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언제쯤 환생할수 있는 거죠?
[저곳은 아해의 전장이 아닙니다. 아해는 더 커다란 의미를수행할 존재로 환생할 것입니다.]
-저들이 내 의미예요.
영혼이 되어서도 유상아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여기서 저들을 살리지 못하면 제 환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해요.
[의미라......]
[그대는 내가 아끼던 아해의 몸에 깃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간다고요? 환생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 몸을 화신체 삼아 환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주의 섭리로 되돌아간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수레바퀴의 공허한 회전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아끼던 사람이잖아요.
[아해도 곧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환생자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니.]
-전 아직 환생자가 아니에요.
[그런 굴레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소중하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남을 저주하는 게 취미이신가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해여.]
[성들은 평생을 불면에 시달립니다. 시나리오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꿈에서조차 다른 이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탐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나리오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늘 불안해하지요. 자신들이 왜 불안한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시나리오는 영원한 백일몽입니다. 죽음을 외면하기에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기에 시나리오의 미망에서깨어나지 못하지요. 자신을 구원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생자는 다릅니다.]
[환생자는 성좌처럼 영원을 살아가지만,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음을 알기에 깨어남을 알고, 깨어남을 알기에 자신이시나리오 속 일개 부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환생이란 시나리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들 체념한 얼굴이에요.
[누가 이기든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는 바꿀 수 있어요. 우린 늘 그래왔어요.
[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건가요? 뭘 해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니까? 그건 도망치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서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고요.
[아해여, 그건 환생자의 삶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환생자들]은 무수한 삶을 시나리오와 투쟁하며
-단 한 번의 삶도 포기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싸워보셨나요?
-1,800번이 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운 사람도 있어요.
유상아가 화면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코트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모든 삶을 함께 지켜본 사람도 있고요.
그 옆에 선 흰 코트의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옮겨간 사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현성을 향했다.
[숫자를 헤아리기에 이 몸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헤아릴 수 있는 숫자도 있군요.]
석존이 이현성을 보며 말했다.
[이 섬에 늘어날 환생자가 하나] - P10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대도깨비의 신형.
모든 일행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대의 판단은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번만큼은 수르야도 감탄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김독자."
"왜. 또, 뭐."
"오래 생각하고 한 판단 맞지? 같잖은 동정심이라든가, 순간적인 충동은 아니지?."
"그럼 됐어."
"화내도 돼. 난 방금 엄청난 기회를 걷어찬 거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뭐, 그래. 이유가 있겠지. 솔직히 나도 네가 거절할 거라고생각했어."
"뭐? 왜?"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하는 한수영의 말을 받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게 네놈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평소와 같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유중혁을 보며, 두 사람이 내게 무엇을 양보했는지 깨달았다.
맞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 P71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깨어날 것이다.」「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한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가 사라지리라.」 - P74

"묵시룡‘은 본래 ‘특정한 용‘을 지칭하는 게 아냐. ‘가장 오래된 선‘이나 ‘가장 오래된 악‘이 특정 성좌를 칭하는 게 아닌것처럼. ‘묵시록의 최후룡‘은 거대 설화 그 자체를 말한다고."
"잠깐, 그러면......"
"아직 이 시점에서 ‘누가 묵시룡이 되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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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아원에서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모래로 팔이고 장딴지고 피가 나도록 문질러댔어. 그래도 피부는 아이들과 같아지지 않고검은색 그대로였어.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죽기보다 싫은 게 뭔지알아? 튀기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리고 하는 거야. 난 미국에가서 감자껍질이나 벗기는 신세로 천대받아도 좋고, 버림받아도 괜찮아. 어쨌든 미국에만 가면 돼. 그럼 많은 흑인들 틈에 섞여버리니까 여기서처럼 구경거리 되는 일은 없어지거든.」 - P33

