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
타라 브랙 지음, 윤서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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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한동안 고수해온 무의식적인 편협한 믿음을 알아내고 내보냈다. 형체 없는 자각의 세계가 이 살아 있는 형체들의 세계보다 더 영적이고 귀중하다는 믿음을 내려놓은 것이다. 살아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그러한 편견은 많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편견은 붓다의 가르침을 감각적 쾌락-아름다움, 성관계, 음악, 놀이-을 경계하라는 주장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비구가 비구니보다 지위가 더 높은 것에서, 수도승의 삶을 가족과 일반인의 삶보다 더 중시하는 것에서, 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애착을 경계하는 것에서 그 편견이 생겨난다. 이제 나는 그 편견이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에서 생겨난다고 믿는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한 것이 내게는 선물이었다.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 세계를 초월할 필요가 없다. 사실, 초월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있음이자 그 근원인 형체없는 자각이다. 우리는 체화된 공空이다. 형체의 세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온전한 자각, 자신 또는 타인의 공을 더 많이 알아차린다. 형체 없는 자각의 공간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늘 변화하는 살아있는 형체를 더욱 조건 없이 사랑한다. 자각의 귀의처와 살아있음(이 순간의 실상)의 귀의처는 결국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바로 자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살아있음으로 표현되는 자각을 사랑하면서 나에게는 세 귀의처가 하나가 되었다.


-------타라브랙,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p.454 중에서


타라 브랙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위빠사나 명상 전문가이다. 나는 사실 그녀의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인기있는 많은 영성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어느 정도 대중성에 영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뉘앙스를 간접적으로나마 넌지시 던져주는 것은 대중들에게 흥미와 인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반면, 날 것 그대로의 법은 흥미로울 것이 없다. 얀 케르숏이나 김기태 선생의 가르침이 주로 그러하다. 그들은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소위 '그런 깨달음은 없다'라는 가르침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르침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잘 팔리지 않는 깨달음들이다.


어쨌든 비판의 눈초리를 치켜뜨고 그녀의 책을 탐독했는데,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그녀는 어김없이 삶의 그늘들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극복의 과정은 삶 그 자체를 껴안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진다. 그녀는 '불쾌한 경험에 분노나 두려움으로 대응하는' 인간의 원초적 성향을 극복할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부정적인' 성향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것을 원한다. 때로는 명상 기법을 통해 부정적 순간들을 알아차리고, 쉬어감을 통해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 직면하여 완전한 받아들임이 주가 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들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런 요소들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계기로 숱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렇게 올라온 부정적 감정들은 '반드시' 지나간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부정적 풍경의 발생과 소멸을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하냐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답게 그녀는 세련된 명상 기법을 통해 부정적 감정들을 긍정적 감정들로 유도하기도하고, 부정적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때 까지 시간을 버는 '휴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그 부정적 풍경들은 우리의 의지를 너무나도 쉽게 꺾어버린다. 깨달음의 힘을 이런 부정적 풍경들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해온 사람들은 그런 일을 몇 번 겪고나면 이제 자신의 깨달음과 자신의 수행을 부정해버리곤 한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개선하거나 극복하는 일들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 의지가 꺾이고, 자신과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관해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신의 수행이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타깝고 끔찍한 일들을 수습하고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하루빨리 매듭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시작과 끝은 우리의 진정한 깨달음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삶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때문에 깨달음의 통찰과 수행의 힘을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쓰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들은 삶을 관조하기만 한다. 직접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바라보며 자신에 대한 구경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깨어있는 텅 빈 마음으로 물러서서, 삶의 것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고자하는 그 시도는 언제 다시 경험할지 모를 이 삶을 그저 무미건조하게 흘려보낼 뿐이다. 삶의 것들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 텅 빈 바탕을 잊게 되었을 때는 일부러 '관조'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 바탕을 확연히 알게 된 이후에도 삶으로부터 물러서려는 것은 여전히 삶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남아있는 탓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삶의 이야기들에 속지 말라!” 나는 말할 것이다. “취하라, 취하라! 삶의 이야기들 속에 깊이깊이 취하라!” 삶의 모든 것을 맛볼 일이다. 깨어있으려는 그 놈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모든 생각을, 모든 감정을, 모든 느낌을, 지나간 추억들을, 다가올 미래를, 삶의 모든 풍경들을 맛본다.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삶은 언젠가 끝이 난다. 텅 빈 바탕은 삶과 죽음의 끝에서도 언제나 여여하지만, 한 번 끝난 삶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폼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죽음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온다. 몸은 싸늘하게 식고, 생각은 종적을 감추고, 의식은 점멸할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 마음놓고 주어진 삶을 즐길 일이다. 약속된 시간이 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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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 2020-03-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서재를 즐겨찾기 했습니다. 권하시는 좋은 책들은 다 읽어볼 셈입니다. ^^

