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아원에서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모래로 팔이고 장딴지고 피가 나도록 문질러댔어. 그래도 피부는 아이들과 같아지지 않고검은색 그대로였어.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죽기보다 싫은 게 뭔지알아? 튀기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리고 하는 거야. 난 미국에가서 감자껍질이나 벗기는 신세로 천대받아도 좋고, 버림받아도 괜찮아. 어쨌든 미국에만 가면 돼. 그럼 많은 흑인들 틈에 섞여버리니까 여기서처럼 구경거리 되는 일은 없어지거든.」 - P33
방탄조끼에 철모를 쓰고, 총까지 휴대하고 운전을 해야 하는 자신들을 그들은 ‘군번 없는 군인‘이라고 불렀다. - P42
「왜 안 그렇겠어.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해냈잖아? 정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됐어. 큰 고비를 넘긴 거야. 왜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게 있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너는 이제 해방됐으니 얼마나 좋아. 난 앞으로 당해야 하는데. 네가 부럽다. 가, 밥 먹으러.」「아니야, 아니야, 나 밥 못 먹어. 지금도 구역질 나」정남희는 입을 막고 돌아서며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이것도 이겨내야 해. 밥을 굶고 어떻게 힘든 일을 하겠어. 여기까지와서 그까짓 것 못 이겨내면 안 되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의 등을 다근다근 두들기며 좀 싸늘하다 싶게 말했다. 「너는 밥 먹을 자신 있어? 정남희는 눈물 어린 눈으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딨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데.」 「그래・・・・・・ 그렇지, 낭떠러지지. 누구나 그렇지. 알았어, 가」 - P111
「응, 닥터 한스가 하는 말이, 일을 쉽고 즐겁게 하려면 신앙을 가져보라는 거야. 간호원을 왜 ‘백의의 천사‘라고 하느냐 하면, 간호원은 환자들을 대하는 데 마음속에다 천사와 같은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의무와 책임으로만 일을 하면 일이 힘들고 괴롭지만, 천사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쉽고 즐거워진다는 거지. 예수를 믿으며 그 사랑을배우라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닥터 한스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이언제나 웃고 다정해. 꼭 친부모 대하는 것같이 - P113
근로감독관은 궁기 흐르는 전태일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반말을 던졌다. 거만하고 불친절한 공무원의 전형적인 말투를 쓰는 그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 P149
전태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로감독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공장 얘기를 듣고도 놀라거나 동정하는 빛은 전혀 없이 무작정 간단하게 말하라고 몰아댔다. 일거리가 너무 많아 그런 것일까? 몸에 밴 공무원 행투 때문일까? 근로기준법은 분명히 나라가 만들었고, 근로감독관은 그 법이 잘 지켜지도록 감독하는 사람 아닌가?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 공원들 편이어야 하는데.... - P152
「야, 느네 학교는 데모 안 해?」유일민의 옆에 앉은 대학생이 낮은 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더 하면 뭘 해. 공화당에서 3선개헌을 하기로 결의해 버렸는데.」 「하긴 그래. 야당이야 자릿수 모자라 있으나마나니까. 근데 박 그사람 어쩔려고 그러지? 이승만이 당하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권력의 맛이 좋은 걸 어쩌겠어. 자긴 안 당할 자신이 있다 그런 배짱인거지. 그런 착각과 오만이 인간의 한계고 어리석음 아니겠어.」 「글쎄 말야, 우리들도 다 아는 걸 어째서 그 사람들은 모르지? 권력을잡으면 다 그렇게 바보가 되나?」 「그게 권력의 속성이고 마성이래잖아. 왜 조지 워싱턴을 위대하다고하겠어. 국민 여론이 나라를 위해 당신은 대통령을 세 번 해도 된다고했을 때 워싱턴은 단호하게 말했어. 나는 대통령을 세 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차후에 나보다 못한 자가 나를 빙자하여 세 번 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룩된 거야.」 「참 부러워. 우리도 그런 인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어쨌거나 박은 제무덤 파고 있어. 」 「당연하지. 경제 건설 팔아대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있지만, 그거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이승만도 건국대통령 내세우며 자기 아니면안 된다고 했거든. 하여튼 정치가들이란 염치없이 뻔뻔스럽고, 양심 없이 거짓말해 대는 못된 인간들의 표본이야. 어쨌든 정치란 아더메치야」 ‘아더메치‘란 귀를 덮는 장발과 함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줄임말이었다. - P167
고정된 레일을 가진 전차가 팽창하는 도시의 교통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모르지만 시민들 의견은 아예 들어보지도않고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것이 서울의 전차였다. 그건 군 출신 시장이보여준 대표적인 군대식 행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저돌성이 ‘과감한 추진력‘으로 미화되면서 군대식의 효과가 사회 전반을 물들이고 휘어잡아가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언뜻언뜻 몸서리치고는 했다. ‘군대는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억지는 그래도 유식한 말로 포장이나 되어있었다. ‘으로 밤송이 까라면 깠지………… 3년 동안 넌덜머리 나게 들었던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 바로 한국 군대의 동력이었다. 그런 어거지와 우격다짐의 군대식이 언제부턴가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되어 있는 것을 느끼며 두렵고도 암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200
작은 고추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세상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부르는별명이 아니라 애칭이었다. 「누구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는데.」「그럼. 그저 조선사람은 작은 고추야. 그만한 인물 없어.」사람들의 이런 맞장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엄연히 피땀 흘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모든 공이 박 대통령 차지가 되고 있는 게 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건 3선개헌을 해놓고 불안 상태에 있는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말을 사람들이 어리숙하게 되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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