방탄조끼에 철모를 쓰고, 총까지 휴대하고 운전을 해야 하는 자신들을 그들은 ‘군번 없는 군인‘이라고 불렀다. - P42

「왜 안 그렇겠어.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해냈잖아?
정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됐어. 큰 고비를 넘긴 거야. 왜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게 있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너는 이제 해방됐으니 얼마나 좋아. 난 앞으로 당해야 하는데. 네가 부럽다. 가, 밥 먹으러.」「아니야, 아니야, 나 밥 못 먹어. 지금도 구역질 나」정남희는 입을 막고 돌아서며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이것도 이겨내야 해. 밥을 굶고 어떻게 힘든 일을 하겠어. 여기까지와서 그까짓 것 못 이겨내면 안 되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의 등을 다근다근 두들기며 좀 싸늘하다 싶게 말했다.
「너는 밥 먹을 자신 있어?
정남희는 눈물 어린 눈으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딨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데.」
「그래・・・・・・ 그렇지, 낭떠러지지. 누구나 그렇지. 알았어, 가」 - P111

「응, 닥터 한스가 하는 말이, 일을 쉽고 즐겁게 하려면 신앙을 가져보라는 거야. 간호원을 왜 ‘백의의 천사‘라고 하느냐 하면, 간호원은 환자들을 대하는 데 마음속에다 천사와 같은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의무와 책임으로만 일을 하면 일이 힘들고 괴롭지만, 천사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쉽고 즐거워진다는 거지. 예수를 믿으며 그 사랑을배우라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닥터 한스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이언제나 웃고 다정해. 꼭 친부모 대하는 것같이 - P113

근로감독관은 궁기 흐르는 전태일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반말을 던졌다. 거만하고 불친절한 공무원의 전형적인 말투를 쓰는 그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 P149

전태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로감독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공장 얘기를 듣고도 놀라거나 동정하는 빛은 전혀 없이 무작정 간단하게 말하라고 몰아댔다. 일거리가 너무 많아 그런 것일까? 몸에 밴 공무원 행투 때문일까? 근로기준법은 분명히 나라가 만들었고, 근로감독관은 그 법이 잘 지켜지도록 감독하는 사람 아닌가?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 공원들 편이어야 하는데.... - P152

「야, 느네 학교는 데모 안 해?」유일민의 옆에 앉은 대학생이 낮은 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더 하면 뭘 해. 공화당에서 3선개헌을 하기로 결의해 버렸는데.」
「하긴 그래. 야당이야 자릿수 모자라 있으나마나니까. 근데 박 그사람 어쩔려고 그러지? 이승만이 당하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권력의 맛이 좋은 걸 어쩌겠어. 자긴 안 당할 자신이 있다 그런 배짱인거지. 그런 착각과 오만이 인간의 한계고 어리석음 아니겠어.」
「글쎄 말야, 우리들도 다 아는 걸 어째서 그 사람들은 모르지? 권력을잡으면 다 그렇게 바보가 되나?」
「그게 권력의 속성이고 마성이래잖아. 왜 조지 워싱턴을 위대하다고하겠어. 국민 여론이 나라를 위해 당신은 대통령을 세 번 해도 된다고했을 때 워싱턴은 단호하게 말했어. 나는 대통령을 세 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차후에 나보다 못한 자가 나를 빙자하여 세 번 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룩된 거야.」
「참 부러워. 우리도 그런 인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어쨌거나 박은 제무덤 파고 있어. 」
「당연하지. 경제 건설 팔아대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있지만,
그거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이승만도 건국대통령 내세우며 자기 아니면안 된다고 했거든. 하여튼 정치가들이란 염치없이 뻔뻔스럽고, 양심 없이 거짓말해 대는 못된 인간들의 표본이야. 어쨌든 정치란 아더메치야」
‘아더메치‘란 귀를 덮는 장발과 함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줄임말이었다. - P167