2020-03-09 1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텐진 갸초 지음, 주민황 옮김, 툽텐 진파 편집 / 하루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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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티벳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티벳불교에도 다른 대승불교권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종파가 존재하고,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알려진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어릴적부터 불교학에 관한 엘리트로 교육시킨다는 것 정도만 언뜻 들었다.


본 책은 티벳불교의 14대 달라이 라마가 반야심경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엮은 책이다. 현대적이고, 이지적이며, 세련됬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깊이있는 교학적 지식들이 깔끔하게 전개된다. 티벳불교의 교학적 전문성을 엿볼 수가 있었다. 티벳불교에는 여러가지 수행 전통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일반적으로는 불교의 가장 전통적인 수행인 사마타-위빠사나(지관수행)를 계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이 남방 상좌부불교의 수행인줄로만 알고있는데, 사실 중국불교에서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진 모두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에 대한 각찰을 통해 몸과 마음의 공성을 깨닫는 위빠사나 수행이 불교의 전통적 수행이다. 그래서 25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불교 수도승들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쉼없이 관찰했다. 하지만 이런 관찰 수행은 관찰의 뒷편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전제하게 될 위험성이 도사린다. 그래서 남방의 선지식들은 '관찰하는 자'는 없고 '관찰'만 있을 뿐이라 이야기하지만 그 차이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북방 선불교의 조사들은 관찰 수행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여지껏 관찰 수행을 해온 관찰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전통적인 불교권과 선불교간에 엄청난 간극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불교권에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선불교에선 그렇게 수행을 하는 자신을 의심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신을 의심한다. 선불교에서는 점진적 수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 의문, 의구심을 통한 즉각적 통찰(돈오)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중-후기 선불교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금 '수행'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마음을 잘 길들이고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신과 마음을 계발하려면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에서는 점진적 발전 과정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사실 점진적 발전은 자연의 법칙이다. 점진적 발전은 필연적인 인과 법칙이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방편의 결합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p.201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중에서


이것이 티벳불교를 비롯한 일반적 대승불교권, 그리고 남방 상좌부불교의 수행관이다. 그러나 선불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진실한 자기는 근본적 차원이 다른 입장이므로,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자기의 관계는 비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연속적으로 진실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해서 진실한 자기로 전환하므로 임제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나의 견처를 가져 말하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도 없고 이제도 없다. 얻는 자는 바로 얻어서 오랫동안 수행하였다는 세월이 필요없다."라고 말했다.


생사의 자기는 닦을 것이 있지만 생사가 없는 진실한 자기는 닦을 것이 없다. 만일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진실한 자기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임제스님은 닦음이란 장엄문, 불사문이지 불법은 아니라 하고 이것은 업을 조작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생사를 탈각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만일 도를 닦는다면 이것은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통적 조사선을 체험함에는 돈오돈수의 입장이라야 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옹스님 법문 중에서


선불교는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그 깨달음 이후에도 어떠한 작위적 수행을 부정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의가 있을 수 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논쟁이 그 이의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물론 이 또한 '돈오' 이후에 닦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불교의 기본 정신은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에 있다.


