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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쉬운 책들이 유행인 한 해였던 것 같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한 아이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고 있길래 빌렸나고 물었다니 직접 샀단다. 쉬운 책들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누가 읽느냐에 따라 어렵게 읽을 수도 쉽게 읽을 수도,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 달러구트 책도 그렇고 대기업다니는 부장님 이야기도 그렇고 코로나 때문에 많이들 지쳤는지 공감이 되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은 후로 매일같이 화려한 꿈을 꾸고 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자각몽을 자주 꿨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공중에 뜬 채로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그게 아무나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안 이후로는 가진 게 별 거 없는 내게 특권이 생긴 것 같아 꽤나 감격했었는데 어느 순간 꿈을 많이 꾸지 않았고 그 감격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요즘엔 다시 꿈을 꾼다.


불편한 편의점이 좋았던 이유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일상에선 그저 피하고 싶고 대화하고 싶지 않은 존재로만 보였던 사람들 혹은 내 일상이 바빠 딱히 관심가질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그 사람들의 일상은 어떠한가 물음표를 갖게 한다. 이 책을 읽고 편의점에서 일하던 언니의 일상을 떠올렸다. 폐기 상품을 한 봉지 가득히 가지고 와선 마치 산타라도 된 양 우리에게 나눠주던 언니 모습이.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마주쳤을 수많은 JS들과 그들에게 적당히 친절함을 베풀었을 언니의 모습. 이제 우리는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만큼 배고프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의 불행은 종종 그립게 느껴지기도 한다.


2


나오미는 온실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불평하는 사람들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상승할 때는 의미가 있지만, 다같이 처박히고 있을 때는, 그저 마음의 낭비인 것이다.

-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中



예전에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을 읽은 후 그녀의 행보에 기대를 한 적이 있다. 기대를 하면서도 어쩌면 적당한 과학 지식에 감성 한 두 스푼을 얹어 쉽게 쉽게 글을 써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경계하기도 했다.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M은 그녀의 글은 SF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가 이미 아주 오래 전 나온 것들이고 내용도 새로울 게 없다는 거였다. 나도 조금은 동의했다. 우리는 그녀에 대한 판단을 그녀가 장편소설을 낼 때까지 유보할 수 있을 거라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그 후 김초엽이 장편소설을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전혀 읽을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끌리지가 않았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에 호기심이 갔다. 


SF인데 온실이라니. 세상의 종말과 식물로 되살리는 세상 같은 뻔한 이야기려나,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역시나 소재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롱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이과생은 자신의 성향 때문에 이과가 최적이고, 실제로 이과 공부를 하면서 좀 더 이과스러워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김초엽에게는 그런 편견이나 고집이 없다. 과학에 대해 모르면서 SF를 쓰겠다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믿음이 가고 그 와중에 그녀에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있다. 이과고 문과고 뭐고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묘한 매력이 그녀에게 있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것이 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근 읽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나 불편한 편의점, 그리고 김부장 이야기나 지구 끝의 온실은 적당한 가벼움과 감성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금세 잊게된다는 것이다. 어렵게 읽어야 더 기억에 남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같은 책은 카페에서 술술 한 두 시간이면 읽을 책이지만 삶의 순간 순간에 떠오른다. 이를테면 아래의 구절같은 것.



샛강을 따라 걷다 우리 텐트로 돌아오거라. 할머니와 내가 기다리고 있으마. 한번 해보렴. 조금 갔다가 돌아오면 되니까. 보니랑 함께.

-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3

벌써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작년보단 많이 읽었다.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것에 비하면 너무 조금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많이 읽은 장르인 걸 보면 사실은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2021년의 독서>

경제 2권

과학 6권

사회과학 5권

소설 14권

시 1권

에세이 18권

역사 1권

예술 1권

인문학 3권


별점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아무 정보도 알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별점을 주는 건 꽤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왓챠나 유튜브 등이 연관성을 가지고 추천영상을 제시하듯 누군가의 별점 리스트는 그 사람의 독서 성향을 알려주고 그건 비슷한 성향을 가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다. 




4

한 해의 독서목록을 보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지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8월 말의 난 좀 지쳤었나보다, 라거나.....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은 단연 이 책이다. 



이 책은,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면 그만큼 세상이 좋아질 것 같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김원영 변호사의 글은 항상 깨달음을 주지만 이 책은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中


위의 문장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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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1-0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영 변호사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갖고만 있는데 어서 읽어봐야겠어요~ <희망 대신 욕망>이랑 <사이보그가 되다>도 읽어보고 싶어요. 지난해 김초엽을 처음 만났는데 <지구 끝의 온실>도 찜합니다. 봄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봄밤 2022-01-02 08:17   좋아요 0 | URL
어서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독서괭님도 복 많은 한 해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