆍㆍ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시간이 부러웠다

 ㆍㆍㆍㆍㆍㆍ

                                         '무화과' 중 일부

이렇듯 바다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나무는 바람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바다와 나무와 바람을 하나인듯 넘나든다는 거다.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바로 전에 읽은 안도현의 시집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곽재구 시인의 그것은, 사평역에서 때도 치열하다기 보다는 따뜻했지만...

요번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따뜻하다고 해서 치열한 것보다 덜 묵혀둔 것도 아니고 덜 우러나온 것도 아니라는 걸 이 시집은 보여준다.

오히려 삶의 구비구비에서 만날 수 있는 체험과 연결되어 시쓰기의 밑거름이 되는 동시에

체험이 없는 자기복제야 말로 경계하여야 할 것임을 오랫만의 시집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이 안도현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너무 잘 쓰려 욕심부리지 않아서라고 해야 하려나?

 

밀어

 

달천에서 상봉 오는 길에 돌개바람이 불었다

주꾸미구이집 플라스틱 의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나무들에서 푸른색 열매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무와 바람은 억센 포옹을 하는 듯도 보인다

저런 식의 밀어도 우두커니 사랑스럽다

어린 열매를 다 떨군 뒤에도 바람은 나무 곁에 머물며 해와 달의 비늘을 반짝일 것이다

 

참 소박하고 작지만, 그래서 예쁜 시도 있었다.

 

여뀌꽃밭에 사는 바람은

 

키가 작고

얼굴도 작고

손도 작아서

 

내가 그이의

작은 손을

가벼이 잡을라치면

 

마른 풀밭 위

무릎을 접어야 하는데

 

그때쯤엔

그이 또한 환히 웃으며

내 눈썹 위

어린 초승달 하나를 띄우기도 하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시는 '칠카하르'라는 시였다.

'칠카하르'는 네팔과 가까운 인도의 국경도시란다.

 

칠카하르

 

 당신이 나를 이곳에 오라 불렀나요? 칠카하르, 어두운 불

빛들이 이제 막 도착한 새벽 열차를 향해 뽀얀 입김을 불어

넣어주고 송장처럼 나란히 누운 산 사람들의 막막한 꿈을

바라보고 있네 길, 시간, 운명, 세월......사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삶의 눈망울들은 파란 밤하늘 곳곳에 땀띠처

럼 솟구치고 어디선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적을 끌며

오네 너무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고 그보다 많은 것

을 당신에게 받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지요 천천히 새벽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어둠속에 송장처럼 누워 바람이 기

차의 레일을 쓰다듬는 소리를 듣습니다 칠카하르, 당신에

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삶

이라면 난 차라리 당신에게 어둠이 레일 위에 튀기는 고요

한 불꽃들을 보여드리지요

이 시를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신들의 봉우리>라는 소설이 생각났고,

그 소설의 주인공 산 같았던 사나이 '하부'가 남겼던 마지막 말도 생각났다.

 

그렇다.

이미 온 힘을 다하고 있을때는 힘내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다.

말이 필요없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없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레일 위를 튀기는 고요한 (하지만 미욱한) 불꽃들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 위로가 되는 건 말이 아니라, 소박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 말이 필요없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이 한마디의 위력은 믿는다.

"꿈꾸어 봐~"

내가 '꿈꾸어봐'라고 했더니, 어떤 이는 '상상해'라며 '하부'의 원전을 들이대는데 말이다.

상상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막막한 순간에도 꿈꾸는 건 가능하다는 이 시'칠카하르'를 읊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꿈길 밖에 길이 없다는 황진이의 '상사몽' 버젼이기도 하고 말이다.

 

암튼, 인도 기행 후 쓰여진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일초들>이 생각나게 하는 시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도 좋았다.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86,400초란다.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

 

미스티 가게 앞

자전거를 멈춘 연인들은

 

세월이 잠시 그들 곁에

멈춘 것을 알지 못하지

 

페달 위에 올려진

푸른 밤의 발 하나

 

죽은 시인의 언어들이

페달 위에서 가벼운 탄식을 올리는 동안

 

남은 한 발이

지상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입맞춤하네

 

한초

한초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은 흘러가지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보낸

한초 한초를 싣고

 

우리는 또

반딧불이 날아오르는 산티니케탄 대로를 달려가지

 

때문에 당신이 내게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고,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시간이란 걸...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프레이야 2012-06-18 20:08   댓글달기 | URL
웅산도 음반이 여러개군요. 딱 하나 같은 거 보여요.ㅎㅎ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좋아 두고두고 읽었던 옛날옛적(ㅋㅋ)을 떠올립니다.
님이 가장 좋다시는 시도 좋으네요. 그의 산문집, 패스했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져요.
읽을 건 많고 눈도 아프고 힘은 딸리고,,, ㅋ 조용한 저녁에요, 양철나무꾼님^^

책읽는나무 2012-06-18 20:23   댓글달기 | URL
비가 내려 멈춘 조용한 저녁에 참 잘 어울리는 페이퍼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시들도 좋지만,마지막 문구들이 순간 가슴 설레었어요.^^
웅산 음반 맨 첫 번째 것만 가지고 있는데 음반을 참 많이 냈네요?
노래 참 잘 부르는 가수에요.
편안하게 시도 읽고,노래도 듣고 가네요.
님도 편안한 밤 되세요.^^

글샘 2012-06-18 22:44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고 그보다 많은 것
을 당신에게 받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지요(칠카하르)

페이퍼를 읽다 보니 내일 결근하고 확 선암사로 가고 싶은 생각이 몰려 옵니다...... ㅠㅜ

새벽숲길 2012-06-18 23:41   댓글달기 | URL
때문에 당신이 내게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고,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시간이란 걸...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할 뿐이다.



저는 바다로 갈까봐요.. 확~~

하늘바람 2012-06-19 10:10   댓글달기 | URL
아웅 마음을 흔드는 페이퍼네요 어떻게해요 책임지셔요^^

차트랑 2012-06-19 19:56   댓글달기 | URL
시를 잘 읽지 않는 제게(이건 좀 별로인걸요)
시를 접할 기회를 이곳에서 접하게 됩니다.

저도 시를 읽지 않으면서
시를 읽지 않는 사회를 뭐라하곤 하지요..
시와 함께하는 삶은
결코 때묻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입니다...


2012-06-20 23:37   댓글달기 | URL
푸른 밤의 발이 얹힌 한 페달과 다른 페달의 대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인이 탄식하는 일 초와 연인이 사랑하는 일 초가 번갈아 한 땀 한 땀 세월을 수놓고 있는 것.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따뜻한 일 초 일 초들.. 이 일 초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렇게 헤매고 살지는 않겠지요.

오랜만에 왔어요. 양철님. 여전히 잘 계시는 듯 합니다. 페이퍼를 읽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