우선 '돈오점수설'은 '깨달음'과 '역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논리적 차이를 혼동한 수행법이라는 점을 거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이 둘의 논리적 차이를 한마디로 비유해 말하면, '역사의 영역'이란 어떤 것을 붉은 것이다, 푸른 것이다, 또는 붉게 만들어 가야 한다, 푸르게 만들어 가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리저리하게 꾸려나가는 일의 차원이라 한다면, '깨달음의 영역'이란 어떤 '것'이라고 명사화된 그 '것'이 실재가 아님을, 변화와 관계성 속에 노정되어 있는 가설적이며 환상적인 것임을 통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는 '깨달음'의 문제와 그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내용을 담아가는가 하는 '역사적' 문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돈오점수에서는 본성을 깨닫고 난 뒤에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외적인 능력과 완벽한 인격을 갖추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 하는데, 이러한 견해의 이면에는, '깨달음이란 어떤 내용이나 실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어떤 형태의 실재로서 이해하여 수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깨달음을 그 어떤 '것'-본성이라 표현하는-의 실재성을 타파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본성)을 '푸른 것'이나 '붉은 것' 따위로 이해하는 차원으로 전락시킨 것이 되며, 또 이러한 이해의 바탕이라면 이어지는 점진적인 수행이라는 것도 붉은 삼층집이나 붉은 이층집을 짓는 식이며 푸른 삼층집이나 푸른 이층누각을 짓는 것과 같은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응스님, <깨달음과 역사> 중에서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의 합리성에 관한 가장 현대적 해석이다. 개인적으로 현응스님의 견해와 서옹스님의 '돈오돈수'관은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선승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장이 폄하되고 있는 현응스님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점진적 수행 과정 없이 깨닫는다는 것은 파격적이고 때론 파괴적으로 비춰지는 주장이지만, 조금만 깊이 고려해보아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연기설 만큼이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이다.


달라이 라마의 반야심경에 관한 후기를 남긴다는 것이, 일반불교와 선불교간의 수행관 차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졌다.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불교를 처음 접하려는 사람들 중 조금 지식인 층이 읽으면 아주 좋아할 법한 책이다. 서양인들이 왜 티벳불교를 좋아하는 지도 알 것 같다. 티벳불교의 교학적 견고함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책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대중적이고 노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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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좌 적명 -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유고집
적명 지음 / 불광출판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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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경황없이 일어났듯, 죽음 또한 예고없이 찾아온다. 지난 동안거를 날 때였다. 반철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석달의 안거기간 중 한달 보름이 되었을 때를 반철이라 이야기한다. 한 철 안거의 반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때 선원에서는 보통 반철산행을 간다. 그동안 집중수행으로 누적된 피로와 긴장을 산행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적명스님은 반철산행으로 희양산을 올랐다가 입적하셨다. 사인은 실족사였다. 덕망높은 선승의 갑작스런 죽음에 선원이 술렁였다. 스님들 모두가 황망해했다.


일전에 적명스님 법문을 몇번 들은적이 있었다. 직접 가서 들은 것은 아니고, 영상으로 보았던 것인데. 비슷한 세대의 다른 스님들과는 다르게 법문이 상당히 세련되서 인상 깊었다. 한 번 찾아가야지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동안거를 들어가기 직전에도 봉암사에 연락해 수좌스님을 뵐 수 있는지 여쭸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되지 않아 뵙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동안거에 그렇게 입적해버리셔서 이제는 영영 뵐 수가 없게 되었다.


적명스님은 제방에서 손꼽히는 선승들 중 한 분이시다. 한 평생을 수행에만 바쳤다. 콧대 높은 선승들이 모인 봉암사에서 수좌로 추대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여러모로 선원 수도승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오를 수 없는 자리다. 몇해 전부터는 계속해서 조실로 추대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당신께서 거절하셨다고 한다. 너도 나도 조실 방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애를 쓰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정말 보기 드문 겸양을 지니신 분이다.


