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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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 권의 책이 다자이 오사무의 긴 유서 같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 글에는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부분이 많이 드러나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슬퍼졌던 것 같다.

(p.23) 만약 어머니가 심술궂고 쩨쩨하고 우리를 야단치고 또 몰래 자기 돈만 불릴 궁리만 하는 분이라면,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이렇듯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을 텐데.

무릇 슬픔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름답고 고귀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으로 인해 그것을 지키고 싶으나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슬퍼지는 것이 아닐까. 가즈코는 어머니의 혹은 자신의 품의를, 동생의 삶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그런 간절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p.29) 아아, 무엇이건 숨김없이 솔직하게 쓰고 싶다. 이 산장의 평온은 죄다 거짓이고 허울에 불과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있다.
(p.33) 맨발에다 잠옷 바람으로 흐트러진 내 모습이 돌연 창피해지고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구나 싶었다.
(p.50) 마음껏 속 시원히 울고 싶어져 2층 방으로 뛰어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기운이 쑥 빠지도록 실컷 우는 사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차츰 어떤 이가 사무치게 그리워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견디기 힘들었다.

가즈코, 그녀라고 힘들지 않을 리 없다. 그녀는 농가에서의 삶이 생소하고 그렇기에 미숙하다. 귀족이었던 그녀의 삶은 불을 내고 잠옷 바람으로 흐트러진 삶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가 현재의 불행을 딛고 일어나도록 이끄는 동인은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여지는데 어쩌면 그것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자연스레 피어오른 감정이라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삶에 원기를 부여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부분에서 꽤 오래 고민을 해봐도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이끌어진 것일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과 합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상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목적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옹호할 수 있을까.

(p.95)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보고 싶습니다.
(p.96)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 분위기에 나의 내음이 털끝만큼도 스며들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부끄럽다기보다도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마치 기묘한 생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성이 약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자이 오사무는 뛰어난 작가이자 철학가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문장들을 줄줄이 뽑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96쪽의 글을 보며 가즈코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내 스스로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 분위기에 나의 향기를 스며들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하더라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라는 기억에 다시금 쓸쓸해졌다.

(p.107) 아무리 도덕을 거스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떠올리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의 혁명가로서의 사상과 사랑을 위한 파괴 사상이 다자이 오사무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가즈코는 도덕을 파괴하는 혁명(이것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의문이지만.)을 일으키고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도덕의 문제는 제외하고라도 왜 우리는 도덕의 문제조차 없는 애정의 일에 매달리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p.112) “어째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 우리한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 하면서 주먹으로 마구 눈을 비벼댔다.
(p.118) 나는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이런 게 행복감이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거다.
(p.136)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아슬아슬 숨이 넘어가는 대사업인가!
(p.143)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다자이 오사무가 바라보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얼마나 ‘슬픈’ 것이었는지를 생각하자면 가슴이 아릿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마저도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슬픔이란 무릇 자기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 자기만의 가슴에 자기만의 크기를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을 덮고 도취적인 생각이나 비관적인 생각으로 빠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정작 마음에 담아두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구절은 아래의 구절이다.

(p.156) 올바른 애정을 품은 사람이 마냥 그리워 부인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그 화가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애정을 품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애정을 주고 싶다는 마음.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 구절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아니 ‘올바른 애정’이라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올바르고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아름다운 과정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내 삶에서의 혁명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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