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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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번역이 어색한 것인지 제인오스틴의 글이 애초에 잘 읽히지 않게 쓰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두어야겠다.
더군다나 초반에는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해서 500페이지에 가까운 책 치고는 너무 느껴지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생각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살펴본 제인오스틴의 글을 보면 그녀는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성향과 성격을 속속들이 살펴보고는 그것을 다양한 인물로 쪼개어 내는 것이다. 이 책의 메리앤과 엘리너는 각각 감성과 이성을 나타내는 인물인데 그렇게 쪼개어 놓고 보면 각각의 장단점이나 속성들이 확연히 드러나서 그것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를 수없이 묻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아무래도 나는 이성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는 애초부터 이성적이었다기보다 감성에 배반당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책에서는 메리앤이나 엘리너나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슬프게도 이것은 소설이라지...

p.28
난 모든 점에서 취향이 나하고 꼭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내 감정 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와야 돼요. 둘 다 같은 책, 같은 음악에 매혹되어야 하고.

취향이 일치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일이 있다. 어쩌면 현재도 어느 정도는 유효할 것이다. 나와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동을 받는 사람, 같은 구절을 읽고 같은 감상에 빠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취향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취향의 일치가 애정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몇몇은 경험했듯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머리는 사랑할 사람을 정해두고 그 사람과 취향이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는 비슷비슷해서 그 정도의 취향의 일치만으로 운명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문구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고 하면 이번 생은 글렀다고 해야 하려나…… (;;)

p.300
그는 자신이 누이동생들한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가책을 떨치지 못한 터라,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크게 베풀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브랜던 대령의 청혼이나 제닝스 부인의 유산은 자기의 방치를 보상할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던 것이다.

300쪽의 구절을 읽고 양심이 찔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어야할 입장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핑계로 다른 이에게 그 선의의 기회를 넘겼던 기억이 났다. 심지어 기억이 났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 언젠가 그랬던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아주 약간의 양심상의 기분만을 남겨둔 채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매력적이다. 오만과 편견만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아니지만, 주변의 비슷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살아있는 인물이야말로 소설가로서 제인오스틴이 지닌 장기인 듯 하다.

p.499
이 일에서 루시의 모든 행동과 그 행동을 멋지게 마무리 지은 번성은, 자기 이해관계를 열심히 끊임없이 챙기다 보면 아무리 그 과정에서 명백한 방해에 부딪힌다해도, 시간과 양심의 희생 말고는 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 손아귀에 들어오는 재산은 다 확보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가장 고무적인 사례로 내세워질 만하겠다.

제인오스틴은 해피엔딩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권선징악 같은 시답지 않은 결말로 우리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결국 시어머니인 페라스 부인의 애정을 얻게 되는 루시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다. 이해관계를 따지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그것이 가식이건 무엇이건 간에 보상을 받는 것을 자주 보고있지 않은가. 이런 부분을 보면 루시가 가지고 있는 밉상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인오스틴이 루시라는 인물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되려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적 상황에서 루시의 행동을 마냥 미워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렸을 때라면 얘는 나쁜 애, 얘는 좋은 애 하고 단순하게 편가르듯 읽었을 소설인데 이젠 맥락을 이해하고 배경을 이해하게 되어 읽는 즐거움이 더 커진 듯 하다. 요즘 독후감을 쓸 시간이 별로 없어서 생각이 나는대로 막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글을 남기는 데 의의를 두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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