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돈을 좀 아껴보겠다고 서울과 경기를 이리저리 오가며 발품을 팔았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금쪽같은 시간을 써서 돈을 좀 아꼈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금보다 비싼 게 지금이라던데. 요즘 같으면 그런 아재개그 누가 하냐고 비웃음 당할 일이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난 그게 좀 센스있다고 생각했다.(지금도 아재 개그 좋아함..) 그렇게 종일 고생한 다리를 이끌고 허름한 분식집에 들어갔다. 카카오 지도를 켜고 살펴보면 별점 4점 이상의 맛집 리스트가 즐비하건만, 왜 하필 그곳이 눈에 띄었을지. 그러나 선택은 옳았다. 마약김밥과 떡볶이, 돈까스를 주문해서 둘이서 해치웠다. 역시 금중의 최고는 야금이다.



1


"생쥐가 불쌍하다고 꼬리를 잡아당기다 멈추거나 천천히 잡아당기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반드시 단숨에 확 잡아당겨서 한 번에 경추를 끊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꼬리만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고요."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많은 것들을 가소로워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 혼자 누군가를 가소로워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는데 정작 세상도 그렇게 바뀌니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예전엔 맞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일에 주춤하게 되는 일. 


생명 윤리 또한 그렇다. 이를테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화학약품을 만드는 일에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 동물 실험을 하는 거죠."라는 말을 듣고 '아, 그렇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건 더더욱 위험하잖아.' 라고 설득되었던 어린 나는 '동물들에게도 '위험'한 일이라는 걸 자각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그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이 쓰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동물의 목숨이 희생된다는 건 인간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을.....(많이 컸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열심히 육류를 먹는다. 심지어 돈까스를 먹으며 감탄하지 않았는가. 이중인격이 아닐 수 없다. 육류없는 삶은 번거롭고 즐겁지 않다는 것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 확신하고 만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나는 확신을 잃는 쪽을 택한다.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계란이 올라오는지를 알고 있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해서 먹을 수 있느냐고 아무개가 묻는다면 나는 그 아무개에게 변명하듯 웅얼거리다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확신있는 삶을 향한 내 갈망은 딱 반쪽자리인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수많은 문장들의 대부분이 어딘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이 아니겠는가.... 라는 속편한 생각을 하기로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인생도 그렇듯 해보기 전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 과학 연구에서는 더욱 그렇다. 설치류 연구들은 짧게 보면 다른 의생명 연구와는 결이 너무나 다르고 상업성이 훨씬 떨어져 보인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록 지금은 쓸모없다고 손가락질받는 것들이 어쩌면 지식의 한계를 부술 결정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정답은 아마도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저 너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과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좋은 성과를 냈건 못냈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나 성과를 요하지 않고, 그저 순수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은 이들을 향한 동경같은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재력과 명예 물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지 않은 이는 정말이지 영 마음이 가질 않는다. 마음이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싫어하는 단어라 잘 쓰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 마음을 정확히 묘사한 단어다)하는 정도다. 애정하던 친구가 문학과 과학의 가치를, 무용한 것들의 가치를 깎아내렸을 때도, 같은 이유로 나는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게된 것도 책의 제목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에 벅차오른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자존심 강한 나는 쉽사리 그 손을 잡지 않겠지만, 그게, 내게 손을 내미는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나 스스로 '쓸모없음'을 끌어안고 오롯히 나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것이 '예쁜꼬마선충'이라니. 맙소사.........누가봐도 가장 쓸모없어 보이잖아. 


3

그렇지만 세상을 뒤흔든 과학의 발견은 때로는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실험 도중 실수로 방치한 푸른곰팡이에서 발견한 항생물질 '페니실린', 내복용 살균제를 개발하다가 탄생한 해열진통제 '아스피린', 그리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금을 만들어내려다가 정작 금은 못 만들고 수많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근대 화학의 발달을 이끈 연금술사들의 사례도 있다.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그런데 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정말로 우리를 구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기술력에 비해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는 능력은 부족하게 보인다. 그게 능력이 없어서인가 하면 그게 아니다. 능력있는 인재를 길러낼 줄 모르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일 거다. 초 6년, 중3년, 고3년의 오랜 기간 동안 탄탄한 기초없이 암기만 하게 만드는 대입 구조는 대한민국의 가장 큰 손실이다. 수많은 지금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대학원생들을 값싼 노동으로 사용하는 문제도 한 몫 한다. 무엇보다도 유행하는 과학 기술이 등장하면 뒤늦게 따라하기 바쁜 잘못된 연구비 지원도 크게 한 몫 한다. 그들은 연구원들이 과학자가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드넓은 갯벌에서 진주 하나 찾는 것과 같은 어려운 과학의 발견을 그저 자판기 뽑듯 나올 거라고 믿는 그 신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자들에게 일상이나 고전 물리학에서 가져온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일의 위험을 알려주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양자론을 이해하는 일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물리와 철학> 中



야금야금 먹는 게 돈까스만은 아니다. 이놈의 물리와 철학은 처음 읽기 시작한 게 자그마치 2018년 9월인데. 


1905년,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안 그래도 무시받았던 양자론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때로는 앞서 길을 터 준 사건들 덕분에 그 뒤의 일들이 수월해진다. 누구보다도 양자론을 거부했던 아인슈타인이 그 길을 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포인트다.




5


머리 위로는 꽃 흐드러진 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에 커다란 양털구름이 거의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그 아래 풀밭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더럽히는 존재였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정어리 통조림이나 종이봉투처럼.

-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中


책의 내용과는 맞지 않지만, 그의 문장을 읽는 순간 과거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어렸을 때 나는 비에 젖어 죽죽 쳐져있는 낙엽을 보면 그게 때때로 나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 많이 부는 날에는 비닐 봉지 같은 것이 나무에 걸려있었는데 그것도 나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뭇가지에 뒤엉켜 오도가도 못한 채 펄럭이는 검은 그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렸다. 


지금은 그런 봉투 따위에 감정이입을 하진 않지만, 날이 아주 맑은 날, 그의 문장대로 꽃이 흐드러지는 나뭇가지, 맑은 하늘, 새털 구름, 그리고 풀밭같은 것들과 함께 하는 날에 사진을 찍으면 거기서 지워야할 것은 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은 종종 한다. 나만 빠지면 완벽한 사진이 되었을 텐데 정말이지 '다 된 사진에 나 뿌리기'를 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니 써야하지 않을까. 보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종이봉투같은 인간이 함께할 수 없으니. 누가 그랬던가.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쓰거나, 그게 아니면 쓸 가치가 있는 삶을 살라고. 그러나 세상에 쓸 가치가 없는 삶은 없다. 확신할 수 없는 인생에서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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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9-12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보다 비싼 거이
지금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금야금 먹는 돈까스
땡기네요 - 오늘 저녁
은 김밥입니다.

봄밤 2021-09-13 00:09   좋아요 0 | URL
후회없는 지금을 살아야할텐데 무의미한 지금들만 스쳐지나가네요 흑

그레이스 2021-09-12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의 글쓰기 좋아해요~

봄밤 2021-09-13 00:10   좋아요 1 | URL
읽어야지 생각하고는 한참을 안 읽었던 책이에요. 그래도 이젠 정말로 읽어보려고요. 앞부분은 정말 좋은데 계속 좋을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