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
타라 브랙 지음, 윤서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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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한동안 고수해온 무의식적인 편협한 믿음을 알아내고 내보냈다. 형체 없는 자각의 세계가 이 살아 있는 형체들의 세계보다 더 영적이고 귀중하다는 믿음을 내려놓은 것이다. 살아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그러한 편견은 많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편견은 붓다의 가르침을 감각적 쾌락-아름다움, 성관계, 음악, 놀이-을 경계하라는 주장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비구가 비구니보다 지위가 더 높은 것에서, 수도승의 삶을 가족과 일반인의 삶보다 더 중시하는 것에서, 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애착을 경계하는 것에서 그 편견이 생겨난다. 이제 나는 그 편견이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에서 생겨난다고 믿는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한 것이 내게는 선물이었다.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 세계를 초월할 필요가 없다. 사실, 초월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있음이자 그 근원인 형체없는 자각이다. 우리는 체화된 공空이다. 형체의 세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온전한 자각, 자신 또는 타인의 공을 더 많이 알아차린다. 형체 없는 자각의 공간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늘 변화하는 살아있는 형체를 더욱 조건 없이 사랑한다. 자각의 귀의처와 살아있음(이 순간의 실상)의 귀의처는 결국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바로 자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살아있음으로 표현되는 자각을 사랑하면서 나에게는 세 귀의처가 하나가 되었다.


-------타라브랙,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p.454 중에서


타라 브랙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위빠사나 명상 전문가이다. 나는 사실 그녀의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인기있는 많은 영성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어느 정도 대중성에 영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뉘앙스를 간접적으로나마 넌지시 던져주는 것은 대중들에게 흥미와 인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반면, 날 것 그대로의 법은 흥미로울 것이 없다. 얀 케르숏이나 김기태 선생의 가르침이 주로 그러하다. 그들은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소위 '그런 깨달음은 없다'라는 가르침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르침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잘 팔리지 않는 깨달음들이다.


어쨌든 비판의 눈초리를 치켜뜨고 그녀의 책을 탐독했는데,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그녀는 어김없이 삶의 그늘들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극복의 과정은 삶 그 자체를 껴안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진다. 그녀는 '불쾌한 경험에 분노나 두려움으로 대응하는' 인간의 원초적 성향을 극복할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부정적인' 성향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것을 원한다. 때로는 명상 기법을 통해 부정적 순간들을 알아차리고, 쉬어감을 통해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 직면하여 완전한 받아들임이 주가 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들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런 요소들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계기로 숱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렇게 올라온 부정적 감정들은 '반드시' 지나간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부정적 풍경의 발생과 소멸을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하냐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답게 그녀는 세련된 명상 기법을 통해 부정적 감정들을 긍정적 감정들로 유도하기도하고, 부정적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때 까지 시간을 버는 '휴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그 부정적 풍경들은 우리의 의지를 너무나도 쉽게 꺾어버린다. 깨달음의 힘을 이런 부정적 풍경들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해온 사람들은 그런 일을 몇 번 겪고나면 이제 자신의 깨달음과 자신의 수행을 부정해버리곤 한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개선하거나 극복하는 일들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 의지가 꺾이고, 자신과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관해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신의 수행이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타깝고 끔찍한 일들을 수습하고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하루빨리 매듭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시작과 끝은 우리의 진정한 깨달음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삶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때문에 깨달음의 통찰과 수행의 힘을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쓰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들은 삶을 관조하기만 한다. 직접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바라보며 자신에 대한 구경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깨어있는 텅 빈 마음으로 물러서서, 삶의 것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고자하는 그 시도는 언제 다시 경험할지 모를 이 삶을 그저 무미건조하게 흘려보낼 뿐이다. 삶의 것들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 텅 빈 바탕을 잊게 되었을 때는 일부러 '관조'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 바탕을 확연히 알게 된 이후에도 삶으로부터 물러서려는 것은 여전히 삶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남아있는 탓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삶의 이야기들에 속지 말라!” 나는 말할 것이다. “취하라, 취하라! 삶의 이야기들 속에 깊이깊이 취하라!” 삶의 모든 것을 맛볼 일이다. 깨어있으려는 그 놈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모든 생각을, 모든 감정을, 모든 느낌을, 지나간 추억들을, 다가올 미래를, 삶의 모든 풍경들을 맛본다.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삶은 언젠가 끝이 난다. 텅 빈 바탕은 삶과 죽음의 끝에서도 언제나 여여하지만, 한 번 끝난 삶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폼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죽음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온다. 몸은 싸늘하게 식고, 생각은 종적을 감추고, 의식은 점멸할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 마음놓고 주어진 삶을 즐길 일이다. 약속된 시간이 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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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 2020-03-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서재를 즐겨찾기 했습니다. 권하시는 좋은 책들은 다 읽어볼 셈입니다. ^^

2020-03-09 1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