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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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 권의 책이 다자이 오사무의 긴 유서 같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 글에는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부분이 많이 드러나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슬퍼졌던 것 같다.

(p.23) 만약 어머니가 심술궂고 쩨쩨하고 우리를 야단치고 또 몰래 자기 돈만 불릴 궁리만 하는 분이라면,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이렇듯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을 텐데.

무릇 슬픔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름답고 고귀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으로 인해 그것을 지키고 싶으나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슬퍼지는 것이 아닐까. 가즈코는 어머니의 혹은 자신의 품의를, 동생의 삶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그런 간절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p.29) 아아, 무엇이건 숨김없이 솔직하게 쓰고 싶다. 이 산장의 평온은 죄다 거짓이고 허울에 불과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있다.
(p.33) 맨발에다 잠옷 바람으로 흐트러진 내 모습이 돌연 창피해지고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구나 싶었다.
(p.50) 마음껏 속 시원히 울고 싶어져 2층 방으로 뛰어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기운이 쑥 빠지도록 실컷 우는 사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차츰 어떤 이가 사무치게 그리워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견디기 힘들었다.

가즈코, 그녀라고 힘들지 않을 리 없다. 그녀는 농가에서의 삶이 생소하고 그렇기에 미숙하다. 귀족이었던 그녀의 삶은 불을 내고 잠옷 바람으로 흐트러진 삶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가 현재의 불행을 딛고 일어나도록 이끄는 동인은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여지는데 어쩌면 그것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자연스레 피어오른 감정이라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삶에 원기를 부여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부분에서 꽤 오래 고민을 해봐도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이끌어진 것일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과 합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상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목적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옹호할 수 있을까.

(p.95)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보고 싶습니다.
(p.96)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 분위기에 나의 내음이 털끝만큼도 스며들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부끄럽다기보다도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마치 기묘한 생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성이 약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자이 오사무는 뛰어난 작가이자 철학가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문장들을 줄줄이 뽑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96쪽의 글을 보며 가즈코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내 스스로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 분위기에 나의 향기를 스며들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하더라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라는 기억에 다시금 쓸쓸해졌다.

(p.107) 아무리 도덕을 거스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떠올리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의 혁명가로서의 사상과 사랑을 위한 파괴 사상이 다자이 오사무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가즈코는 도덕을 파괴하는 혁명(이것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의문이지만.)을 일으키고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도덕의 문제는 제외하고라도 왜 우리는 도덕의 문제조차 없는 애정의 일에 매달리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p.112) “어째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 우리한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 하면서 주먹으로 마구 눈을 비벼댔다.
(p.118) 나는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이런 게 행복감이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거다.
(p.136)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아슬아슬 숨이 넘어가는 대사업인가!
(p.143)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다자이 오사무가 바라보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얼마나 ‘슬픈’ 것이었는지를 생각하자면 가슴이 아릿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마저도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슬픔이란 무릇 자기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 자기만의 가슴에 자기만의 크기를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을 덮고 도취적인 생각이나 비관적인 생각으로 빠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정작 마음에 담아두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구절은 아래의 구절이다.

(p.156) 올바른 애정을 품은 사람이 마냥 그리워 부인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그 화가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애정을 품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애정을 주고 싶다는 마음.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 구절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아니 ‘올바른 애정’이라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올바르고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아름다운 과정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내 삶에서의 혁명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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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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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16년 12월에 읽었던 책을 2년 반만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정이현은 내가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녀에게는 우리가 은연중에 느끼고 언어로는 내뱉지 못하는 감정들을 세세하게 잡아내 문장으로 쏟아내는 재능이 있다. 몇몇의 작가들도 그런 문장들을 한 두어번 짚어내는 경우가 있으나 그 정도는 운이 좋아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종종 든다. 정이현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의심하는 순간 그런 문장 몇 개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마구마구 쏟아내는 것이다.

나는 사실 국내 단편소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그 이유는 삶과 인생에 대해 논하는 소설들을 읽다가 불평하는 상사와 한심한 남편과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이들에 대한, 그런 시답지 않은 것들에 대해 불평하는 소설을 읽노라면 삶은 참 구질구질한 것이다, 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빠져버리는 탓이다. 물론 그런 구질구질한 것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루어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태여 하루하루의 그 자잘한 일들과 감정에 대해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고나 할까. (이런 걸 보면 정말 삶이란 그런 구구절절하고 구질구질하고 일상적이며 편린적인 것들의 모음인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구질구질함 조차도 아름답게 만드는 작가들을 종종 본다.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개인의 일상조차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아름다운 작가들 말이다. 한동안 정이현 작가를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예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금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세상을 지켜봐야 그런 문장들을 그런 감정들을 이야기하게 될까? 그녀가 오래도록 글을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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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양장 한정판)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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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5.

철학에 대해 알고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실망할 수 있는 책이다. 철학에 대한 심도있는 이야기 또는 개념에 대한 논의가 있다기보다는 철학에 등장하는 몇 가지 개념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해 볼 것인가라는 실용적인 목표를 가진다. 철학의 이용 방법을 논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긴 하다. 더군다나 다양한 철학자와 그의 용어들이 간단하고 짧게 나오기 때문에 쉽게 읽히기는 한다. 소개하는 개념을 줄이고 좀 더 자세하게 논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설명하려는 개념이 아주 많은데 짧게 말하고 넘어가는 탓에 몰입이 자꾸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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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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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번역이 어색한 것인지 제인오스틴의 글이 애초에 잘 읽히지 않게 쓰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두어야겠다.
더군다나 초반에는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해서 500페이지에 가까운 책 치고는 너무 느껴지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생각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살펴본 제인오스틴의 글을 보면 그녀는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성향과 성격을 속속들이 살펴보고는 그것을 다양한 인물로 쪼개어 내는 것이다. 이 책의 메리앤과 엘리너는 각각 감성과 이성을 나타내는 인물인데 그렇게 쪼개어 놓고 보면 각각의 장단점이나 속성들이 확연히 드러나서 그것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를 수없이 묻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아무래도 나는 이성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는 애초부터 이성적이었다기보다 감성에 배반당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책에서는 메리앤이나 엘리너나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슬프게도 이것은 소설이라지...

p.28
난 모든 점에서 취향이 나하고 꼭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내 감정 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와야 돼요. 둘 다 같은 책, 같은 음악에 매혹되어야 하고.

