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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23.
한국어판 서문에 적힌 바에 의하면 이 책이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철학책이 이러한 호응을 얻는 것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는데, 독일이니 가능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또, ‘피로사회의 저자는 거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라는 말과 ‘이제 독일에서 피로사회라는 단어는 상용어가 되다시피 했다’라는 말 또한 적혀 있는데 이 책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 경우에는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라고 생각했다가 책을 덮고 나서는 납득될만한 자신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피로사회의 내용이 너무나 짧기 때문인지 뒤쪽에 ‘우울사회’라는, 피로사회와 (너무 심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강연 원고를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는 점이다. 피로사회에서 좀 더 발전된 이야기를 하려나 하고 기대했는데 그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저자가 바쁜 것인지 순도 100의 책을 낼 욕심이 없는 것인지 중복되는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럴 거라면 아주 얇고 꽤 비싼(10,000원)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고 가격을 낮췄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게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가장 큰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p.1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p.23.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p.24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현재의 사회를 성과사회로 정의하고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문제점이다> 라는 저자의 시각은 그리 새로운 시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성인의 생각 회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자신도 성과사회의 소속원으로서 그 ‘할 수 있음’을 내재적인 동기유발로 삼아 노력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학적으로 내재적 동기유발은 외재적 동기유발에 비해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성과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의지’나 그 후에 오는 ‘만족감’에 물질보다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꽤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자라온 사람이라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인 동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는 점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배워온 환경이 내재적 동기에 대해 이미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는 충격,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충격이었다. 저자는 ‘긍정의 부정성’이라는, 모두가 겪으면서도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p.27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29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95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기 착취가 일어나게 만드는 동인은 다름 아닌 자유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자유롭게 착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취는 착취가 아닌 것이 된다. 타인이 나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마모되어 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이 성과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없는 구조적 어려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가능한가? 생각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떨까?
p.47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p.50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p.53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힘들어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나는 내 이상과 반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요즘은 정말이지 ‘No man’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에너지와 용기가 가득한 상태인데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여 본다.
마지막으로는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피로사회의 내용에서 한트케는 말 못하고, 보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말한다. 전자는 분열적 피로이고 후자는 근본적 피로이다. 근본적 피로는 분열적 피로와 달리 평화의 시간을 부여한다. 아래에 적어둔 p.71의 글은 피로감이 주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p.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 “(…)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p.71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것이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해졌다.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베를린 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하는데 꽤 특이한 이력이다. 다른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