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범보다 더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 - P52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억압에 대해서 말하라면세상의 반절인 여자들이 당한 수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해자는 세상의 또 다른 반절인 남자들이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해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난로와 책상 같은 물건에 불과했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약자들이 끝없이 소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힘. 언젠가는 힘으로 다시 너를 누르리라. 내게 힘이 있다면 반드시 지금 당한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리라. 그 많은 불행한 여자들이 모두 희생이나 인내를 진실로 미덕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단지 힘이 없었을뿐이다. 생각해 보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두꺼운 역사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없다.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것이다. - P72
폭력에는 육체적인 위협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인격 모독을 가하는 심한 욕설도 폭력이다. 이 경우, 구타와 마찬가지로 이혼 사유가 충분히 된다. - P88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 P155
순수하기에 용감한 것이고 용감할 수 있기에순수한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르거나, 추하고 아름답다는 식의이분법적 논리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그 단순 명료함, 이것이 우직한 삶이 지닌 미덕이다. - P175
잠깐의 휴식도 없이 날마다 싸우고, 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발을 동동거려야 하는 삶이란 이름의 이 게임. - P184
역사가 깊은 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억압과 회유의 반복이라는 양날의 통치 기술이 아주 성공적으로 쓰여 왔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이 기술이 전폭적으로 사용되었다. 내가상담소에서 채집한 가정폭력의 거의 일백 프로가 모두 이 악순환을 밟고 있다. 하루는 실컷 아내를 두들겨 팬 남편이 다음날에는상처를 치료할 약과 아내에게 바칠 선물을 사들고 와서 눈물겹도록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사는 아내의 대부분이 바로 이 회유의 단계에서 어김없이 남편을 용서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런 남편, 아니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 그러니까 우리의 정치사 또한 고스란히 이 병 주고 약 주기 수법을 남용하고 있지 않았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만 살펴보아도 그 흔적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권력자는 민중에게 오락과 스포츠를제공하며 이에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막강한 폭력을 처방한다. 그리고 다음은 다시 회유의 정치가 시작된다. - P197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주장대로 형식을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P210
남자들이란 정말 피곤한 존재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인간의 필수적인 기능조차 습득하지 못한 미개인들, 큰일을 도모하다결국은 작은 이익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반란자들, 이것이 바로 남자들이란 존재의 속성이다. - P232
여자의 삶이 남자와 상관없이 독립적일 수는 없는가. 남자가사라졌다 한들 자식까지 돌보지 못할 정도로 무너지는 일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는 연약한 이 땅의 여자들에게 절망한다. 내가벌이고 있는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동성의 협력자를 얻는일은 정녕 불가능한가. 어차피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홀로 치르는전쟁, 끝까지 혼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 P256
그러면서 백승하는 문득 내 손을 꽉 움켜잡는다. 마치 험한 길을 함께 가는 동지의 손을 잡듯이. 그런 백승하를 나는 가만 내버려 둔다. 비록 적군이라 해도 가끔은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삶이란 이름의 연극이므로.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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