적명스님이 입적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유고집이 나왔다. 적명스님의 일기와 법문집을 엮은 책이다. 평생을 수행에 바친 고승의 내밀한 일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드물고 또 드문 일이다. 적명스님의 일기는 1980년 때부터 2008년 때까지의 기록이다. 40세에서 70세까지의 수행 일기가 담겨져 있다. 일기를 읽는 내내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비로굴에서 십이 년 만에 비로소 자리를 옮기기로, 올겨울 결제부터는 백장암으로 옮겨 살기로 작정한 마지막 여름 결제인데 모든 게 한심하고 암담할 뿐이다. 젊은 수좌들이나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자신 있고 똑똑한 사람으로, 공부에도 그 오랜 경륜으로 보면 일가를 이루었을 사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강해 보인다."라는 말을 가끔 듣게 되는 이유도 그래서 그렇다 싶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자신 없고, 처처에 상처 입고,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에도 힘겨워하는가? 지금도 가끔 자살을 생각하고, 어쩌면 머지않아 자살이나 자살 비슷한 종말을 맞게 되지 않을까 하는 비참한 생각을 하곤 한다. 나이 탓이라고 생각되는 건망증을 자주 경험하면서 또는 여타의 감각 기관의 둔화(노화)를 보면서 이렇듯 서서히 다가오는 노쇠는 결국 금생에서의 공부 성취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두렵게 하기도 했다.


이런 사황에서 대중처소로 간다. 실제의 내 모습과는 다른 대단한 존재로 과대 포장하고 잔뜩 기대를 하고 기다리는 숱한 젊은 눈들, 속일 수 없는 눈들 앞으로 간다. 그리고 이어 실망과 분노를 일으키고 나아가 연민과 경멸의 감정까지도 갖게 될 냉엄하고 차가운 존재들 앞으로 간다. 실로 두렵다.


공부, 갑갑해 죽겠다. 어디라고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이젠 영 안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일면 가장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다. 해서 알 수 있는데, 공부에서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바로 가장 큰 공부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힘들어 죽겠는데도 예전과 비교해 보면 진보된 느낌이 드는 것은 이게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진보처가 있는 것인지, 착각일 뿐인지.


온 세상이 나무라도 경멸하고 박해를 가해도 적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쓰러지고 부러지고 차라리 미칠지언정 스스로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진전이 도무지 없을지라도. -----p.101~102 <비로굴을 떠나다-1996.7.15.>


진척없는 수행, 반복되는 욕망과 망상, 감정의 질척거림. 불안한 내면의 심리들이 가감없이 기록되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견처는 얻지 못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구도심을 다그친다. 이따금 본질적 통찰들이 전광과 같이 스치지만 깨어남으로는 이어지지 못하셨는지 스님께선 계속해서 깨달음을 향해 자기 자신을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종용록>에 혜홍 각범의 관음찬송을 소개했다.


'내 마음 밝음이 열악함을 민망히 여기노니/ 시시로 종자가 현행을 일으키도다/ 마치 술로 인해 발광한 사람이/ 술을 끊으려는데 더 좋은 술을 만남 같도다/'


고승의 이런 게송은 충격적이라 할 내용으로 고금의 선사들에 대한 생각을, 특히 한국의 근대 선지식들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만든다. 깨달았다 해도 그토록 심한 갈등을, 욕망의 유혹을 느낀단 말인가? 선지식들의 쉬지 못한 이런 모습은 사람의 잘못이기보다 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법의 문턱이 사바의 수준으로는 너무 높아 있는 것이다. 설사 거친 행동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시시로 느끼는 내면의 갈등이야 그들이라고 어쩌겠는가? 그런 점에서 자신의 내면을 서슴없이 토로하는 각범 스님은 용기있는 선지식이라 칭찬할 만도 하다. -----p.118~119 <선지식의 공부거리-2000.1.28.>


깨달음과 화두 수행에 관한 스님의 흥미로운 고민들이 진지하게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이 60이 되도록 공부의 견처를 제대로 얻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자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너무나 솔직하고 진지한 구도일기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선승의 슬픈 구도일기를 읽으며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것으로 만족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선원에 몸 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저자의 일기가 너무나 씁쓸하다. 여기 선원에서는 수행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좌들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봉암사에서 선승들의 우두머리로 꼽히는 수좌라는 소임을 맡으면서도 견처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현재 제방선원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간화선을 지도하면서도 간화선으로 당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 자조섞인 슬픔을 단순히 감상적으로 받아들이기엔 선원의 현실이 너무나 적나라하다. 글쎄... 알지 못하겠다. 적명스님의 일기는 2008년을 끝으로 더 이어지지 않았다. 2008년 이후 스님의 수행이 어떤 식으로 이어졌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2008년까지의 수행 일기는 너무나 참담하다. 깨달음을 향해가는 구도자의 절박함, 처절함. 그뿐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이따금 법의 그림자는 보였지만 법은 보이지 않았다.