취향이 일치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일이 있다. 어쩌면 현재도 어느 정도는 유효할 것이다. 나와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동을 받는 사람, 같은 구절을 읽고 같은 감상에 빠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취향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취향의 일치가 애정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몇몇은 경험했듯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머리는 사랑할 사람을 정해두고 그 사람과 취향이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는 비슷비슷해서 그 정도의 취향의 일치만으로 운명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문구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고 하면 이번 생은 글렀다고 해야 하려나…… (;;)

p.300
그는 자신이 누이동생들한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가책을 떨치지 못한 터라,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크게 베풀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브랜던 대령의 청혼이나 제닝스 부인의 유산은 자기의 방치를 보상할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던 것이다.

300쪽의 구절을 읽고 양심이 찔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어야할 입장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핑계로 다른 이에게 그 선의의 기회를 넘겼던 기억이 났다. 심지어 기억이 났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 언젠가 그랬던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아주 약간의 양심상의 기분만을 남겨둔 채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매력적이다. 오만과 편견만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아니지만, 주변의 비슷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살아있는 인물이야말로 소설가로서 제인오스틴이 지닌 장기인 듯 하다.

p.499
이 일에서 루시의 모든 행동과 그 행동을 멋지게 마무리 지은 번성은, 자기 이해관계를 열심히 끊임없이 챙기다 보면 아무리 그 과정에서 명백한 방해에 부딪힌다해도, 시간과 양심의 희생 말고는 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 손아귀에 들어오는 재산은 다 확보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가장 고무적인 사례로 내세워질 만하겠다.

제인오스틴은 해피엔딩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권선징악 같은 시답지 않은 결말로 우리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결국 시어머니인 페라스 부인의 애정을 얻게 되는 루시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다. 이해관계를 따지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그것이 가식이건 무엇이건 간에 보상을 받는 것을 자주 보고있지 않은가. 이런 부분을 보면 루시가 가지고 있는 밉상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인오스틴이 루시라는 인물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되려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적 상황에서 루시의 행동을 마냥 미워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렸을 때라면 얘는 나쁜 애, 얘는 좋은 애 하고 단순하게 편가르듯 읽었을 소설인데 이젠 맥락을 이해하고 배경을 이해하게 되어 읽는 즐거움이 더 커진 듯 하다. 요즘 독후감을 쓸 시간이 별로 없어서 생각이 나는대로 막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글을 남기는 데 의의를 두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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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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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국어판 서문에 적힌 바에 의하면 이 책이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철학책이 이러한 호응을 얻는 것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는데, 독일이니 가능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또, ‘피로사회의 저자는 거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라는 말과 ‘이제 독일에서 피로사회라는 단어는 상용어가 되다시피 했다’라는 말 또한 적혀 있는데 이 책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 경우에는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라고 생각했다가 책을 덮고 나서는 납득될만한 자신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피로사회의 내용이 너무나 짧기 때문인지 뒤쪽에 ‘우울사회’라는, 피로사회와 (너무 심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강연 원고를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는 점이다. 피로사회에서 좀 더 발전된 이야기를 하려나 하고 기대했는데 그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저자가 바쁜 것인지 순도 100의 책을 낼 욕심이 없는 것인지 중복되는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럴 거라면 아주 얇고 꽤 비싼(10,000원)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고 가격을 낮췄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게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가장 큰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p.1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p.23.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p.24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현재의 사회를 성과사회로 정의하고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문제점이다> 라는 저자의 시각은 그리 새로운 시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성인의 생각 회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자신도 성과사회의 소속원으로서 그 ‘할 수 있음’을 내재적인 동기유발로 삼아 노력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학적으로 내재적 동기유발은 외재적 동기유발에 비해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성과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의지’나 그 후에 오는 ‘만족감’에 물질보다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꽤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자라온 사람이라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인 동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는 점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배워온 환경이 내재적 동기에 대해 이미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는 충격,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충격이었다. 저자는 ‘긍정의 부정성’이라는, 모두가 겪으면서도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p.27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29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95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기 착취가 일어나게 만드는 동인은 다름 아닌 자유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자유롭게 착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취는 착취가 아닌 것이 된다. 타인이 나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마모되어 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이 성과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없는 구조적 어려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가능한가? 생각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떨까?

p.47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p.50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p.53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힘들어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나는 내 이상과 반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요즘은 정말이지 ‘No man’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에너지와 용기가 가득한 상태인데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여 본다.

마지막으로는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피로사회의 내용에서 한트케는 말 못하고, 보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말한다. 전자는 분열적 피로이고 후자는 근본적 피로이다. 근본적 피로는 분열적 피로와 달리 평화의 시간을 부여한다. 아래에 적어둔 p.71의 글은 피로감이 주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p.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 “(…)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p.71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것이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해졌다.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베를린 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하는데 꽤 특이한 이력이다. 다른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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