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봄밤
그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어떤 잘못 때문에 끊임없이 아래로 끌려가는지 그는 모른다.
가라앉는 동안에도 수면을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단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것이 그를 건져내리라.
그래서 끝까지 수면 위를 노려본다. 죽어라고 노려본다.
바다의 품은 고요하지 않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끊임없이 절망하면서
그는 갈가리 찢긴다. 피죽이 될 때까지 침잠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위를 향한다. 수면 위를 향한다.
그 깊은 물 속으로 태양의 어머니가 그를 구원할 때까지,
수많은 윤슬이 그를 떠안아 올릴 때까지.
그것이 그를 건져낸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원망스럽겠는가.
그는 신음하지 않는다. 그저 수면 위를 노려볼 뿐이다.
건져내라고, 어서 나를 건져내라고.
새해에 들어서면서 슬픔과 이별하고 싶어서 그간 미루고 미뤘던 사강의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설마 '안녕'이 헤어짐의 안녕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존재의 발견을 의미하는 안녕인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정말 세련된 제목이다. 너무 세련되서 낚여버렸다. 새해부터 슬픈 책을 읽다니. 사강 참 너무하네. 소설 속 주인공과 대화하고 싶어지는 건 참 오랜만이다. 세실이 꼭 사강처럼 느껴져서 그런 건지도.
정말 바보같은 세실. 어리석은 세실. 불쌍한 세실.
어렸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에 매력을 느껴서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 뻔하기도 했었는데, 그로부터 약 5년쯤 되었나. 그 문장의 기원지가 궁금해서 검색을 하다가 김영하 작가님의 동일 제목 소설을 읽다가 실망해서 관뒀었고. (그때까지도 김영하 작가님이 한 말인 줄 알았지.) 그로부터 약 3-4년쯤 뒤에 그게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 걸, 이름부터 멋진 사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더랬지. 그리고 그로부터 또 몇 년 후에 그 이름이 필명이라는 걸 알았고 사강이 얼마나 자신을 파괴하며 살았는지 깨달았고. 사강씨는 정말 모든 면에서 세련된 사람이었다. 필명까지도.
사강은 열여덟살에 알았던 '슬픔과의 조우'라는 감정을 난 최근에야 깨닫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일그러짐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그리고 슬픔을 가장 잘 견디는 방법은 '그래, 너 여기 있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자세라는 걸. 잘 받아들이고 나면 또 다시 다른 슬픔이가 내게 찾아와 '나도 있었어'하며 씨익 웃는다는 게 공포 스릴러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코믹이 되기도 하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나에 대해서 점점 잘 알게 되고 있는데, 최근에나 안 것 중 하나는 내가 여럿일 때보다 혼자일 때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다. 혼자 외로워지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지는 일은 다반사로 있었다. 스스로를 혼자로 만드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뜬금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을 받던 황금기도 있었는데 그때도 굳이 그들과 선을 그으며 외로운 역할을 제발로 하려고 했고, 사람들이 무리 안에 나를 넣으려고 할 때도 굳이 선을 그으면서 그 무리를 빠져 나오곤 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결국엔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은 모르는 작은 불행 조각들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 불행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이해하느냐고 돌이라도 던지고 싶었던 모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친 사강의 말 속에서 중요한 건 '파괴'라는 단어라고 어렸을 땐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는'이라는 단어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있어!" 가 아니라
"너 이 새끼들아, 너네는 나를 파괴할 자격이 없어. 그건 나만이 가진 자격이야."를 요약한 외침이 아닐지. 내가 나를 파괴하겠다는데 '너희가 어떤 권리로 날 막느냐'는 거지. 사실 이건 사람들이 도덕 운운할 때마다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
그렇다고 자기파괴적 행위를 무작정 옹호하겠단 건 아니지만.
새해 첫 책부터 글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차피 그른 김에 그냥 내리 사강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도 든다.
마음의 안식처, 북플. 리뷰 쓴지 오래됐는데, 종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난다.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방도 방이지만 자기만의 대나무숲도 필요한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