적명스님 당신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깨달음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 삶의 발자취가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수행에 평생을 바친 구도자의 삶을 예찬한다. 그러나, 그러나, 참선이, 깨달음이 이런 식으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


적명스님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적명스님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수행해오셨다. 그 진지한 구도의 삶은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삶이다. 그 삶으로, 그 진지함으로 스님께선 봉암사의 수좌가 되셨고, 콧대 높은 제방 선승들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삶만이 구도자의 전형이며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게끔 여겨지는 현 선방의 세태다. 어떤 선지식은 제자들에게 "수행하다 죽어라"라고 이야기한다. 그 비장한 정신만큼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정말 수행만하다 죽는 것이 모범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수행을 했으면, 선원에 들어갔으면, 좌복 위에 앉았으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참선의, 깨달음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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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 두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
아디야샨티 지음, 이창엽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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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생각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생각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평생 끌려온 생각으로부터 탈각하는 순간, 내면의 동공은 '있음'이라는 미지를 향해 돌아선다. 생각으로부터 짊어져온 삶의 무게가 어느샌가 툭 떨어져나가고 살아있는 매 순간의 연속이 기이하리만큼 경이로운 사건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 속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불안이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선불교에선 이렇게 생각으로부터 탈각하기 위해 참선이란 것을 한다. 때론 공안을 참구하고, 때론 침묵 속에 앉아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14년간 스승으로부터 참선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2세대 미국인 선사였다. 그의 스승의 스승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선사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전통적인 선을 해온 조동종 계열 선사들이다. 저자는 선불교 스승에게서 선을 배웠음에도, 전통적인 불교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으며 체계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책 앞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은총, 봉사 등에 관한 이야기는 기독교적이기까지 하다. 람 다스, 토마스 머튼, 마하라지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바운더리는 상당히 광범위한 것 같다.

현대의 영적 스승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특별한 수행 지식 없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일전에 저자의 전작인 '참된 명상'을 읽으면서, 일본 조동종의 수행법인 지관타좌를 아주 현대적으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명상에 관해 아주 현대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다만 전작들인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와 '참된 명상', '완전한 깨달음', '춤추는 공' 등이 깨달음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이었다면 이번 저작은 독자의 폭을 조금 더 넓게 잡고서 다양한 이야기들로 부드럽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느낌이다. 그래선지 이미 어느정도 안목있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조금 불필요하게 에둘러 이야기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상은 집중적으로 고요함 속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때 어려운 점은 내면의 고요함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내면의 소음이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념적인 마음의 혼돈 및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생기는 미묘하거나 공공연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마음을 통제하는 것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스승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마음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 전쟁을 영원히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마음과, 자기 감정과, 자기 자신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p.142

의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영적 수행은 더 의식하고 더 알아차리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인정하고 의식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수행하며 애쓰는 사람들은 의식으로 들어가려 하거나 의식을 찾으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는 의식을 잃을 수 없다. 물론 의식에 '대한' 의식은 잃을 수 있다. 즉 자신이 의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그걸 숙고하지 못한 채, 혹은 의식이 얼마나 비범하고 신비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의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을 놓칠 수 있는 까닭은, 의식이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p.184~188

그는 수행자들이 혼란스러워할 부분들을 정확히 짚고 넘어간다. 하지만 때론 '의식'에 대한 강조가, 의식에 대한 대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그는 우리 인식의 초점이 대상이 아닌 대상들의 바탕, '의식'으로 이동할 때 대상들과의 동일시로부터 깨어나 '의식' 속에서 안식을 갖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대상에 동일시되는 것으로 귀속될 위험성이 있다. 번역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의식' 또한 결국 조건화 되어진 대상들이다. 생각이나 감정들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긴 하지만 결국 그또한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대상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으로 이루어졌다 이야기하고, 오온은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오온에는 '식(의식)'이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차릴 때, 깨어있을 때, 주시자로 남아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을 때, 마치 진정한 자신처럼 느껴지는 그 의식조차 결국은 무상한 오온인 것이다. 오온이 오온을 알아차리고 있다. 때문에 선가에서는 알아차림을 불성으로 여기는 것은 도적을 주인으로 삼는 격이라 비판한다.

