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내가 쓰라고 적어둔 방법 있잖아. 어떻게 된 게 매뉴얼대로하라는 것도 못하냐? 너흰 이현성보다 멍청해! 알았어?"
"감독자 내가 써둔 세 가지 방법 훑어봐."
"첫 번째 방법, ‘퓨전 판타지‘ 루트"
이계의 신격의 힘을 빌려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야,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두 번째는?"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을 느끼며 교과서를 읽듯 한수영의책을 읽었다.
"두 번째 방법, ‘판타지."
"내용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아니,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는.......‘
한수영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제기랄, 이 자식이.
"세 번째 방법, ‘로맨스‘."
"내용은?"
"유리 디 아리스텔과 결혼한다."
"그래서 네가 택한 건 뭐지?"
"네 번째 방법."
"내가 방법이 세 개라고 써놨지?" - P130

"당신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야."
"‘판타지‘나 ‘퓨전 판타지‘도 아니고."
설화가 없는 존재는 없다. 단지, 그것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설화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당신의 장르는 ‘마르텔 디 루트비어‘야."
귀족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한수영은 그 옆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케인 폰 발로드. 에리메인 반 에크리드 슈트리안 엑셀"
오래전에 사라진 이야기의 이름을 되찾아주듯, 한수영은 모두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러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한수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도, 혁명단원도, 근위기사도 그 순간만큼은 얌전히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이름을 다 부른 후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이 당신들의 장르야." - P145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선택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겁니다."
세상의 성좌들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P185

[<스타 스트림>은 꺾이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지. 그대들처럼 순수한 이야기는 더욱]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입가가 움직였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우린 이미 수십 번도 더 꺾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처음부터 두 발로 서 있지 않았다.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성좌들의 농락과 근본 모를증오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순수하다‘라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침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울음을 삼킵니다.]
내 말에 동조하듯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반응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발아 중인 세 번째 ‘거대 설화‘가 태동합니다.]
거기다 곧 깨어날 세 번째 거대 설화까지. - P190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 - P194

[그리고 어떤 설화는, 애써 소비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다.]
죽어가는 설화들이 포크 끝에서 부스러졌다.
오랫동안 누구도 찾지 않던 설화들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르세포네의 혀끝에서 황홀한 문장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는 나를 향해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네가 성좌들의 식성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단다. 화신들의 희로애락을 너무나 쉽게 소비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하지만 우주의 모든 사건은 설화로 남을 수밖에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화신과 성좌도 결국 무언가에 의해 소비되기는 모두 마찬가지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삶은 <스타 스트립>에서 이야기가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다양한 설화의스펙트럼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성좌들이 할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양한 설화를 남기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 P260

[아주 오래전, 우리 부부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단다.]
"계시요?"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문득, 언젠가 디오니소스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나와 몇몇 성좌는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어쩌면 그 ‘몇몇 성좌‘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지칭하는것일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 신탁을 받았을 때, 나는 화가 났단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이야기를 기억해줄, 어여쁜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비록 이곳에는 어둠과 지옥과 감옥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림포스> 12신중 누구보다도 더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에게다른 존재의 어둠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타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지옥을 알려주고, 정의를 짓밟는 악을 엄벌할 감옥을 보여주겠노라고.][수백 년 동안 그런 착각 속에 살았다.]
[하데스와 나는 오랫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헤쳐왔단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불행하지 않았어. <명계〉가 설령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우리가 살아왔던 설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12신과는 다르다고, 자신의 설화를 자식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그런 부모와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저 우리로서 오롯하다고.]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타나고 말았구나.]
[사실 너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이였단다.]
[지하철에서 네가 살아남던 순간부터 그이는 줄곧 네 역사를 지켜봐왔단다. 처음에는 너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않았다. 이제 이 세계에 그런 설화는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내게 신나서 떠들던 그이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외로이 자란 작은 설화가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지켜보았단다. 쟁쟁한 성좌들과 겨루고, 이계의 신격과 맞서고,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며 ■■■■■… 기어코 다섯 개의설화를 쌓아 하나의 별자리로 태어난 작은 성좌를]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네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진짜 부모가 아니라도 좋으니, 그런 지지자가 되고 싶다고.]
[하데스와 나는 네가 명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우리에게 구속되길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온 삶이 우리가살아온 역사가 너의 삶을 규정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너는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모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향해나아가면 된다.]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제가 이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을 때……… 반드시,
당신들의 이야기도 함께할 겁니다."
[테라스로 가보거라. 네 아비가 너를 기다린다.] - P264

[보고 있느냐?]
[저것이 명계다.]
"아버지"
[군대를 데려가라.]
[<명계>를 위하여!]
첫 번째 심판관이 외쳤고.
[<명계>의 왕자를 위하여!]
두 번째 심판관이 부복하며 날 바라보았다. 세 번째 심판관의 창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모든 영혼이 함께 부르짖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영원과 종장을 위하여!]
그 함성 속에서 명왕이 말했다.
[가거라.]하데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명계>는 지금부터 너의 편이다.] - P269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무리인가.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무언가가 그런 정희원에게 힘을 보탰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을 함께 사랑한 이들.
까가가가각!
정희원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바르바토스의 총검술을 받아냈다.
총검술. 그녀가 아는 사내도 총검술에 능숙했다.
"군대에서는 힘들수록 더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매일 아침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그날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들었습니다."」
"하아아아아악!"
정희원은 이현성처럼 기합을 터뜨렸다.

"저도 일단 지르고 볼 때가 있습니다. 항상 모든 걸 계산하고 있는건 아니에요."」김독자처럼 용기를 냈고
그렇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유중혁처럼 검을 휘둘렀다.
언뜻 한수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알지?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그런 한수영처럼 정희원이 말했다.
"뼈를 원한다면 뼈를 주고 심장을 원한다면 심장을 주겠어."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든 상관없다는 태도,
오직 상대방을 함께 파멸시키기 위한 전투법
"하지만 너도 네 설화의 절반은 걸어야 할 거야"

정희원은 바닥에 늘어진 이현성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성 씨.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는 정말 한 줌의 여한도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더라도.
나는 제대로 이 순간을 살아냈다. - P373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엘이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탁기가 서린 날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엘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괜찮아요, 우리엘."
우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잠시 우리엘을 바라본 뒤, 말없이 바닥을 보았다.
그들은 성좌와 화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를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습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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