고정된 레일을 가진 전차가 팽창하는 도시의 교통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모르지만 시민들 의견은 아예 들어보지도않고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것이 서울의 전차였다. 그건 군 출신 시장이보여준 대표적인 군대식 행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저돌성이 ‘과감한 추진력‘으로 미화되면서 군대식의 효과가 사회 전반을 물들이고 휘어잡아가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언뜻언뜻 몸서리치고는 했다. ‘군대는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억지는 그래도 유식한 말로 포장이나 되어있었다. ‘으로 밤송이 까라면 깠지………… 3년 동안 넌덜머리 나게 들었던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 바로 한국 군대의 동력이었다. 그런 어거지와 우격다짐의 군대식이 언제부턴가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되어 있는 것을 느끼며 두렵고도 암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200

작은 고추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세상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부르는별명이 아니라 애칭이었다.
「누구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는데.」「그럼. 그저 조선사람은 작은 고추야. 그만한 인물 없어.」사람들의 이런 맞장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엄연히 피땀 흘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모든 공이 박 대통령 차지가 되고 있는 게 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건 3선개헌을 해놓고 불안 상태에 있는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말을 사람들이 어리숙하게 되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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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내가 쓰라고 적어둔 방법 있잖아. 어떻게 된 게 매뉴얼대로하라는 것도 못하냐? 너흰 이현성보다 멍청해! 알았어?"
"감독자 내가 써둔 세 가지 방법 훑어봐."
"첫 번째 방법, ‘퓨전 판타지‘ 루트"
이계의 신격의 힘을 빌려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야,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두 번째는?"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을 느끼며 교과서를 읽듯 한수영의책을 읽었다.
"두 번째 방법, ‘판타지."
"내용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아니,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는.......‘
한수영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제기랄, 이 자식이.
"세 번째 방법, ‘로맨스‘."
"내용은?"
"유리 디 아리스텔과 결혼한다."
"그래서 네가 택한 건 뭐지?"
"네 번째 방법."
"내가 방법이 세 개라고 써놨지?" - P130

"당신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야."
"‘판타지‘나 ‘퓨전 판타지‘도 아니고."
설화가 없는 존재는 없다. 단지, 그것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설화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당신의 장르는 ‘마르텔 디 루트비어‘야."
귀족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한수영은 그 옆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케인 폰 발로드. 에리메인 반 에크리드 슈트리안 엑셀"
오래전에 사라진 이야기의 이름을 되찾아주듯, 한수영은 모두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러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한수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도, 혁명단원도, 근위기사도 그 순간만큼은 얌전히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이름을 다 부른 후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이 당신들의 장르야." - P145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선택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겁니다."
세상의 성좌들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P185

[<스타 스트림>은 꺾이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지. 그대들처럼 순수한 이야기는 더욱]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입가가 움직였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우린 이미 수십 번도 더 꺾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처음부터 두 발로 서 있지 않았다.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성좌들의 농락과 근본 모를증오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순수하다‘라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침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울음을 삼킵니다.]
내 말에 동조하듯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반응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발아 중인 세 번째 ‘거대 설화‘가 태동합니다.]
거기다 곧 깨어날 세 번째 거대 설화까지. - P190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 - P194

[그리고 어떤 설화는, 애써 소비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다.]
죽어가는 설화들이 포크 끝에서 부스러졌다.
오랫동안 누구도 찾지 않던 설화들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르세포네의 혀끝에서 황홀한 문장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는 나를 향해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네가 성좌들의 식성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단다. 화신들의 희로애락을 너무나 쉽게 소비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하지만 우주의 모든 사건은 설화로 남을 수밖에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화신과 성좌도 결국 무언가에 의해 소비되기는 모두 마찬가지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삶은 <스타 스트립>에서 이야기가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다양한 설화의스펙트럼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성좌들이 할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양한 설화를 남기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 P260