믿고 읽는 아디야샨티지만, '의식'에 관해서 조금 확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아쉽다. '의식'보다는 '미지'라는 접근 방식이 더 좋았다. 아마도 예상 독자의 범위가 넓은 탓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불가피한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적인 영성가들의 책이 그러하듯,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합리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논리'를 뒤집는다. 상당히 노련한 영성가다. 다만 선불교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저자가 여러 영성 가르침을 복합적으로 다루기보단, 스승으로부터 배운 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선사'로서 가르침을 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가르키는 '진리'가 어떤 종교적 관점, 신앙 체계, 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에크하르트 톨레라던지 제프 포스터라던지.... 이미 현대적인 영성가는 너무도 많다. 이제는 오히려 깨달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관점, 어떤 신앙체계, 어떤 교리에 한정되서 가르침을 펴줬으면 좋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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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spigel(케이) 2020-02-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아드야샨티 법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차분하고도 쉬운 말로 풀어나가더군요. 다만 뭔가 대중들에게서의 요구들이 항상 있고 이를 거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인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선의 가르침을 상당 부분 대중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20-02-16 07: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번 리뷰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아디야샨티의 법문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한번 실제로 현장에 가서 법문을 듣고 싶네요.. 대중화를 통해 아디야 샨티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정말 긍정적이지만.. 몇몇 부분이 조금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같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야샨티가 인상적이었던 것이 대중들과 만나는 자리에 여자친구와 함께와서는 친숙하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풀어나가더군요. 그래도 조용조용한 가운데 상당한 흡인력이 있었구요...7~8년 전이었는데 제일 기억나는 것은, ‘깨달음을 변명으로 일상에서 도피하지 말라, 영성추구를 네가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도구로 삶지말라‘는 메세지였던것 같습니다. 아마도 청중들의 질문 중에 많은 부분이 이러한 부분과 연관되어있어서 그랬던 듯 합니다.

2020-02-16 14:50   좋아요 0 | URL
메세지에 상당한 임팩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성을 쫓게 되는 동인의 대부분이 결국 삶의 그늘진 면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인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깨어남은 삶의 그늘마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의 모든 모습과 심지어는 삶의 종말까지도요,,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7-8년 전쯤 아디야샨티 법문을 현지에서 실제로 들으실 정도면 이 공부를 상당히 깊고 오래 하신 분 같습니다. 교포이신가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포 아닙니다. 아드야샨티를 본건 미국 유학당시였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영성분야와 전혀 무관하게 사회생활하고 있습니다. 선불교나 영성에 관심을 둔 지는 꽤 됐습니다만, 그냥 관심의 단계에서 제대로 공부는 못했습니다...ㅠㅠ.. 아직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 같구요. 닭님의 책은 최근 우연히 제가 인터넷상에서 책 리뷰를 보고 알게 됐네요. ‘무력한 깨달음‘-깨달음으로는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한다..였던가.. 어쨌든 그런 문구가 와닿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프 포스터도 님의 리뷰를 보고 읽어보려구요. 사회생활하면서 수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 들여다보기가 쉽지가 않네요. 저야말로 비효율적(?)이게 선불교, 그 외 대안영성 등등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ㅎㅎ 어떻게 가면 될지 부디 조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0-02-17 08:20   좋아요 0 | URL
사회생활하면서 선이나 영성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는 여간 힘들 것 같습니다. 시시때때로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목전에 놓여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결핍감이나 불안감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관심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이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감히 조언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프 포스터 책이 상당 부분 도움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그늘까지도 수용하게 되는 것, 그래서 선은 님의 말처럼 죽거나 살거나 ‘그러할 뿐‘이라는 것은 이해됩니다. 님의 책에서 선의 스승들이 전쟁을 옹호했다거나 쾌락에 빠져 살았거나 하는 부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님의 책을 읽고난 후 ‘이뭣고‘가 상당히 힘을 받더군요. 굳이 좌선을 하지않아도 문득문득 생활 중에 이뭣고가 들려졌습니다...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최근 버나뎃 로버츠의 ‘어느 관상수도자의 무아체험‘이란 책을 봤는데 기독교적 관상수도의 단계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지복을 느끼는 단계--->어둠의 단계--->이후 마지막 단계에서 저자가 묘사한 단계가 님이 말씀하신 그저 이러할 뿐의 단계와 꽤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신의 가장 중심부로 들어갔더니 지복이나 황홀경이 아니고, 그냥 평소의 내가 밝혀졌을 뿐이더라..라고. 그냥 이대로 이 감각 이대로 보이는 그대로 더라라고.공감하구요..흥미가 생겨서 이 저자의 몇 년 전 책을 아마존에서 구매해놓고 있습니다..ㅎㅎ 이게 제 병이기도 합니다. 읽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ㅠㅠ