[아주 오래전, 우리 부부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단다.]
"계시요?"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문득, 언젠가 디오니소스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나와 몇몇 성좌는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어쩌면 그 ‘몇몇 성좌‘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지칭하는것일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 신탁을 받았을 때, 나는 화가 났단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이야기를 기억해줄, 어여쁜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비록 이곳에는 어둠과 지옥과 감옥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림포스> 12신중 누구보다도 더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에게다른 존재의 어둠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타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지옥을 알려주고, 정의를 짓밟는 악을 엄벌할 감옥을 보여주겠노라고.][수백 년 동안 그런 착각 속에 살았다.]
[하데스와 나는 오랫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헤쳐왔단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불행하지 않았어. <명계〉가 설령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우리가 살아왔던 설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12신과는 다르다고, 자신의 설화를 자식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그런 부모와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저 우리로서 오롯하다고.]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타나고 말았구나.]
[사실 너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이였단다.]
[지하철에서 네가 살아남던 순간부터 그이는 줄곧 네 역사를 지켜봐왔단다. 처음에는 너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않았다. 이제 이 세계에 그런 설화는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내게 신나서 떠들던 그이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외로이 자란 작은 설화가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지켜보았단다. 쟁쟁한 성좌들과 겨루고, 이계의 신격과 맞서고,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며 ■■■■■… 기어코 다섯 개의설화를 쌓아 하나의 별자리로 태어난 작은 성좌를]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네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진짜 부모가 아니라도 좋으니, 그런 지지자가 되고 싶다고.]
[하데스와 나는 네가 명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우리에게 구속되길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온 삶이 우리가살아온 역사가 너의 삶을 규정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너는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모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향해나아가면 된다.]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제가 이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을 때……… 반드시,
당신들의 이야기도 함께할 겁니다."
[테라스로 가보거라. 네 아비가 너를 기다린다.] - P264

[보고 있느냐?]
[저것이 명계다.]
"아버지"
[군대를 데려가라.]
[<명계>를 위하여!]
첫 번째 심판관이 외쳤고.
[<명계>의 왕자를 위하여!]
두 번째 심판관이 부복하며 날 바라보았다. 세 번째 심판관의 창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모든 영혼이 함께 부르짖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영원과 종장을 위하여!]
그 함성 속에서 명왕이 말했다.
[가거라.]하데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명계>는 지금부터 너의 편이다.] - P269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무리인가.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무언가가 그런 정희원에게 힘을 보탰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을 함께 사랑한 이들.
까가가가각!
정희원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바르바토스의 총검술을 받아냈다.
총검술. 그녀가 아는 사내도 총검술에 능숙했다.
"군대에서는 힘들수록 더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매일 아침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그날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들었습니다."」
"하아아아아악!"
정희원은 이현성처럼 기합을 터뜨렸다.

"저도 일단 지르고 볼 때가 있습니다. 항상 모든 걸 계산하고 있는건 아니에요."」김독자처럼 용기를 냈고
그렇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유중혁처럼 검을 휘둘렀다.
언뜻 한수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알지?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그런 한수영처럼 정희원이 말했다.
"뼈를 원한다면 뼈를 주고 심장을 원한다면 심장을 주겠어."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든 상관없다는 태도,
오직 상대방을 함께 파멸시키기 위한 전투법
"하지만 너도 네 설화의 절반은 걸어야 할 거야"

정희원은 바닥에 늘어진 이현성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성 씨.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는 정말 한 줌의 여한도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더라도.
나는 제대로 이 순간을 살아냈다. - P373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엘이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탁기가 서린 날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엘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괜찮아요, 우리엘."
우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잠시 우리엘을 바라본 뒤, 말없이 바닥을 보았다.
그들은 성좌와 화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를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습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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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최종본).txt

어쩌면 이 파일의 끝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운이 좋다면 이번 3회차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안전한 결말에 도달할지 알려주는 지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마지 막이 비극이 라면?」

만약에, ‘최종분‘의 의미가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라는 뜻이라면?

「네가 그걸 바꿀수 있을까?」 - P9

"왕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미안합니다. 빌스턴 경."
"예? 갑자기 무슨……."
"그간 너무 고생만 시킨 것 같습니다. 절 지키느라 힘드셨다는 것 잘 압니다."
빌스턴 프레이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드리지 못했지요. 몇 번이나 제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까지 오는 내내 이현성에게는 줄곧 도움을받았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순번이 늘 밀려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함께 싸운 설화들이 우리를 대신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 P39

나는 근위대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근위대장이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죽기가 두려워진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제 검이 되어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위대장의 표정에 희미한 당혹감이 어렸다.
"무슨 헛소리지?"
"벌써 맹세를 잊으신 겁니까? 저와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을 보겠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 P45

나는 잠깐이지만 그런 기대를 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 녀석이라면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 이미 오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최종본의 글귀.
그것은 이런 의미였다.
"있습니다."
"죄인은 말하라."
"내가..….…."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수영아." - P48

<폭망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 한수영 著 ≫. - P65

기억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렇게 육 년이 지났고
- 독자 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 제 생각엔 올해 안에 오실 것 같습니다.
칠 년이 지났다.
- 칠 년이나 임금을 체불하다니, 완전 악덕 기업 아니에요?
- 나중에 꼭 노조를 설립합시다.
- 꼭 그렇게 해요. 잊지 말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던 약속은한 달에 한 번이 되었고, 이내 두 달에 한 번이 되었다.
만나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팔 년이 되던 어느 날, 정희원이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 우리 뭔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요?
이현성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
-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 날 죽여줘요.
그것이 정희원과 이현성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희원 씨.
허공에서 몇 번이고 둘의 검이 부딪쳤다.
-희원 씨.
반복된 [전음]에도 정희원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까마득해지는 시야. 이현성은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기억하는 정희원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가까워진 정희원의 두 눈을 보며, 이현성은 오랫동안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말을처음으로 건넸다.
-좋아합니다, 희원 씨. - P98

"방법이 세 가지나 있다는 건, 그 방법을 ‘방법‘이 되게끔 만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뭐?"

- 네가 설화를 제대로 읽지 않으면, 오히려 설화가 너를 읽게 될 거다.

저 거대 설화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이 세계의 배역들을 조종해왔다. 이곳의 환생자는 모두 저거대 설화의 실현 도구로서 수백 수천 번 배역을 반복해왔겠지. - P117

"오해하지 마. 너한테 왕위를 주려는 게 아니니까. 왕이 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내 동료."
커지는 왕의 눈을 보며, 나는 말을 맺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폭발했다.

[시나리오 선택지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장르 선택지 ‘판타지‘가 붕괴합니다!][장르 선택지 ‘퓨전 판타지‘가 붕괴합니다!][장르 선택지 ‘로맨스‘가 붕괴합니다!][당신은 어떤 장르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용케도 알아냈네, 김독자.」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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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종말‘과 누구보다 가까운 당신이라면 당연히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침묵하며 아스모데우스의 고요한 눈을 마주 보았다.
[곧 ‘선악의 이중주‘가 시작됩니다. 이제 당신도 ‘편‘을 택할때가 왔다는 이야기지요.]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묻고 있었다.
너는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아스모데우스만이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갈라지고 있었다.
한쪽은 밝은 빛으로, 한쪽은 우중충한 빛으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악의 이중주.
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간단했다.
「이 세계선의 멸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무너진 선악의 균형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거대 성운조차 피해갈 수 없는 치명적인 멸망.
내 기억이 맞는다면이 멸망의 첫 희생양은.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천사들의 성운, <에덴>이 될 것이다. - P66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어둠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 P187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먼 것들이 만나고 멀어지는 그 순간을 설화는 기억한다. 그것이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 P287

나도 잘 알고 있다. 설화가 커질수록 내가 짊어질 부담도 늘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동료를 만들었다. 함께 역사를 쌓았고,
설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유중혁과는 다른 결말에 도달하기위해,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계속 읽어나가야 할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함께 도달할 마지막을 상상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분명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껏 내가 쌓은 시간이 완전히 무용한 것이었다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내가 꿈꾸는 결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 P385

「혼자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독자는 항상 혼자였다. 그렇기에 독자였고, 김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서럽게도 타당한 문장이었다.
「그런 김독자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독자가 독자가 되는 순간이었다.」한 권의 책에 대한 긴 독후감 같은 인생.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멸살법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고, 멸살법이 만들어준벽 뒤에 숨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했다.
「그는 멸살법을 읽을 때 비로소 살아 있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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