2020-02-17 08:32   좋아요 0 | URL
제 이야기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쪽에는 제가 아는 바가 없어 입을 여는 것이 어렵지만,, 기독교 영지주의쪽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선의 가르침과 많은 부분 상통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류 기독교 쪽에서는 이단으로 치부한다는 것 같군요..

저희 선종에서는 수행 중에 책 읽는 것을 거의 금기시하는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이해에만 머물러선 안되겠지만,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직관적 통찰과는 별개로, 이해도 상당 부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제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버나뎃 로버츠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네요... 한 번 구해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쇼 삶의 기록 21세기를 사는 지혜의 서 23
마 프렘 순요 지음,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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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의 자서전인줄 알고 샀는데, 오쇼의 제자가 오쇼와 함께한 날들을 기록한 일종의 로드에세이다. 원제는 Diamond days with osho. 오쇼와 함께했던 빛나는 나날들 쯤 되겠다. 저자는 영국인 여성인데, 특별히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다가 문득 원인모를 결핍감을 느끼고 오쇼의 수행 공동체를 찾게 된다. 그는 오쇼와 그의 수행 공동체 생활에 매료되어, 이전의 모든 생활을 처분하고 오쇼 수행 공동체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녀가 처음 맡았던 일은 오쇼의 옷을 세탁하는 세탁부. 이후 그녀는 오쇼의 비서가 되어 오쇼가 죽는 날까지 그를 시봉한다.


내용은 평이하다. 오쇼와 그 수행 공동체의 생활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쯤 읽어볼만하다. 문장도 평이한 수준. 이따금 깨달음에 관한 진지한 통찰이 엿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는 마음과 나 자신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끊임없이 머리 속을 질주하는 생각들,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감정조차도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감정적인 반응은 나의 인격을 구성하는 조건들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p.53


그러나 저자 개인의 통찰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은 책에서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책의 팔할은 오쇼에 대한 예찬으로 점철되어있다. 저자는 솔직하게 오쇼에 대한 우상화를 고백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책의 시작과 끝은 모두 오쇼가 대단하고 매력적인 구루라는 데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사실, 나는 오쇼를 보통 사람으로 보기가 참 어려웠다. 나는 그가 육체를 떠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차게 된 것은 그가 육체를 떠난 뒤의 일이다. 더 이상 그에게 의존할 수 없게 된 후에야 나는 그의 겸손함과 인간적인 약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내게는 그를 신적인 존재로 본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나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지 못했었다. 나 자신의 깨달음은 오쇼라는 엄청난 존재만큼이나 요원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무기력 안에서 나는 계속 코를 골며 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p.137


오쇼는 독특하다. 화려하고 재치있는 언변, 카리스마와 리더쉽, 신비주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외모와 패션은 그를 단순히 깨달은 구루가 아닌 깨달은 '매력적인' 구루로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꾸밀줄 알았다. 그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간에, 그는 스스로 아주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고, 서방의 결핍감을 느끼는 젊은 히피들 또한 그런 매력적인 상품을 소비하는데 최적화되어있었다. 오쇼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사기꾼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장사꾼이다. 그는 깨달은 구루로서, 자기 자신을 아주 잘 팔고 다녔다. 그 상품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것은 그의 깨달음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깨달았고, 정직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사실보다 조금 더 매력적으로 포장하는데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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